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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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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왁

등록 2017-03-07 08:51 수정 2020-05-02 19:28

몇 년 전 어느 봄날, 쇠소깍과 외돌개 사이의 해변을 따라 제주 올레길을 걸었다. 몰아치는 파도를 감당하느라 검은 바위는 숭숭 뚫린 구멍마다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파도를 인내하는 바위에서 할머니는 혼자 바람 맞고 있었다. 물질하는 해녀였다. 검은 잠수복 위에 치마와 점퍼를 입었다.

테왁 옆에 빨간 물통을 두었는데, 흘끗 보니 멍게와 해삼이 소주병 사이로 꿈틀댔다. 아직 손님을 맞지 못했는지, 식칼과 도마는 깨끗했다. 그대로 멈춰 먹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냥 걸었다. 가다보면 또 나오겠지, 소주 마시면 이 길 다 못 걷는다, 생각했다. 할머니가 나를 쳐다보았다. 먼 곳을 보는 눈빛이었다. 마을 어귀에 서 있는 백구 같았다.

그 뒤로도 숱하게 제주를 들락거렸지만, 멍게와 해삼을 바닷물에 담가두고 손님을 홀로 기다리는 해녀를 마주치지 못했다. 바람 부는 날과 바람 불지 않는 날, 흐린 날과 맑은 날, 봄과 가을을 거쳐 여름과 겨울에도 해녀 할머니의 바위식당이 생각났다.

그 특별함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길은 없고, 그저 떠오르는 문장 몇 개로 직관해본다. 깨끗하다, 정직하다, 소박하다, 투명하다, 그래서 그 음식은 특별할 것이다…. 이를테면, 제주 바다가 깨끗한 것은 올레길에 퍼진 맑은 짠내로 보아 틀림없는 일이고, 물질에 썼던 테왁이 곁에 있으니 금방 잡아온 것임에 분명하며, 주름져 굽은 할머니가 사람을 속이진 않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멍게와 해삼으로 충분한 것이었다.

지난주에 이어 탄핵·대선 특집호를 내놓는다. 한동안 이 매체가 제주 남쪽 바다의 바위식당 같기를 꿈꾼다. 생산자, 생산과정, 생산물의 특성을 숨김없이 보여준 바위식당은 최고의 식당이다. 해녀 할머니의 방식을 따라, 우리의 정체를 투명하게 드러내 보이면, 사실을 어떻게 잡아챘는지 보여주면, 문제의식이 무엇이었는지 설명하면, 그것으로 믿음을 얻을 수 있다면, 소박한 기사나마 현란한 종합 뉴스 매체를 능가할 수 있을 것이라 꿈꿔본다.

이것을 언론학에선 투명성(transparency)이라 부른다. 공정성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개념이다. 원래 정치 보도의 제1의 원칙은 공정성에 있다. 정치는 선택의 문제이므로, 무엇을 선택할지 판단하려면 정보가 필요한데, 그 정보를 제공하는 언론이 편향·편파적이면 제대로 선택할 수 없다. 그래서 언론을 향한 욕설은 종종 “불공정하다, 편파적이다”는 말로 집약된다.

그런데 공정성은 모호하고 위태로운 개념이기도 하다. 얼마나 공정한지 눈금자로 측정하기 불가능하다. 게다가 모든 기자와 언론은 각자의 이념을 내장하고 있다. 그것이 소거된 ‘진공의 정치 지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문제를 풀려고 안간힘을 써온 외국 선진 언론(학)은 투명성을 다듬고 있다. 뉴스룸 내부의 고민과 사정과 상황을 보여줄 테니, 믿어보라고 말을 거는 일이다.

대선 보도에 집중하기로 한 의 기사는 과연 신뢰할 만한가. 그 물음에 대한 첫 번째 답을 으로 그렸다. 박창수 P&C정책개발원 이사의 도움을 받아, 의 (취재·사진 기자 18명 가운데) 15명 기자들의 정치 성향을 조사했다. 경제체제 및 개인 자유에 대한 일련의 질문에 답하면, 4분면의 좌표에 각자 위치가 나타나는 방식이다(www.pncreport.com). 2010년 3월, 은 이 방식으로 여론주도층 52명의 정치 성향을 조사한 바 있다('당신의 정치인은 어디에 있나요?'). 의 붉은 점이 기자들의 정치 성향 좌표다. 이를 2010년 조사에 참여했던 주요 정치인(대선 주자는 푸른 점, 기타 정치인은 검은 점)과 비교할 수 있다.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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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자유주의 우파, 권위주의 우파, 권위주의 좌파, 자유주의 좌파 등이 자리하는데, 한국의 정치인들은 대부분 자유주의 좌파에 속해 있다. “개발독재 이후 진정한 시장자유주의를 경험한 적이 없는 한국에서는 보수 정치인들조차 시장에 대한 국가 개입을 지지하기 때문에” 정치 성향의 스펙트럼이 사분면에 고루 분포돼 있지 않다고 박창수 이사는 설명했다. 따라서 박원순 서울시장을 좌표의 중심으로 삼아, 각 개인의 상대적 위치를 보는 게 좋을 것이다.

‘정치적 가치관’을 표시한 이 좌표를 과잉 해석하는 일은 피하려 한다. 정치는 정책을 매개로 정당과 이어져 있고, 가치관과 이념과 정책은 종종 이격된다. 즉, 같은 좌표의 정치인이라 해도 이념과 정책 수준에서 극단을 대표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 좌표는 우리의 테왁이다. 할머니 해녀가 숨을 쉬려고 바다 위로 올라와 매달리는, 물질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부표다. 그것은 불확정적이어서 끊임없이 흔들리지만, 그것 없이는 물질을 할 수 없다. 기자들의 상당수는 개인의 자유를 국가의 개입으로부터 지키는 것을 중시하고, 시장의 자유가 국가적 정의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경계한다. 그것에서 우리의 대선 보도가 시작한다.

그렇게 마련한 우리의 메뉴는 소박하다. ‘만리재에서’는 대선에 대한 기자들의 논의·고민·토론을 담을 것이다. 표지 기사에선 매주 핵심 의제를 선정해, 그것이 왜 절박한 문제인지 보도할 것이다. 이에 대한 각 대선 주자의 정책을 비교해 우열을 드러낼 것이다. 매호마다 대선 주자 한 명씩 집중해 보도할 것이다. 방송인 김미화씨가 후보를 만나 대표 공약을 검증한다. 담당 기자는 후보의 취약점만 파고들 것이다. 후보에 대한 여러 단행본·문헌을 검토하고, 선거 관련 잡다한 궁금증을 풀어보며, 격동하는 여론 흐름을 깊이 분석하는 꼭지 등도 준비돼 있다.

소박하지만, 분명한 맛과 색깔의 신선한 음식을 내놓는다. 요동치는 파도 위에 테왁 하나 올려놓고 숨을 견디며 캐올렸다.

안수찬 편집장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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