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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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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세대

등록 2016-12-13 09:10 수정 2020-05-02 19:28

1987년 봄과 여름의 기억은 세 장면으로 구성된다.

1. 첫사랑과 최루탄. 가닿지 못할 꿈이 많았던 열여섯, 첫사랑이 왔다. 어느 소녀를 등굣길에 마주친 뒤, 매일 그 집 앞을 서성였다. 얼굴 보는 게 소원이었다. 미스 리틀코리아를 거쳐 방송국 어린이 합창단원을 지냈으며, 그 도시 통틀어 가장 유명한 여학생 두셋 가운데 하나임을 나중에 알게 됐다. 넘을 수 없는 벽이었지만 짝사랑은 원래 막무가내다. 처음(그리고 마지막)으로 빵집에 함께 갔다.

길가에 진달래가 조롱조롱 매달린 늦봄의 산책은 금세 체포당했다. 어디선가 최루탄이 터졌다. 대학생들이 달음박질치고 전경들이 뛰어왔다. 소녀 앞에서 나는 대학생들을 비난했다. 소녀한테선 샴푸 향기가 났다. 어느 대목에서 마음 상했는지는 모르겠다. 이후 그녀는 내 편지에 답하지 않았다. 나는 데모꾼이 더욱 싫어졌다.

2. 시집과 사진전. 여름방학의 어느 주말, 시내 대형서점에 갔다. 시집이 베스트셀러인 시절이었다. 서정윤·도종환·이해인·장정일 등을 서서 읽었다. 돌아나오는데, 맞은편 YMCA 건물 앞에 사람들의 줄이 길었다. 사진전을 연다고 했다. 무료라 했다. 호기심으로 줄에 껴들었다.

이마에서 땀이 흐르는데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광주 항쟁 사진전’이었다. 깨진 수박처럼 뇌수를 흘리며 죽은 자를 보았다. 검고 깊은 칼자국이 턱 아래를 후비고 들어간 사진도 보았다. 열기에 말랐던 눈이 눅눅해졌다. 그때까지 알았던 세상이 무너졌고, 그날 이후 시집을 멀리했다.

3. 강만길과 송건호. 시집 대신 다른 책을 읽기로 했다. 그 시절 다른 책은 대형 서점엔 없었다. 소문을 듣고 ‘분도서원’이란 곳을 찾아갔다. 가톨릭 전문 서점을 표방한, 실제로는 사회과학 서적에 간혹 금서까지 진열한 책방이었다. 급진주의 냄새가 나는 책은 일부러 피했다. 가장 무던한 제목으로 무턱대고 골랐다. . 책장마다 불꽃이 튀었다. 독립운동·해방·좌우대립·이승만·박정희 등을 새로 깨우쳤다. 주저자는 강만길과 송건호. 그가 재직하던 대학에 입학하고, 그가 창간한 신문사에서 일할 운명이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1987년 6월은 그렇게 왔다. 나에게 그것은 독재타도와 별 상관이 없었다. 대신 짝사랑과 서정시에 빠졌던 감각을 정치와 역사로 돌려놓았다. 비로소 세상을 내 안에 끌어당기게 했다. 덕분에 이렇게 살고 있다.

2016년 12월이 위대하다면, 대통령을 끌어내렸다는 성취 때문이 아니다. 10대와 20대가 이 과정을 모두 보고 겪었다. 그들은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공간에서 이전까지 꿈꾸지 못했던 것을 만들고 치르며 옛 세대와 전혀 다른 삶을 살아낼 것이다. 87년 6월 세대가 늙어버렸어도 이제 다 괜찮다. 지금부터 2016년 12월 세대가 주인공이다.

역사는 바다와 같다. 광막하여 무섭다. 다만 섬이 있어 계속 항해할 수 있다. 시민항쟁의 샘물과 체제 변혁의 야자수가 있는 섬이다. 이 섬에 닿은 10대와 20대를 축복한다. 나처럼, 바보처럼, 사랑과 문학을 포기하진 말고, 그것까지 아우르면서, 역사와 정치의 감각을 예민하게 키워가길 축원한다.

오늘은 술 욕심을 내야겠다. 12월 세대가 태어났으니 옛 기억에 젖은 6월 세대는 오늘, 하루만, 쉬어도 괜찮을 것이다. 좀 막무가내여도 괜찮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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