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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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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폐청산의 회오리 바람

대통령 권한으로 할 수 있는 일부터 개혁 드라이브…

야당 협력 필요한 개혁 실행이 관건
등록 2017-05-23 09:37 수정 2020-05-02 19:28
문재인 대통령이 빠르게 과거 정권 적폐 청산 작업에 나서고 있다. 야당에서조차 “굉장히 잘해 무서울 정도”라는 말이 나온다. 5월12일 청와대 여민관 집무실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지시 전자결재를 하기 전 송인배 전 더불어민주당 선거대책위원회 총괄일정 팀장과 대화하는 문재인 대통령.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이 빠르게 과거 정권 적폐 청산 작업에 나서고 있다. 야당에서조차 “굉장히 잘해 무서울 정도”라는 말이 나온다. 5월12일 청와대 여민관 집무실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지시 전자결재를 하기 전 송인배 전 더불어민주당 선거대책위원회 총괄일정 팀장과 대화하는 문재인 대통령. 청와대사진기자단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5월18일 오전,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이 울려퍼졌다.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참석자 1만여 명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맞잡고 노래를 제창했다. 문 대통령을 비롯한 참석자들은 감정이 북받친 듯 눈가를 훔쳤다. 문 대통령이 업무지시 제2호로 내린 ‘ 제창’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9년 만의 일이었다. 문 대통령은 “오늘의 제창으로 불필요한 논란이 끝나기를 희망한다”고 선언했다. 그가 “헬기 사격까지 포함해 발포 진상과 책임을 반드시 밝혀내고, 5·18 정신을 헌법 전문에 담아 개헌을 완료하겠다”고 말하는 순간 곳곳에서 환호와 박수가 터졌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뒤 신속하게 적폐 청산 작업 시동을 걸고 있다. 그는 5월10일 취임 이후 일주일 동안 내린 5개의 업무지시 가운데 3개를 이전 정부에서 행한 ‘비정상’을 ‘정상’으로 되돌리는 데 할애했다. △국정 역사 교과서 폐기 △5·18 기념식에서 제창 △세월호 참사 때 희생된 기간제 교사 2명의 순직 인정 △검찰 ‘돈봉투’ 만찬 사건 감찰 지시가 그것이다. 문 대통령은 박근혜 정부 때 행해진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 재수사도 언급했다.

적폐 청산은 문 대통령의 1호 공약이다. 문 대통령은 공약집 ‘나라를 나라답게’에서 ‘이명박·박근혜 9년 집권 적폐 청산’을 제일 윗머리에 올렸다. 박근혜 정부 탄핵을 이끌어낸 촛불 민심을 반영한 것이다. 문 대통령은 당시 “적폐 청산과 통합이 따로 가는 것이 아니다. 파사현정의 자세로 잘못된 것을 고치고, 화쟁의 정신으로 통합된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적폐 청산 뒤에 비로소 통합이라는 순서를 분명히 한 것이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아집부터 청산

문 대통령은 사회적 합의와 여론이 뒷받침되고 자신의 권한으로 할 수 있는 일부터 빠르게 진행했다. 취임 사흘째인 5월12일 제2호 업무지시에서 “국정 역사 교과서를 폐기하고 제37돌 5·18 기념식에서 을 제창하라”고 했다. 윤영찬 국민소통수석은 “국정 역사 교과서는 구시대적인 획일적 역사 교육과 국민을 분열시키는 편가르기 교육의 상징이다. 이를 폐지하는 것은 더 이상 역사 교육이 정치적 논리에 이용되지 않아야 한다는 대통령의 확고한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시는 모두 문 대통령이 후보 시절부터 약속했던 내용이다. 그는 “국정 역사 교과서는 전 정권의 청산해야 할 적폐”라며 국정화 금지를 적폐 청산 공약의 네 번째 항목으로 담았다. 제창 역시 3월20일 광주 5·18 민주묘지를 찾은 자리에서 “이번 5·18 기념식에는 반드시 이 노래를 기념곡으로 만들자”고 공약한 바 있다.

