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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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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7-03-14 09:14 수정 2020-05-02 19:28

정치체제가 사라져도, 정치 이념은 지속된다. 나치가 패망했다고 파시즘이 멸종하는 게 아닌 것처럼, 박근혜가 대통령에서 파면됐다고 ‘유신주의’가 끝장나는 것은 아니다. 한국적 전체주의 이념인 유신주의는 힘을 숭상한다. 유신주의는 강력한 것에 복종하는 열등감인 동시에 스스로 강자가 되려는 열망이다. 그래서 (강자였던) 일제 식민통치를 수긍하고, (오늘의 강자인) 미국을 숭배하면서, (상고사까지 들먹이며) 스스로 강자였던 시절을 미화한다. 힘을 숭배하므로, 반대자를 힘으로 제압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 힘은 군대(쿠데타), 검찰(고문수사), 경찰(시위진압), 개인(백색테러)에 의해 변용된다.

유신주의는 정서적 이념이다. 자기방어 기제를 단련해온 인간은 잠재의식 수준에서 힘을 동경한다. 힘에 대한 숭배는 힘센 사람을 흠모하는 대중에게 쉽게 전파된다. 특히 가난하고 힘없는 자는 힘을 두려워하는 동시에 동경한다. 유신주의자들은 그들에게 힘을 약속한다. 당장의 개인은 어려워도 장차의 집단은 강대할 것이라고 꼬드긴다. 진정으로 강자가 되는 길은 강력한 국가의 일원이 되는 데 있다고 유혹한다. 유신주의가 세대를 이어가며 한국에서 번식하는 이유다.

그 약속이 배반당할 때 유신주의는 붕괴한다. 박정희의 종말과 박근혜의 파면이 그렇게 도래했다.

1979년 10월26일은 김재규의 총탄으로 새겨진 날이 아니다. 부마항쟁 등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등장했다. 시위가 번진 배경에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실패가 있었다. 불황은 ‘힘에 대한 약속’의 붕괴였고, 그 약속을 믿으며 동원과 감시를 인내한 국민은 등을 돌렸으며, 그걸 지켜본 측근도 지도자를 버렸다.

2017년 3월10일은 헌법재판소의 판결로 기억될 날이 아니다. 촛불집회가 있었고, 그들을 광장으로 등 떠민 ‘헬조선’의 현실이 있었으며, 박근혜의 약속이던 ‘창조경제’와 ‘증세 없는 복지’의 실패가 있었다. 그래서 측근조차 탈당하거나 대통령의 잘못을 고발한 것이다.

봄이 왔다. 술 한잔 나눠 마시기 좋은 날이다. 그러나 유신체제 붕괴 뒤 무엇이 왔는지 회고하는 게 좋을 것이다. 박정희의 죽음 이후에도 유신주의는 살아남아 전두환 쿠데타와 노태우 독재의 기반을 이뤘다. 그것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우익 사회운동의 이념이 됐고, 이명박·박근혜 정부에 이르러 권력의 깃발로 부활했다.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는 52%의 득표로 당선됐다. 임기 초반 최대 지지율은 67%였다. 박정희의 딸이고, 독재를 반성한 적 없으며, 유신체제의 주역들을 등용했고, 국가정보원을 동원해 반대파를 사찰·탄압해도, 박근혜가 철저한 유신주의자임을 알았음에도 한국의 시민은 지지를 보냈다. 불과 1년 전이다.

그래도 봄은 왔다. 새로 씨앗을 심기 좋은 날이다. 그러나 이 씨앗을 심는 땅이 정글의 영토라는 점을 염두에 두는 게 좋겠다. 힘을 숭배하는 짐승이 지배하는 정글, 박정희가 죽어도 박근혜가 왔던 정글, 박근혜가 갔지만 또 다른 유신주의자가 등장할 정글.

유신주의 감시체제의 핵심인 국정원을 해체하고 유신주의 동원체제의 핵심인 언론·교육을 민주화하지 않는 한, 나는 아직 만세를 부르지 못하겠다. 힘을 숭배하는 이들이 곳곳에 똬리를 튼 정글에서 씨앗은 언제든 짓밟힌다. 마침내 봄이 오긴 했다. 그러나 정글의 봄이다. 잠시 숨죽인 유신의 짐승이 기회만 노리는 봄.

안수찬 편집장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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