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유혹

등록 2015-03-31 06:08 수정 2020-05-02 19:27

팀블로그 편집장 ‘불량푸우’가 맨 먼저 왔다. 제 시간을 헐어 팀블로그를 운영하는 ‘불량푸우’는 기성 언론의 기자처럼 보이지 않았다. 1인 미디어 의 ‘삼류기자’는 인사 나누기 무섭게 캠코더를 꺼내 촬영했다. 캠코더는 그의 신체 일부처럼 보였다.

요즘 잘나가는 디지털 미디어 편집장 ‘민노씨’는 두건, 수염, 귀걸이, 목걸이를 장착하고 나타났다. 대작이 만만치 않을 듯하여 긴장했으나, 알고 보니 술 한잔도 못 마시는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시장 족발집 앞에서 편집위원 ‘뗏목지기’를 만났고, 편집장 ‘다람쥐주인’은 소주 두 순배가 돌고 난 뒤 도착했다. 정치시사 전문 전업 블로거가 되려고 제주도에 틀어박힌 ‘아이엠피터’는 가장 늦게 도착해 가장 많은 환대를 받았다.

이들의 이름과 매체가 외계의 언어로 들린다 해도 괜찮다. 당신은 좋은 뉴스 콘텐츠에 돈을 지불하여 의 인쇄·제본판으로 이 글을 읽고 있을 가능성이 높은, 올드미디어 소비자다. 은 그런 당신을 격정적으로 사랑한다. 저 이름들이 눈에 익다면, 당신은 인터넷이나 모바일로 이 글을 읽고 있을 가능성이 높은, 평소에도 페이스북·트위터·블로그 등에서 뉴스를 찾아 읽는, 뉴미디어 소비자다. 은 그런 당신을 어떻게 유혹해볼까 궁리 중이다.

낯설고도 익숙한 디지털 미디어 고수들과의 자리는 유쾌했다. 족발 안주는 그대로인데 소주병은 자꾸 동이 났다. 옮겨간 어묵집에서 ‘불량푸우’의 아내가 준비한 애플파이를 먹었다. 곁들여 마신 사케는 달콤한 설탕물 같았다. 세상을 보는 그들의 습성을 나는 배우고 싶었다. 그들은 나의 (낡아버린) 날개를 궁금해했다. 우리는 쉼없이 떠들었다.

페이스북으로만 교류했던 ‘뗏목지기’는 알고 보니 고향 후배였다. 테이블에 올라 내가 춤추었던 몇 년 전 어느 술자리를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디지털 미디어 고수들은 ‘뗏목지기’를 일제히 비난했다. “우씨, 그걸 촬영했어야지! 페이스북에 올릴 수 있었는데!”

그들의 겨드랑이에선 창의, 야성, 도전의 향기가 났다. 그 좋은 것도 고이면 독이 된다. 그들의 눈매에 어린 독기를 나는 보았다. 한 방울 독의 힘으로 버티고 있는 그들을 보았다. 뉴미디어가 실존을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다. 뉴미디어 시대가 왔다지만, 돈을 버는 것은 다음·네이버 등 포털 업체뿐이다. 돈이 없으면 기사를 쓸 수가 없다. 그들은 나와 매우 달랐지만, 또한 매우 비슷했다.

고통은 정의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한다. 왜 그는 괜찮고 나는 힘든가. 왜 포털은 군림하고 언론사는 휘청거리는가. 그것은 정의가 아니므로, 진실·독립·자유를 지향하는 기자들은 고통스럽다. 왜 쓰레기 기사에 독자가 몰리고, 좋은 기사는 외면받는가. 왜 오락물은 돈을 벌고 저널리즘은 망해가는 것이며, 무엇보다 왜 우리는 무너지는 저널리즘을 포기하지 못하는가. 왜.

어떤 상실은 일생을 규정한다. 단순한 세상을 그렸던 언론의 과거는 복구되지 않는다. 기자와 독자는 지금 다른 시간을 살고 있다. 기자는 더 이상 예전처럼 살아갈 수 없다. 좋은 기자들이 흘린 땀방울에 동전 한 닢 던져주지 않는 세상의 바닥에 엎드려, 저널리즘의 파열음을 듣는다. 이걸 막을 수 있을까.

그 붕괴를 막으려는 우리의 시도를 한 달여 뒤 인터넷과 모바일을 통해 선보이려 한다. 다만 뉴미디어는 조건일 뿐 지향이 아니다. 원칙과 중심은 따로 있다. 사회적 가치를 품은 기사의 상품 가치를 인정하여 기꺼이 주머니를 여는 독자들을, 비록 소수라 할지라도, 가장 귀하게 모실 것이다. 그것이 뉴미디어로 향해 가는 우리의 이념이다. 그 이념의 이름은 지속 가능한 저널리즘이다.

안수찬 편집장 ahn@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