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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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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등록 2017-01-03 06:17 수정 2020-05-02 19:28

기억은 사건이 아니라 감각으로 구성된다. 색깔, 냄새, 감촉, 음성으로 뇌 또는 가슴에 고인다. 어두운 산길을 갈라놓던 반딧불이의 초록 광선, 삭풍을 헤집는 연약한 손바닥의 온기, 전화기 너머 풀 죽어 갈라지던 음성, 버건디 머플러에 깃든 향수 등이 기억의 이름으로 저장된다.

기억은 삶에 브레이크를 건다. 삶은 관습의 숨 가쁜 반복이다. 눈 뜨고, 고양이 자세로 기지개 켜고, 물 두 컵 마시고, 신문 챙겨 화장실 가고, 음악 파일 고르며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일이 삶을 채운다. 그러다 문득 색깔·냄새·감촉·음성 따위가 뇌 또는 가슴에서 역류하면, 관습의 반복이 멈춘다. 기억의 중력에 끌려가 감각의 늪에서 허우적댄다. 그것을 감당하기 힘든 우리는 큰 숨을 내쉴 수밖에 없다. 사슴의 눈으로 하늘과 땅을 번갈아 쳐다볼 수밖에 없다.

나는 지금 세월호에 관해 적고 있다.

2016년의 가장 극적인 변화는 박근혜씨의 탄핵소추나 촛불시민이나 몰염치한 국회의원이랄지 갑자기 당당해진 검찰 등에 있지 않다. 그것과 비슷한 일은 과거에 있었고 앞으로도 재현될 것이다. 격변을 증거하는 일은 따로 있다. 이제 아무도 뻔뻔하게 말하지 않는다. ‘왜 아직도 세월호냐’고 감히 지껄이지 않는다. 왜 3년 동안 줄기차게 세월호를 추적하느냐고 에 시비 걸지 않는다.

무리한 운항 등은 안전 불감의 풍토라 쳐도, 무리수를 감행한 해운회사의 배짱을 국가정보원이 거들었다는 의혹은 여전하다. 해경의 무능은 둘째 치고 영상보고를 독촉하면서도 아무도 판단을 하지 않은 청와대의 무능은 빙산의 일각만큼도 밝혀지지 않았다. 박근혜씨는 변호인을 통해 “뭘 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는, 파렴치범의 단골 변명만 내놓고 있다. 청와대는 검찰과 감사원을 압박해 진상 규명을 막았고, 이를 비판하는 언론과 문화예술인을 좌파로 낙인찍어 탄압했으며, ‘보상금 더 받겠다는 심보’라며 유족을 돈벌레로 몰았다.

나는 지금 한국 사회의 광기에 관해 적고 있다.

인간의 기억은 간사한 것이어서 누가 언제 무엇을 왜 어떻게 했는지 일일이 떠올리지 못한다. 그러나 감각의 모양새로 아주 오랫동안 지속된다. 진상 규명의 노력을 악마의 선동으로 몰았던 불과 몇 달 전의 과거는 전남 팽목항 앞바다의 회색 파도, 구겨진 후드점퍼의 눅눅한 감촉, 그리고 목소리, “사랑한다” 말하고 떠난 아이의 목소리로 뇌와 가슴에 남겨져 있다. 그것은 수시로 역류하여 일상을 정지시킨다.

세월호는 대통령, 청와대, 행정부, 검경, 감사원, 국회, 언론, 기업이 싸지른 온갖 구정물의 급류에 휘말려 침몰했다. 2017년 새해 소원이 있다면, 감각으로 남겨진 세월호를 사건으로 복원해 국가적으로 기록하는 일이다.

정권 교체, 헌법 개정 등은 그것을 위한 수단이자 하위 범주에 불과하다. 새 헌법과 새 대통령이 좋은 나라를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되건 안되건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 진실을 밝히고 정의를 묻는다면, 나쁘고 무능한 나라로 또다시 미쳐 돌아가는 일은 막을 수 있다. 참사의 기억을 간직하는 한, 우리 모두 안전할 수 있다.

새해 첫 호에도 세월호 기사가 있다. 새 세상을 꿈꾸는 청년들의 이야기도 담았다. 희망도 고이면 독이 된다. 웅덩이에 방치되어 독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 새해의 새 세상에선 좀 웃을 수 있기를, 평화로울 수 있기를.

안수찬 편집장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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