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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품격] 박지원, ‘무대 밖 센터’가 되시길

국정원장 돼 촌철살인 메시지도 이제 끝
등록 2020-08-08 05:13 수정 2020-08-09 11:35
한겨레 강창광 선임기자

한겨레 강창광 선임기자

대통령의 통치는 ‘인사가 팔할’이다. 누굴 언제 어디에 쓰는지가 철학과 정책의 가늠자다. 박지원 국가정보원장(사진)이 내정됐을 때 즉각 떠오른 감정은 통쾌함이었다. 그가 더불어민주당 소속이 아니고 나이가 많은 편이며 한때 “문모닝~”이라 불릴 만큼 대통령 욕으로 하루를 시작하던 이라서만은 아니다. 평양 연락사무소 초대 소장 시켜달라고 방송에서 대놓고 졸라댈 정도로 남북관계에 ‘간절함’이 있는 사람이라서 그렇다. 안 시켜주면 경비나 청소 업무라도 지원할 기세였다.

2018년 남북 정상회담을 마치고 판문점에서 열린 야외공연장에서 한껏 고무된 채 앉아 있던 그의 표정은 막냇삼촌뻘인 북쪽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울먹이던 표정과 함께 모두에게 깊은 소회를 불러일으켰다. 지난 세월과 관계와 현실에 대한 환상적인 자각 타임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뒤 펼쳐진 일은 그야말로 ‘환장할’ 지경이다. 온 민족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놀아나고도 찍소리 못하고, 떼쓰고 악쓰는 북한을 달래지도 혼내지도 못했다. 이런 타임에 박지원 국정원장이라니. 이 ‘생광스러운’ 기분은 우리 민족끼리만 알기로 하자.

그에겐 남북관계 물꼬를 트는 일도 해야 하지만 국정원을 틀어쥐고 개혁할 책임도 주어졌다. 국정원의 국내 정치 개입은 법으로 막아놨으나 시스템과 관행으로 안착한 상태는 아니다. 당장 이번 국정원장 인사청문회에서 주호영 미래통합당 원내대표가 흔들어댄 문서를 보자.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을 추진하며 북한에 30억달러를 주겠다고 비밀리에 이면합의를 한 뒤 당시 박지원 특사가 서명한 문서라고 했다. 원본을 내놓으라 하자 ‘없다’, 제보자를 밝히라 하자 ‘밝힐 수 없다’, 청와대까지 나서 사실이 아니라고 확인하자 ‘그럼 다행이다’, 바로 꼬리 내리고 말았다. 이런 무책임함 뒤에 과거의 음습한 ‘장난질’이 겹쳐오는 건 억지일까.

국정원은 때만 되면 사고를 쳐왔다. 없는 간첩 만들고 ‘총풍’을 일으키고 댓글 공작을 했다. 안팎으로 정치 모리배가 설쳤다. 역대 권력자들은 욕심껏 국정원을 활용하다가 결국 쥐어잡히고 끌려다녔다. 무소불위의 힘을 빼고 권력을 철저히 분산시키는 수밖에 없다. 대공 수사 업무를 경찰로 넘기고 예산과 직무 범위에 대한 관리·감독과 통제를 확실히 하는 방안이 마련되고 있다. 전임 서훈 원장이 변호사 수십 명을 고용해 혹시 모를 송사까지 대비하며 개혁 작업을 벌였으나 마무리하지 못했다. 국정원 개혁안이 지난 국회에서 처리되지 않은 건 내부 반발도 만만치 않았으나 무엇보다 절박함이 크지 않았던 탓이라고 본다. 이번에는 당·정·청이 뜻을 모았다. 그의 역할이 막중하다.

그는 정보가 곧 권력임을 잘 안다. 그가 국회에서 초록 수첩을 꺼내 펼치면 분명 ‘한 건’이 나왔다. 정보를 적절히 다룰 줄도 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직후 이명박 정부가 국장과 서울현충원 안장에 머뭇댈 때 사정없이 밀어붙인 뒤 훗날 그 과정을 군더더기 없이 밝히는 글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리고는 이명박 정부가 협조해줬다며 감사하다는 의견을 덧붙였다. 당시 정권이 국장 추진을 마지못해 한 기색이 역력했고, 상제였던 김홍걸 의원도 볼멘소리를 냈으나 그가 논란을 정리해버렸다. 감사하다는데 어쩌겠는가. 계속 감사하도록 해야지.

그는 정보의 위험도 누구보다 잘 안다. 국정원을 얼마나 틀어쥘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쥐여지내지는 않을 것은 분명하다.

첫 출근길 손주와 손잡은 사진 한 장, 비가 와서 아내 묘소는 못 가고 교회 간다고 올린 첫 주말 SNS 글 한 줄이 ‘정치인 박지원’의 마지막 모습 아닐까 싶다. 일하는 동안에도 마친 뒤에도 오랫동안 말을 아낄 수밖에 없는 자리이니, 그의 탁월한 해석과 촌철살인 메시지도 이제 끝이다.

가수 비의 오랜 팬이 쓴 ‘시무 20조’에 영감을 얻어 ‘시무 2조’만 전하련다. 1. 화려한 조명 그만 2. SNS 멀리하기.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아도 ‘무대 밖 센터’는 박지원임을 믿는다.

김소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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