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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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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치고 투표나 하라고?

선거 기간 정치적 의사표현 선거운동으로 낙인찍는 현행 선거법…

포괄금지서 일부 선거운동만 제한하는 내용으로 법 개정 시급
등록 2018-04-17 05:13 수정 2020-05-02 19:28
참여연대가 2017년 4월 대선을 앞두고 ‘촛불’이라는 단어를 현수막에 쓰지 못하게 제재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항의하기 위해 서울 종로구 통인동 사무실 앞에 게시한 현수막. 참여연대 제공

참여연대가 2017년 4월 대선을 앞두고 ‘촛불’이라는 단어를 현수막에 쓰지 못하게 제재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항의하기 위해 서울 종로구 통인동 사무실 앞에 게시한 현수막. 참여연대 제공

깜짝 퀴즈. 다음 중 공직선거법(이하 선거법) 위반에 해당하는 것은?

① 현수막: “촛불이 만든 대선, 투표합시다” 문구가 적힌 투표 독려 펼침막을 게시한다.

② 페이스북: 교사가 페이스북에 ‘새누리당이 압승하면 진보 교육감의 싹이 잘린다’는 내용의 글을 올린다.

③ 인쇄물: 대선 후보의 청소년인권 공약을 비교한 글을 종이에 인쇄해 시민들에게 나눠준다.

④ 광고: 정치인의 친척이 연루된 개발사업에 ‘엄정 수사를 촉구한다’는 내용의 광고를 지역신문에 싣는다.

⑤ 포스터: 사드(THAAD) 유치에 찬성한 주요 정치인의 사진을 담은 포스터를 서울 광화문광장에 붙인다.

SNS ‘좋아요’나 공유하기로도 기소

정답은 ‘모두 다’이다. 정말일까? 믿기 힘들겠지만, 그렇다. 선거법 위반으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와 경찰로부터 제재당하거나 기소까지 이뤄진 사례들이다. 시민들의 일상적인 정치적 의사표현은 선거 기간만 되면 때때로 ‘불법 선거운동’으로 낙인찍혀 처벌 대상이 된다. 유권자의 자유로운 정치적 의사표현을 가로막는 현행 선거법의 여러 ‘독소조항’들 때문이다.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는 4월16일 현행 선거법의 과도한 규제 조항으로 2010년 이후 유권자가 실제 피해를 당한 사례 33건을 유형별로 분석한 ‘온통 하지마’ 선거법 유권자 피해 사례 보고서(이하 보고서)를 발표했다. 은 6·13 지방선거를 앞두고 이 보고서를 미리 입수해 분석해봤다.

현행 선거법의 가장 큰 문제는, 선거 기간에 이뤄지는 대부분의 정치적 의사표현을 ‘선거운동’으로 낙인찍을 수 있다는 점이다. 현행법이 선거운동을 “(특정 후보자가) 당선되거나 되게 하거나 되지 못하게 하기 위한 행위”(제58조)라는 식으로 지나치게 포괄적으로 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선거가 이뤄지는 날부터 180일 이전에 이뤄지는 선거운동에 법상 여러 까다로운 제약이 부과된다. 즉, 선거를 앞둔 시점에선 특정인의 당선이나 낙선에 영향을 끼치는 시민들의 정치적 의사표현이 선거운동으로 분류될 수 있으며, 그럴 경우 애먼 시민들이 선거법 위반 사범으로 처벌될 가능성이 높아지는 셈이다.

참여연대는 보고서에서 실제 유권자들이 피해를 당한 총 33개 사건을 △투표 독려 행위(4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후보에 대한 단순한 의견 개진(4건) △주요 이슈에 대한 후보의 입장 질의·공약 비교 평가(8건) △후보에 대한 풍자·의혹 제기(5건) △후보와 정책에 대한 찬반 의견, 낙천·낙선 운동(12건) 등 5가지로 분류했다. 보고서가 제시한 5가지 선거법 위반 사례를 하나씩 살펴보며, 현행 선거법의 문제를 짚어보자.

가장 황당한 사례는, SNS를 통한 시민의 자유로운 의사표현을 선거운동으로 분류해 단속한 것이다. 심지어 다른 사람의 SNS 게시글에 ‘좋아요’를 누르거나 공유했다는 이유로 검찰에 기소된 이도 있다. 국립 초등학교 교사 박동국씨는 20대 총선을 이틀 앞둔 2016년 4월11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새누리당의 총선 공약에 교육감 직선제 폐지가 있는 거 알고 계시나요? 국회선진화법도 고쳐 다수결로 밀어붙이겠다고 합니다. 20대 총선의 결과가 새누리당의 압승으로 끝나고 나면 다수의 힘으로 밀어붙여 진보교육감의 싹을 자르고 혁신학교, 혁신교육지구, 전교조 죽이기 등이 본격화할 것입니다. 야권 분열로 국가의 미래가 절단 나게 생겼습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교육감 직선제와 국회선진화법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밝히고, 이를 특정 정당의 공약과 연결한 글이었다.

검찰은 이 글이 ‘선거법상 선거운동’이기에 공무원 신분의 박씨가 이런 글을 올린 것은 선거법 위반(‘공무원은 선거운동을 할 수 없다’는 법 제60조 위반)이라며 기소했다. 이후 서울북부지방법원은 2016년 12월23일 검찰의 기소 내용을 받아들여 벌금 50만원을 선고했다.

“평소 행동 선거 180일 이내면 위법”

현재 항소심을 진행 중인 박씨는 자신이 올린 의견 표명 글이 ‘선거운동에 해당한다’는 1심 판결에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후 박씨는 SNS에 정치 관련 글 쓰기를 포기하고 있다. 그는 “항소심에서도 유죄판결이 나오면 전국 공무원들은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외부로 드러내길 꺼릴 것이다. 이는 한국의 정치 발전에 도움이 안 되는 일”이라고 말했다.