국정 역사 교과서는 박근혜 정부 시절 대표적인 민심 역주행 정책으로 꼽힌다. 교육부가 2015년 11월 국정화 행정고시를 발표한 이래 끊임없이 논란에 휩싸였다. 내용적인 면에선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의 미화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정통성을 부인했다는 비판이 거세게 일어났다. 형식적인 면에서도 집필자와 기준 등이 공개되지 않은 채 ‘깜깜이’로 진행됐다. 여론조사에서 ‘국정화 반대’가 70%를 훌쩍 넘었음에도 강행을 멈추지 않았다. 세금 44억원을 들여 펴낸 국정 역사 교과서 최종본에서는 오류가 600여 군데나 무더기로 발견됐다. 각종 지원책을 쓰며 모집한 국정교과서 사용 연구학교는 단 한 곳만이 신청했을 정도다. 교육부는 문 대통령의 지시 이후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주도했던 역사교육정상화추진단을 5월 말 해체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제창 역시 이명박·박근혜 정권이 만들어낸 편가르기식 아집의 결과물이었다. 이 곡은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이 정부 기념일로 지정된 1997년부터 2008년까지 참석자들이 제창했다. 그러나 2009년 이명박 정부는 기념식에 참석한 보수 인사들의 반발을 앞세워 돌연 제창 대신 원하는 참석자들만 부르는 합창 방식으로 바꾸었다. 뒤이은 박근혜 정부는 2013년 6월 이 노래를 5·18 공식 기념곡으로 지정하라고 촉구하는 결의안이 국회를 통과했음에도 외면했다. 행사 참석 역시 취임 첫해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문 대통령은 취임 이튿날 제창에 앞서 반대해온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의 사표를 가장 먼저 수리했다. 청와대는 “새 정부의 국정 방향이나 철학과 맞지 않는다”며 사표 수리의 이유를 밝혔다.

청와대 정권인수팀의 한 관계자는 과의 통화에서 “국정 역사 교과서 폐지와 제창 지시는 모두 정상적인 국가 시스템이 작동했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라며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과 파면으로 이어진 국정 공백 기간이 워낙 길었기 때문에 비정상적인 것을 정상화하는 작업을 서둘러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단원고 기간제 교사 순직 인정
문재인 대통령은 5월12일 인천공항을 찾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정규직화를 약속했고(위쪽), 공정거래위원장 후보자에 재벌개혁론자로 알려진 김상조 한성대 교수를 지명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은 5월12일 인천공항을 찾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정규직화를 약속했고(위쪽), 공정거래위원장 후보자에 재벌개혁론자로 알려진 김상조 한성대 교수를 지명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연합뉴스

문 대통령은 박근혜 정부 4년 동안 공기업 분야에서만 22% 증가한 비정규직 차별 시정과 정규직화에도 착수했다. 그는 취임 이틀 뒤인 5월12일 전격적으로 인천국제공항공사를 찾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정규직화를 약속받았다. 이 자리에서 문 대통령은 “임기 중 비정규직 문제를 반드시 해결하겠다. 우선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 시대를 열겠다고 약속한다”고 말했다. 인천국제공항공사는 12년 연속 세계 공항 평가 1위에 올랐지만 전체 직원 가운데 비정규직(6831명)이 84%에 달한다. 문 대통령의 발언 뒤 정일영 인천국제공항공사 사장은 “공항 가족 1만 명 모두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문 대통령은 공약집 ‘나라를 나라답게’에서 “상시·지속적 업무나 생명, 안전 관련 업무는 정규직으로 직접 고용하고, 출산·휴직·결원 등 예외적인 경우에만 비정규직을 사용하도록 하는 ‘사용사유제한 제도’를 도입해 비정규직 규모를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수준(평균 18%)으로 감축하겠다”며 우선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공공부문 상시 일자리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아울러 ‘스승의 날’인 5월15일 문 대통령은 ‘세월호 사고에서 숨진 단원고 기간제 교사를 순직으로 인정하라’는 제4호 업무지시를 내렸다. 윤영찬 국민소통수석은 “두 분의 순직을 인정함으로써 스승에 대한 국가적인 예우를 다하려 한다. 이제 세월호 기간제 교사 순직 인정 논란은 끝내고 유가족을 위로하는 게 마땅하다”고 설명했다. 세월호 참사 당시 숨진 김초원·이지혜 교사는 학생들을 구하려 선실로 내려갔다가 희생됐지만 정교사가 아니라는 이유로 3년 넘게 순직을 인정받지 못한 상태였다. 국가인권위원회도 두 교사를 순직으로 인정하라고 권고했으나 인사혁신처는 “이들이 비정규직 교사이기 때문에 교육공무원이 아니며 그들의 일도 상시적인 공무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해왔다.

