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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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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약속들

등록 2020-02-15 07:45 수정 2020-05-02 19:29

엊그제 집 근처 네거리를 지나다 펼침막에 시선이 꽂혔다. “20세 이상 1인당 월 150만원씩 국민배당금 지급”. 나도 스무 살 넘는 ‘국민’이니 자격이 있겠네. 씩 웃음이 나오면서 머릿속으로 계산해본다. 1년이면 얼마지? 몇 번 사보지도 않았고 500원짜리 한 번 당첨된 적도 없지만 1등 당첨 상상은 수없이 했던 복권처럼, 매달 150만원 받는 걸 잠시 상상해본다. 빈말이라도 거저 돈을 준다니, 기분이 나쁘지 않다. 오늘 아침 그 자리에 다시 가보니 신기루처럼 펼침막은 사라지고 없다.

공돈을 누가 주겠다는 건지 기억을 더듬어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이름도 생소한 국가혁명배당금당이다. 처음 보는 로고를 가만히 뜯어보니, ‘그분’의 모습이다. 선거 때마다 엽기 행각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분이다. 결혼수당 1억원, 출산수당 5천만원, 65살 이상 노인 매월 70만원, 1인당 5억원 이내 가계부채 탕감…. ○○혁명이라 이름 붙인 이 당의 공약 33가지를 읽다보면 믿거나 말거나다.

지난 월요일 점심 약속이 있어 모처럼 서울 강남에 갔다. 몸을 실은 택시가 반포대교를 건너 고속버스터미널 옆 고가도로 위를 내달릴 때다. 차창 밖 아파트 래미안퍼스티지 옆면에 걸린 대형 펼침막이 눈에 들어왔다. “징벌적 종부세 폐지”. 20억원 넘는 이곳 아파트에 사는 주민들은 펼침막을 보면서 기분 좋은 상상을 했을 법하다. 형편 따라 다르겠으나 말대로 된다면 100만원 넘는 종합부동산세를 아낄 수 있으니.

펼침막 문구는 제1야당 후보의 공약이다. ‘징벌적’이란 단어가 불편했다. 사전적 의미는 “죄를 지은 데 대하여 벌을 주는 또는 그런 것”이다. 펼침막은 주택 부자들을 죄인 취급해 세금을 매기는 종부세를 부정한다는 뜻을 내포한다. 비싼 아파트가 없어 징벌조차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은 뭘까.

겨울이 몸부림치는가 싶더니 어느덧 끝자락이다. 곧 봄이다.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의 계절을 앞두고 공약은 이미 홍수다. 공약 앞에 ‘빈’ ‘헛’ ‘장밋빛’이란 수식어가 다반사이긴 하나 엄연한 약속이다. 우리는 이 약속에 모순될 때가 있다. 공약이 쏟아질 때 어느 게 좋은지 재원 조달 방안 등을 따진다. 무책임한 공약이 많으니 실현 가능성에 높은 점수를 매긴다. 사실 정책이 당락을 좌우하는 경우는 드물다. 경험이지만, 당선과 공약의 상관성은 높지 않다. 투표할 때 먼저 정당, 가끔은 인물이다. 선거가 끝나면 사회는 당선자의 공약 실행력에 주목한다. 공약 이행률은 책임과 신뢰의 잣대가 된다. 언론, 시민사회단체, 경쟁 정치세력은 공약 실행 여부와 정도를 평가한다. 그에 맞춰 대통령이나 선거에서 이긴 정치인은 공약 이행률을 공개한다.

내가 사는 동네에 천이 흐른다. 10년에 한 번쯤 홍수가 나면 간선도로가 물에 잠시 잠긴다. 보통 무릎 높이 수위를 유지하는데 한때 이 천에 유람선이 들어오는 뱃길이 날 뻔했다. 12년 전 총선 때 나온 공약이었다. 공약을 내건 후보가 당선됐다면 어찌 됐을까. 그가 낙선한 총선 몇 달 전 같은 당의 이명박이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는 공약을 지켜 4대강에 댐을 지었다. 4대강 공약은 중랑천에 뱃길을, 전국에 많은 내와 천 그리고 강가 개발에 영감을 불어넣었다. 4대강은 지금도 돌이킬 수 없는 환경재앙이지만, 불도저 같은 뚝심으로 이명박은 공약을 지켰다.

후보 시절 내건 약속은 대개 현실적 조건과 제약 속에 잊히거나 묻히기 십상이다. 정치인이 비판받는 단골 소재다. 한데 공약 이행률 잣대는 생각지 못한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 곳곳에 휑한 도로와 다리, 모노레일, 대형 경기장….

모두 매월 150만원을 받는다면 그 끝은 뻔하다. 종부세를 폐지하면 누군가 세금이 줄어 좋겠지만, 자산 불평등 심화와 집값 상승을 부채질할 수 있다. 방방곡곡 지키면 안 될 위험한 약속이 아무말 대잔치처럼 마구 쏟아진다. 웃고 넘길 일이 아닌 게, 살아남아 재앙이 되는 공약이 너무 많다.

류이근 편집장 ryuyige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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