선거운동 기간에 유권자의 입을 틀어막는 데 가장 큰 구실을 하는 선거법 조항은 제90조(시설물 설치 등의 금지)와 제93조(탈법 방법에 의한 문서·도화의 배부·게시 등 금지) 등이다. 이 조항은 선거일 180일 전부터 “선거에 영향을 미치게 하기 위하여” 정당의 명칭이나 후보자의 성명·사진 등을 화환·풍선·간판·현수막·표찰 등에 게시하지 못하게 하거나(제90조), 광고·벽보·사진·문서·인쇄물·녹화테이프 등으로 만들어 배포할 수 없게 하는(제93조) 조항이다. 그러나 이렇게 꼼꼼한 조항들로 인해 시민들의 자유로운 의사표현이 가로막힌다.

제19대 대선을 한 달 앞둔 2017년 4월15일. 청소년인권 운동모임인 ‘인권친화적 학교+너머 운동본부’(이하 운동본부) 활동가들이 광화문광장에 모여 ‘청소년인권 시험 치른 대선 후보들’이라는 제목의 유인물을 배포하려 했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은 선관위에 제지당했다. 유인물에 운동본부가 각 대선캠프에 교육과 청소년인권에 대해 질문을 던진 뒤 돌아온 답을 비교하는 내용이 담겼기 때문이다.

선거의 자유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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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행 선거법 제93조는 선거운동 기간에 후보자나 선거운동원 등이 아닌 이들이 특정 정당과 후보자를 지지 또는 반대하는 인쇄물을 배포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운동본부 유인물에 특정 후보를 직접적으로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내용은 없었지만, 이들의 활동 자체가 ‘선거에 영향을 미치려는 행위’로 간주됐다. 그 결과 애써 준비한 유인물을 한 장도 뿌리지 못한 채 모두 폐기할 수밖에 없었다. 배경내 전 운동본부 공동집행위원장은 당시를 회상하며 “인쇄물 배포 금지는 유권자의 정보 접근권을 심각하게 제한하는 행위”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서복경 의정감시센터 소장(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은 “유권자가 평소 하던 행동을 선거 전 180일 이내에 하면 선거법 위반이 된다. 선거와 가까운 시기가 될수록 오히려 유권자의 정치적 표현이 제한되고 있다”고 말했다.

투표율을 높이려는 투표 독려 행위도 때로 ‘선거운동’으로 분류돼 감시와 처벌의 대상이 된다. 대전 지역 80여 개 시민·사회단체와 정당으로 구성된 ‘국민주권실현 적폐청산 대전운동본부’는 6·13 지방선거를 앞두고 2017년 4월 투표를 독려하는 펼침막을 걸었다가 선관위에 제지당했다. 펼침막에는 “촛불이 만든 대선, 미래를 위해 꼭 투표합시다” “투표가 촛불입니다. 죽 쒀서 개 주지 맙시다” 등의 문구가 쓰여 있었다. 선거법 제58조의 2는 “특정 정당 또는 후보자를 지지·추천하거나 반대하는 내용을 포함하여 하는 경우” 투표 독려를 금지하고 있다. 선관위는 펼침막 문구 중 ‘촛불’이라는 단어를 특정 정당을 반대하는 내용으로 해석했고, 결국 단체는 펼침막을 모두 철거해야 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보고서가 내세우는 대안은, 할 수 있는 행위와 할 수 없는 행위를 지나치게 꼼꼼히 정해둔 현행법 규정을 단순화해 “선거자금을 규제하는 쪽으로 선거법을 전환하고 일부 (선거운동) 방식만 예외적으로 제한하는 방식으로 바꾸는 것”이다. 이와 함께 선거운동을 지나치게 폭넓고 추상적으로 정의하고 있는 현행법의 정의를 조금 구체화·명료화하면 법의 남용을 상당 부분 막을 수 있다. 보고서는 그와 함께 인쇄물 규제(제93조 1), 인터넷 실명제(제82조 6), 집회·행렬·서명 규제(제103조, 제105조, 제107조), 후보자 비방 규제(제82조의 4, 제110조, 제251조) 등은 아예 폐지해 유권자가 정당이나 후보, 공약에 대해 다양한 표현을 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대안을 내놓고 있다(표 참조).

이런 식으로 선거법의 규제조항을 전면 해체하면, 선거운동이 과열되거나 공정한 선거운동을 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을까. 보고서는 이런 우려에 명확한 태도를 밝히고 있다. 현재처럼 “공정성을 위해 유권자의 선거 자유가 심대하게 제약당하는 것은 유권자를 선거의 주체가 아니라 객체, 구경꾼으로 전락시키는 길”이라며 “선거의 공정성에서 선거의 자유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거듭 제안하기 때문이다.

이런 보고서의 결론은 문재인 정부의 정책 기조와도 일맥상통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3월26일 발의한 헌법 개정안을 보면, 정당과 후보, 정책에 대한 찬반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도록 선거운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국회 내에서도 윤소하 정의당 의원, 유승희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이 선거법의 여러 독소조항을 과감히 삭제한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발의하는 등 현행 선거법의 결함을 수정하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서복경 소장은 “선거법 규제조항의 처음 입법 취지는 후보자들 간의 과도한 경쟁을 제한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현재 평범한 시민들을 범법자로 만들고 있다.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민들 사이의 소통인데 어느새 법이 유권자들의 입을 틀어막고 있다. 유권자들의 알 권리와 표현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변지민 기자 dr@hani.co.kr*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는 선거법 독소조항 피해 사례를 모으고 피해자를 돕기 위해 ‘선거법 피해 신고센터’(goo.gl/4vMhvS)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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