윤석열·김상조 등 개혁적 인물 전면에

대표적인 적폐지만 지난한 과제인 검찰 개혁에도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문 대통령은 5월19일 평검사인 윤석열 대전고검 검사를 검찰 내 ‘빅4’로 불리는 서울중앙지검장에 발탁했다. 윤 지검장은 2012년 국가정보원 댓글 수사팀장으로 대선 개입 혐의를 수사하다 정권에 미운털이 박혀 좌천됐다. 이후 박영수 특별검사팀에서 수수팀장으로 활약했다. 이에 앞서 문 대통령은 제5호 업무지시를 통해 박근혜·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을 수사한 검찰 특별수사본부 책임자인 이영렬 서울중앙지검장과 안태근 법무부 검찰국장 사이에 이뤄진 ‘돈봉투’ 만찬 사건에 감찰을 명령했다. 검찰 주변에선 이번 감찰이 검찰 내 인적 쇄신과 함께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 신설, 검경 수사권 조정 등 핵심 개혁과 맞물려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예측이 나온다.

여전히 전모가 다 드러나지 않은 박근혜·최순실 국정 농단과 정윤회 문건 사건, 세월호 진상 조사 방해 의혹 역시 재조사의 물꼬가 터졌다. 문 대통령은 5월11일 청와대 참모진과의 오찬에서 조국 민정수석을 언급하면서 “국정 농단 사건 특검 수사 기간이 연장되지 못한 채 검찰 수사로 넘어가 국민이 걱정한다. 세월호 특조위도 제대로 활동하지 못하고 끝났다”고 말했다. 재조사는 법망을 피해간 우병우 전 민정수석에 초점이 맞춰질 것으로 보인다. 조국 민정수석은 전 청와대 민정수석실 조사 방침을 언급했다. 2014년 말 정윤회 문건 폭로 당시 박근혜 정부의 비선 실세 의혹이 처음 제기됐으나, 청와대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나서 “지라시에나 나오는 그런 이야기들에 나라 전체가 흔들린다는 것은 정말 대한민국이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해 사실상 검찰에 수사 가이드라인을 쳤다. 이후 우병우 민정비서관은 정윤회 문건 사건을 무마한 공로로 민정수석 자리로 승진한 것으로 알려진다.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의 진상 조사와 관련해서도 민정수석실의 개입이나 방해가 있었는지 조사할 것으로 보인다.

문 대통령은 인사에서도 개혁적인 인물을 전면에 내세워 향후 개혁의 기치를 올렸다. 그는 공정거래위원장에 김상조 한성대 교수를 지명했다. 김 교수는 참여연대 재벌개혁감시단장과 경제개혁센터 소장을 역임한 재벌개혁론자로 대선 때 캠프에 합류해 재벌 개혁 관련 공약을 짰다. 앞서 청와대 민정수석실 산하 반부패비서관에는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 수사를 지휘하다 박근혜 정부의 인사 보복 끝에 검찰을 떠난 박형철 전 부장검사를 임명했다.

“무섭도록 잘한다”

문 대통령의 적폐 청산의 첫 단추는 기대 이상이라는 평이다. 야당인 바른정당의 이혜훈 의원조차 출범 일주일에 대해 “솔직히 말해 무섭도록 잘하는 것 같다”고 할 정도다. 유창선 정치평론가는 “지금껏 추진해온 적폐 청산을 보면 국민들의 변화 열망을 반영해 비교적 신속하게 메시지를 내놓은 것 같다. 마치 과거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집권하자마자 추진한 개혁 드라이브를 연상시킨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지금까지는 어떻게 보면 국회를 거치지 않고 대통령의 지시로 할 수 있는 좀 쉬운 것들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관건은 앞으로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 신설을 비롯한 검찰 개혁, 북핵 대응, 경제문제 등을 얼마나 협치 리더십을 발휘해 지속 가능한 개혁을 하느냐다”라고 말했다.

성연철 기자 sych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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