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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품격] 원희룡 최대의 적은 원희룡

성급한 원희룡이 성실한 원희룡을 이겨먹지 않기를
등록 2020-07-04 05:50 수정 2020-07-06 01:16
연합뉴스

연합뉴스

몸을 쓰는 생업이 있는지라 뉴스는 주로 귀로 접한다. 듣다보면 정치인들이 쓰는 특정한 ‘말본새’가 있다. 그중 정말 별로인 건 ①피하기와 ②우기기다.

피하기를 보자. 동문서답하거나 뭉개는 것인데, 답답하고 무책임하다. 겸손하기라도 하면 또 모르겠는데 “내가 전에 이렇게 말한 바 있다”며 질문을 지르밟는 이들은 듣는 처지에서 참 거시기하다. 자기 말이 진리도 아니고 본인이 무오류의 존재도 아닌데 내가 이미 정답을 말해줬다는 식의 거만한 어법이라니. 나경원, 안철수 전 의원에게서 종종 들을 수 있었다.

우기기도 자주 들린다. 우기기 말투라면, 입안에 밥 넣고 말하는 것 같던 “큰일 났네, 그럼 다 죽어”의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가 떠오른다. 누구를 설득해본 적도 없고 설득할 자세도 안 된 삶의 이력이 묻어나는 어법이다. 판사 출신 이수진 의원의 말투에서 최씨가 환기돼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사실 우기기 최고봉은 아침 방송에 단골 출연하던 시절의 ‘엄앵란 여사’다. “여자는 아들을 낳아야 대접받는다”는 경악할 주장을 아침부터 너무나도 강력하게 하여 전 국민의 어안을 벙벙하게 만들던 그 말투 말이다.

나름 ‘민감한 귀’를 가진 청취자이자 유권자로서 최근 몇 년간 두 도지사의 말에 위안을 얻었다. 최문순 강원도지사와 원희룡 제주도지사가 그랬다. 어떤 질문도 피하지 않고 잔머리도 굴리지 않고 성실하게 답하는 말투가, 배도 채워주고 영양도 공급해주는 구황작물이 떠올랐다. 감자 같고 무 같다고나 할까. 먹고사는 문제에 매진해 도민에게 대체로 좋은 평을 듣고 (젊은 비서들의 센스까지 더해져) 전국적으로도 소통이 잘된 덕에 더 그렇게 느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요새 원희룡 지사가 달라졌다. 말에 자꾸 힘이 들어간다. 빈도나 강도에서 한창 시절의 엄 여사가 떠오를 정도다.

일단, 말이 너무 많다. 현안마다 의견을 내는데 채 익지 않은 말도 쏟아낸다. 인천국제공항 보안검색 인력 정규직화에 대해 ‘대통령 찬스’에 따른 특혜라고, ‘보여주는 척’이라고 매도했다. 그는 적어도 이 문제에 관한 한 정부의 가이드라인과 절차를 누구보다 잘 알고 실천한 사람이다. 초선 도지사 시절인 2017년 말, 제주도는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에 전국 지자체 가운데 가장 앞장서서 당시 정부 권고보다 훨씬 많은 분야, 많은 종사자를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방침을 밝혔다. 이번 정규직화가 ‘쇼’라면 그간 제주도의 ‘실적’은 뭐로 설명할 수 있을까. 논란의 배경이나 맥락은 건너뛰고 일방의 분노에 올라타 채찍질까지 더한 태도다. 도지사는 없고 대권 주자 원희룡의 조급함만 보인다.

연일 정권 공격에 열을 올린다. 민주주의 파괴자, 독재의 망령, 586 기득권 등 낡은 표현을 동원해 목소리를 높인다. 누가 봐도 당내 세력을 겨냥한 ‘인정투쟁’이다. 혼자 너무 일찍 대권 레이스에 뛰어든 건 아닐까. 방송 스튜디오든 블로그든 그에겐 온통 ‘나 홀로 유세장’이다. 심심하고 개운하던 말투는 어디 가고 맵고 아리고 자극적인 말투로 범벅인 격문을 읊는다.

욕심부리다 스텝이 꼬였던 일을 잊었나. 2007년 대권 꿈을 꾸던 ‘소장파’ 원희룡은 새해 벽두 난데없이 전두환에게 세배하러 갔다가 이틀 뒤 사과 기자회견을 해야 했다. 2010년에는 당시 한나라당 당론과 달리 친환경 의무급식을 주장했는데,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서 패하자 특별한 설명 없이 무상급식 반대 여론을 모아야 한다고 하여 ‘소신’도 ‘입지’도 잃었다. 2011년에는 당권을 바라보고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으나 과감하다기보다 무모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뜻대로 되지 않아 이듬해 국회의원 배지를 떼야 했다.

그는 스스로를 ‘보수의 대표 상품’이라 칭한다. 민주당에는 져본 적 없다며, 비주류 원희룡은 그만 잊어달라고도 한다. 원희룡 최대의 적은 원희룡 자신인 것 같다. 성급한 원희룡이 원래의 원희룡을 이겨먹는 게 안타깝다.

김소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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