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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5-04-28 07:01 수정 2020-05-02 19:28

1998년 가을, 미국 의 미첼 추코프 기자는 아내와 함께 산부인과 병원에 갔다. 산모와 태아 모두 건강하다고, 축하한다고 의사는 말했다. 기자 남편은 엉뚱한 의문을 품었다. ‘태아가 건강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대부분 중절한다고 의사는 답했다. 기자의 의문은 멈추지 않았다. ‘대부분 중절한다니, 그렇지 않은 부모도 있다는 건가?’ 물론 있었다. 태아에게 기형이 있다는 것을 알고도 낳아 기르기로 결심하는 부모가 있었다.

추코프 기자는 그런 부모들이 모인 인터넷 카페에 가입했다. 그들을 상대로 ‘사전 취재’를 벌였다. 한국의 기자라면 이 단계에서 바로 기사를 썼을 것이다. 몇몇 부모의 사례를 모아 200자 원고지 10매 안팎의 ‘기획 기사’를 썼을 것이다. (물론 한국의 데스크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최근 이슈도 아니고, 뭐 이런 걸 기사로 써야 하나? 성완종 사건이나 취재해봐!”)

미국의 기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장애아와 그 부모를 돕지 못하는 미국 복지체제의 허점을 제대로 고발하려면 더 생생한 기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사태를 더 밀도 높게 보여줄 부모를 찾기 시작했다. 그레그 페어차일드와 티어니 페어차일드를 만났다. 만남 일주일 전, 페어차일드 부부는 산전 검사에서 기형아 판정을 받았다.

출산을 결심한 부부는 아이 이름을 ‘나이아’(Naia)로 지었다. 요정(nymph)이라는 뜻의 라틴어였다. 요정처럼 작은 나이아는 다운증후군과 심장 기형을 갖고 태어났다. 출생 직후, 두 차례 심장 수술을 받았다. 그 아이가 태어나 돌이 될 때까지 1년4개월 동안, 추코프 기자는 고통과 투쟁을 보고 듣고 기록했다.

그리고 1999년 12월, 6회에 걸쳐 기사를 연재했다. 에 게재된 기사 제목은 ‘나이아를 선택하다’(Choosing Naia). 기사는 ‘내러티브 탐사보도’의 전형으로 평가받으며 언론계에 파란을 일으켰다. 추코프 기자는 추가 취재를 더해 같은 제목의 단행본도 발간했다.

에 추코프 기자가 있다면, 에는 이문영 기자가 있다. 서울 동자동 쪽방촌에서 죽어가는, 밀려나는, 고통스럽게 투쟁하는 사람들을 이 기자는 1년 동안 추적하기로 했다. 편집장이 알기로는, 한국 기자 가운데 그 정도의 시간을 들여 하나의 이슈를 탐색하는 이는 없었다.

어차피 기사는 공간에 있지 않고 시간에 있다. 시간으로 공간의 제약을 극복하는 것이 기사다. 1시간 취재보다 하루 취재가, 일주일 취재보다 한 달 취재가 우월하다. ‘가난의 경로’는 앞으로 1년 동안 보고 듣고 기록하는 기사가 될 것이다. 다큐멘터리도 함께 준비하고 있다.

선택이 가닿는 곳은 행복도 불행도 아니다. 삶이 선택의 갈림길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은 촘촘한 쓸쓸함에 삶이 포박당해 있다는 뜻이다. 기적처럼 빛나는 순간을 꿈꾸며 선택해도, 선택하지 않은 다른 것을 무시로 그리워하면서, 우리는 모래 같은 삶을 더 잘게 바수어 그저 살아간다. 오직 가치 있는 것은 선택들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일이다.

페어차일드 부부는 다운증후군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일을 선택했고, 추코프 기자는 그들을 오랫동안 기록하는 일을 선택했다. 그리고 우리는 사상 최장의 탐사보도를 선택했다. 그 때문에 놓쳐버리는 것이 있다 해도, 쓸쓸한 길이라 해도 그저 나아갈 뿐이다. 1년 뒤 그대와 나는 어떻게 변해 있을까. 어쩌면 혹시 기적처럼 빛나게 될까.

추신: 세월호 통권 기획을 2주 연속 도맡은 정은주 기자가 탈진하여 지난 주말, 병원 응급실에 갔다. 원기 회복 중이다. 잠시 쉬었다가 또 다른 특종으로 세월호 사건의 진상을 계속 규명하겠다. 알다시피 우리는 세월호 진상 규명을 위한 전력투구를 선택한 바 있다.안수찬 편집장 an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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