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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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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의 꿈 주저하는 기득권

고 노회찬 의원의 마지막 강연, 연동형 비례대표제 역설
등록 2018-09-22 09:02 수정 2020-05-02 19:29
고 노회찬 정의당 의원이 2월6일 국회에서 비교섭단체 대표 발언 중 선거제도 개혁과 개헌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2016년 11월 미국 대통령선거 투표용지를 들어 보이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고 노회찬 정의당 의원이 2월6일 국회에서 비교섭단체 대표 발언 중 선거제도 개혁과 개헌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2016년 11월 미국 대통령선거 투표용지를 들어 보이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제 개인만 생각하면 으리으리한 당에 들어가서 더 많은 기회를 노렸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미래를 내다보면, 여전히 우리나라에 제대로 된 진보정당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이야 진보정당이 작지만 나중에 커지면서 거목 같은 정치인이 나올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저 같은 고참이 개인을 생각해서 편한 길을 찾으면 누가 진보정당을 키우겠습니까. 제가 빠진다고 진보정당이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남은 사람들은 힘들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가 꿈꾼 나라

최근 출간된 (창비)에 실린 고 노회찬 정의당 의원의 목소리다. 책은 지난 2월20일 창비 ‘지혜의 시대’ 특강에서 노 의원이 ‘촛불시대, 정치는 우리 손으로’라는 주제로 한 강연 내용을 담았는데, 저자(노 의원) 교정과 편집 작업 중 노 의원이 세상을 떠나 유가족과 논의 뒤 출간됐다. 그는 당시 강연에서 “의원님은 정치하면서 개인적으로 고초도 많이 겪었다. 그럼에도 정치권에 남아 더 큰 정당으로 가지 않는 이유와 그 원동력이 궁금하다”는 청중의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그가 정치인이 된 뒤 평생의 사명으로 삼은 화두였다. “우리나라에 제대로 된 진보정당이 있어야 한다.”

그는 이를 위해 정당이 얻은 득표율에 비례해 의석수가 결정되는 ‘연동형 비례대표제’ 등의 선거제도 개혁을 끊임없이 부르짖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정의당은 “우리 모두의 삶에 노회찬을 부활시키는 것이야말로, 노회찬의 간절한 꿈에 성큼 다가가는 길”(이정미 정의당 대표)이라며 선거제도 개혁에 온 힘을 쏟겠다고 밝혔다. 여야도 선거제도 개편에 공감을 표했다. 하지만 그가 떠난 뒤 두 달여가 지난 현재 이에 대한 국회 논의는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논의할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는 위원회 구성 결의안이 본회의에서 의결(7월26일)되고 두 달이 다 되도록(9월20일 현재) 첫 회의도 열지 못했다. 자유한국당이 위원회 구성을 문제 삼으며 위원 명단을 제출하지 않기 때문이다.

노 의원의 숙원인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지역구가 아닌 정당 투표를 기준으로 의석수를 배분하자는 것이다. 한 지역구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은 1명을 국회의원으로 선출하는 현행 소선거구제가 거대 양당(더불어민주당·자유한국당)에만 유리하고, 다른 후보에게 던진 유권자의 표는 사표가 되는 현실을 바꾸기 위한 대안으로 주목받는 제도다. 예를 들어 ㄱ정당이 전체 지역구에서 20% 정당 지지표를 얻었다면 60석(의석 300석 기준)이 의석수로 정해진다. 지역구에서 30명이 당선됐다면 나머지 30명을 비례대표로 채우면 된다. 제도가 도입되면 정의당 같은 진보정당의 목소리도 국회에서 커질 수 있고, 거대 양당에 좌우되는 국회에 다당제가 정착될 수 있다. 좀더 다양한 ‘민의’가 ‘대의’될 수 있는 것이다. 노 의원은 책에서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당연하지만 국회는 국민의 대변자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지금 국회의원 의석이 국민의 의사와 동일한 비율로 각 정당에 나뉘어 있습니까? 정의당을 예로 들면, 지난 총선(20대)에서 정의당의 정당 지지율은 약 7.2%였습니다. 우리나라 국회의원 총 의석수 300석 중 7.2%는 21석입니다. 하지만 정의당이 지난 총선에서 실제로 획득한 것은 6석, 300석 중 2%에 불과했습니다. (중략) 국민의 의사가 반영된다고 할 수 없습니다. 많은 이들이 이러한 선거제도가 문제라고 지적하곤 하지요.”

계산기 두드리는 여야

문제는 각 정당이 선거제도 개편에 원론적으론 찬성하면서도 구체적인 논의에 들어가면 유불리를 따지며 논의를 번번이 무산시켰다는 것이다. 2015년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지역주의 완화와 유권자 의사를 충실히 반영하는 선거제도 개선’ 등을 내용으로 정치관계법 개정 의견을 국회에 제출했지만, 과반 의석 붕괴 등을 우려한 새누리당(자유한국당)의 반대로 관련 논의는 흐지부지됐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면 기존 거대 정당의 의석수가 줄어들 수 있다는 시뮬레이션 결과가 나오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여야는 계산기를 두드리는 모양새다.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선거제도 개편에 긍정적 태도를 보이고, 노 의원의 빈소에서 “정개특위 위원장을 정의당(심상정 의원)으로 하겠다는 합의는 꼭 지키겠다”고 말했지만 이를 안 지키고 있다. 오히려 애초 원내교섭단체(20석) 기준으로 정개특위 위원 구성을 여야 동수로 합의했는데, 노 의원이 떠난 뒤 ‘평화와 정의의 모임’ 소속 의원 수가 19명으로 줄어 교섭단체 자격을 잃었으니 정의당을 정개특위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애초 위원 구성을 더불어민주당 9명·자유한국당 6명·바른미래당 2명·정의당 1명으로 합의했지만, 민주당 9명·자유한국당 7명·바른미래당 2명으로 바꿔 여당 9명, 보수야당 9명으로 맞춰야 한다는 논리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당론으로 채택하는 민주당도 현행 선거제도를 유지하면 다음 총선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크다보니 선거제도 개편에 소극적이다.

선거제도 개편 이제 시작해야

2020년 총선 제도를 바꾸려면, 2018년 하반기에는 연동형 비례대표제 등 제도 개편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올해 하반기를 넘기면 이번에도 선거제도 개편은 흐지부지될 가능성이 높다. 노 의원은 이제 유작이 된 책에서 선거제도가 바뀐 ‘새로운 세상’을 꿈꿨다.

“진정한 의미로 진보와 보수가 공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정의당 소속이지만 정치에 진보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진보만 있는 게 그저 좋다고 볼 수도 없지요. 합리적인 진보와 건강한 보수가 경쟁하고 싸우기도 하면서 공존해야 정치가 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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