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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에 걸맞은 큰 정부가 ‘노멀’이 되려면

등록 2021-01-25 13:41 수정 2021-01-27 01:38
2020년 1월1일(위)과 12월31일의 뉴욕. 로이터

2020년 1월1일(위)과 12월31일의 뉴욕. 로이터

‘뉴’에 걸맞은 큰 정부가 ‘노멀’이 되려면

코로나19가 국내 상륙한 지 1년 됐다. 1년 전 이때는 ‘메르스 사태 재현’을 걱정했다. 해를 넘겨도 팬데믹(감염병 대유행)이 끝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다른 나라에선 백신 접종이 시작됐지만 올해 마지막 날에도 다들 마스크는 쓰고 있어야 할 것 같다.

온갖 ‘뉴노멀’(새 표준) 담론이 쏟아진 때는 2020년 봄쯤이다. 코로나19가 가더라도 코로나20, 21, 22가 또 올 수 있기에 지금 같은 삶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게 요지였다. 다들 뉴노멀 담론에 심취했지만 한편으론 ‘설마…’ 했다. 그러나 여기까지 왔으면 이제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받아들일 때다.

작은 정부가 아닌 큰 정부가 필요하고 재정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견해는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뉴노멀이다. 우리도 ‘머리’로는 이 사실을 받아들였다. 보수정권에서 ‘동반성장’이나 ‘기업소득환류세제’ 같은 어울리지 않는 시도를 한 이유다. 하지만 ‘가슴’은 여전히 과거에 매여 있다. ‘소득주도성장’을 내건 문재인 정부가 ‘촛불시위’로 집권한 게 우리 사회가 뉴노멀을 내면화하는 계기가 되리라 기대한 일도 있었으나 역부족이다.

그런 차원에서 재난지원금은 코로나19라는 실제적 위협이 우리가 미뤄온 과제를 ‘벼락치기’ 하지 않을 수 없게 한 결과로 봐야 한다. 그러나 이것도 ‘뉴’이긴 하지만 ‘노멀’은 아직 아니다. 언론은 또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신경전을 선별과 보편의 충돌로 중계하는데, 매번 같은 일이 반복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누가 어떤 피해를 보았는지, 얼마나 지원이 필요한지를 신속하게 산출해 지원 대상을 선별하는 시스템이 없는 것이 문제다. 비상 상황(뉴!)에 걸맞은 큰 정부가 ‘노멀’이 되려면 이걸 해결해야 하는데 지지부진이다.

이런 얘기보다는, 비대면 시대가 가져올 변화에서 새 성장동력을 찾는 것에 더 관심을 가지는 이들도 있다. 인공지능을 활용한 수요 예측과 플랫폼노동자 활용을 통한 인건비 절약으로 추가 이윤 창출이 가능하다는 거다. 그러나 여기엔 불안정 노동의 극적인 증가를 용인해야 한다는 주장이 전제됐다. 그러니 4차 산업혁명을 추진하더라도 보편적 고용안정을 위한 제도 보완과 이를 뒷받침하는 증세를 모색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논의는 언제나 뒷전이다. ‘뉴노멀’도 모두에게 평등하진 않다.

그냥 ‘노멀’로 돌아가는 듯한 분위기도 있다. “미국이 돌아왔다”는 슬로건을 내세운 조 바이든 대통령 취임은 도널드 트럼프 정권이라는 ‘애브노멀’(비정상) 퇴출로 보인다. 그러나 바이든 시대야말로 ‘뉴노멀’의 본격적인 시작일 것이다. ‘백신 민족주의’에서 우리는 이미 그 전조를 봤다. 남을 적대할 때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실제 필요한 것은 힘으로 취하는 시대다.

우리 대응의 평가에도 이중적 의미가 실릴 수밖에 없다. 우리가 방역의 모범이 될 때는 협력과 연대의 필요성을 말하지만, 백신을 확보할 때는 각자도생에서 우위를 점하는 게 우선이라는 시각이다. 손해 보더라도 연대와 협력을 구하느냐, 각자도생의 승리에 매달리느냐라는 양쪽 가치관의 충돌이 거시와 미시 모든 영역에서 일어나고 있다. 무게추가 어느 쪽에 실리느냐에 따라 우리가 맞이할 뉴노멀의 성격도 달라질 것이다. 코로나19 1년의 결론이다.

김민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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