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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임 사태, 정권 연루 게이트 비화하나

‘서민다중피해’ 사건… 윤석열, 수사경과 대면보고 받아
등록 2020-03-28 04:45 수정 2020-05-02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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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이 레임덕에 빠지면 어김없이 ‘검찰발 게이트’가 등장한다. 정권의 힘이 약해지면서 검찰 캐비닛에 쌓인 파일이 하나둘 개봉되기 때문이다. 정권의 긴장 이완으로 생긴 틈을 파고든 게이트는 검찰의 좋은 먹잇감이다. ‘검찰이 수사에 나섰다’는 소식만으로도 정권에 상당한 타격을 준다. 정권 교체를 노리는 야당의 정치 공세와 맞물리면서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낸다.

1조6천억원 피해자 상당수가 서민

검찰이 최근 속도를 내는 ‘라임펀드 사태’는 게이트가 될 모양새를 두루 갖췄다. 금융시장의 허점을 악용한 기업사냥꾼, 한탕주의로 무장한 증권업자, 권력 핵심부인 청와대에서 금융시장 업무를 맡은 금융감독원 팀장, 그리고 여권 핵심 인사 연루설 등 게이트를 구성하는 요건을 빠짐없이 갖췄다. 하지만 라임 사태는 과거 게이트들보다 더 악질적이다. 4천여 명에 이르는 무고한 피해자가 있기 때문이다. 이들 중 상당수는 평소 ‘펀드’라는 말에 익숙하지 않은 서민 이다.

6조원대 자금을 굴리던 국내 최대 사모펀드 운용사인 라임자산운용이 투자자들에게 돈을 돌려주지 못한 것은 지난해 10월부터였다. “가입 6개월 후부터 무조건 되찾을 수 있다”는 말을 믿고 가입한 투자자에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평균 연 8% 이상 수익률’ 조건은 종잣돈이 필요한 서민들이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었다. 펀드의 확정금리를 보장하는 것은 불법이었지만 이를 잘 모르는 서민들은 평소 거래하던 은행과 증권사 직원들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하지만 펀드 운용사가 우량 펀드의 돈을 빼서 부실한 펀드에 재투자하는 ‘돌려막기’ 수법으로 수익률을 유지해온 사실은 알 리 없었다.

펀드 환매 중단으로 발생한 1조6천억원의 피해액 중에는 임대보증금과 노후를 위한 퇴직금, 자녀의 대입 또는 유학 자금 등 서민들의 소중한 종잣돈이 포함돼 있다. 은행에 정기예금으로 맡겨놓은 임대보증금을 찾으러 갔다가 “6개월 뒤 무조건 상환된다”는 은행원 말만 믿고 투자한 워킹맘, “노후에 자식에게 손 벌리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남편의 퇴직금을 투자한 전업주부, 사업 확장을 위해 최소 가입액 1억원을 긁어모은 자영업자 등은 이 돈을 떼이게 되면 당장 생계가 막막해지고 미래를 잃게 된다.

수사팀 보강하며 속도 내는 검찰

그러나 펀드를 판매한 은행과 증권사는 펀드 운용사인 라임자산운용에 책임을 떠넘기기에 바빴다. 펀드 판매비 명목으로 수수료(펀드 가입액의 1% 수준)를 미리 떼어 수백억원을 챙겼음에도 책임을 회피했다. 금융사기에 속수무책인 서민들을 보호해야 할 금융 당국은 침묵을 지켰다. 오히려 청와대로 파견 나간 금감원 팀장은 핵심 피의자들과 깊숙이 연관됐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피해자들은 공권력이 나서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언론에는 피해자들의 억울한 사연이 소개됐다.

‘서민다중피해사건’에 관심이 많다고 홍보해온 윤석열 검찰총장이 이를 놓칠 리 없었다. 검찰(서울남부지검)은 2월19일 서울 여의도 라임자산운용 본사와 신한금융투자(신한금투) 본사 등에 대한 압수수색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수사에 나섰다. 환매 중단 사태가 발생한 지 4개월 만이다. 윤 총장은 서울남부지검장에게서 대면보고를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3월25일 전 신한금투 임원을 긴급체포하는 등 수사에 속도를 내고 있다. 신한금투는 라임자산운용과 자산운용 계약을 맺은 뒤 이 펀드의 부실을 제대로 알리지 않은 채 투자자에게 판매한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이 이 수사와 관련해 주요 피의자를 체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만큼 수사가 물이 오르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법무부도 이날 수사팀에 검사 2명을 추가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검사만 11명이 포진한 대형 수사팀이다.

이 사건의 핵심 인물들이 잠적한 것은 검찰이 넘어야 할 관문이다. 라임펀드를 설계하고 운용까지 주도한 이종필 전 라임 부사장과, 배후에서 ‘전주’ 노릇을 한 김봉현 스타모빌리티 회장은 검찰 수사가 본격화하기 전에 도주했다. 검찰이 파악한 김 회장과 라임 쪽 행태는 전형적인 기업사냥꾼이다. 투자자들이 낸 펀드 투자금으로 회사를 사들인 뒤 회사 내부 자산을 빼돌리거나, 주가조작으로 기업가치를 뻥튀기해 되파는 방식으로 차익을 얻는 것이다.

김 회장은 2018년 경기도의 한 버스회사를 인수한 뒤 회삿돈 160억여원을 빼돌리다 경찰 수사망에 걸려들자 올해 초 잠적했다. 이 전 부사장도 코스닥에 상장된 디스플레이 장비 제조업체에 라임펀드 자금 300억원을 투자한 뒤, 이 회사 경영진과 회삿돈 800억원을 빼돌린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던 중 지난해 11월 자취를 감췄다. 김 회장은 청와대 행정관을 지낸 김아무개 금감원 팀장을 자신의 고향 친구인 이 전 부사장에게 소개해줬다. 라임펀드 관련자는 투자자들이 불안해할 때마다 청와대 행정관 직함이 찍힌 김 팀장의 명함을 보여주며 안심시킨 것으로 전해진다.

청와대 행정관 ‘명함’의 의미

라임 사태가 역대 정권의 임기 후반을 잔인하게 만든 게이트로 비화할지는 아직 모른다. 김 전 청와대 행정관이 단순히 명함만 건넨 게 아니라 그 이상의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 문재인 정부는 라임 사태 이전과 이후로 달라질 것이다. 검찰이 어떤 수사 결과를 내놓을지 벌써 관심이 가는 이유다.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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