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변하지 않는 것을 변하게 하라

대선 유력 후보들이 배제한 차별금지법 제정·부양의무제 폐지

성소수자 곽이경, 장애인 박경석이 “무례한 불청객”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
등록 2017-03-21 14:02 수정 2020-05-02 19:28
김진수 기자

김진수 기자

사회  대담 주제를 ‘문재인이 외면한 떼쟁이들’이라고 했죠.

곽이경  행성인(‘행동하는 성소수자 인권연대’) 사람들이 ‘외면’이라는 말이 싫대요. 선생님도 그날 외면 많이 당하셨죠?

박경석  무시당했죠.

곽이경  그날 이후 욕을 많이 먹어서….

박경석  18원 후원금은 안 들어왔죠?

곽이경  행성인에 몇 개 들어왔대요.

그날 이후의 애프터서비스

곽이경의 그날은 지난 2월16일. 문재인 더불어민주당(민주당) 대선 후보가 여성정책을 발표하는 자리에 성소수자들이 항의 방문했다. 문 후보가 한국기독교총연합(한기총)에서 “차별금지법을 제정하지 않겠다.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발언한 직후였다.

이날 문재인 후보는 “나중에 발언 기회를 드리겠다”고 했지만 레즈비언 곽이경은 발언을 멈추지 않았다. “저는 여성이고 동성애자인데 제 인권을 반으로 자를 수 있습니까?” 문재인 지지자들은 “나중에! 나중에!”를 연호했다. 덕분에 2017 퀴어문화축제 슬로건이 ‘나중은 없다, 지금 우리가 바꾼다!’로 정해졌다.

박경석의 그날은 3월8일 세계 여성의 날.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대표인 그는 대선 후보 여성정책 토론회 연단에 올라 ‘부양의무제 폐지’ 입장을 물었다. 심상정·안철수·이재명 후보는 “폐지”라고 답했지만, 문재인 후보는 답하지 않았다. 게다가 악수를 기다리는 박경석 대표를 피해 동선을 바꿨다. 안희정 후보의 입장도 문재인과 다르지 않다. 이들이 마주 보고 대담을 나눴다.

사회  오늘이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서울 광화문 천막농성 1665일째죠. 차별금지법 제정 논란도 10년이죠. 지난 몇 해 치열한 사회운동들이었습니다. 근데 가장 유력한 대선 후보의 공약에 포함되지 않았어요. 2017년의 광장 이후에도 변하지 않을 정치의 한계처럼 보여요. 먼저 그날 이후 얘기가 궁금합니다.

곽이경  그날 이후의 논점은 ‘‘나중에’가 그 나중에가 아니다’라는 거예요. 나중에 기회를 주면 발언하면 됐는데 무례했다는 거죠. (성소수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기울어진 운동장에 살고 있는 상황을 무시하는 거죠.

박경석  우리도 많이 들었죠. 나중에 얘기해도 또 ‘나중에’야. 한순간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인식 문제인 거죠. 절차를 지켜서 말하면 반영되느냐? 아니거든요.

곽이경  ‘나중에’가 오래 고통받아온 이들에게 정곡을 찌르는 한마디였던 거죠. 퇴진행동(곽이경은 민주노총 대외협력국장으로 ‘박근혜정권퇴진 비상국민행동’ 활동가다) 한 분이 “그런 사람들이 오바마 발언에 이주민이 끼어들어 얘기하는 동영상에는 ‘좋아요’를 누를걸요?” 그래요. ‘나중에’가 자기 문제가 되면 어떨까를 생각해야 하는데 (일부는) 그러질 않아요.

사회  “인권을 반으로 자를 수 있느냐” 발언은 화제가 됐어요.

곽이경  예전에 ‘동성애 혐오 반대’ 광고 모금을 다녔는데 여성단체 활동가 한 분이 그래요. 자기는 차별엔 반대하지만 동성애를 인정하는 건 아니라고. 문재인 후보도 똑같은 거잖아요. (성소수자) 차별에는 반대하지만 차별금지법은 안 된다. 반쪽짜리 관용이 필요한 걸까 싶어요.

사회  오늘도 버스 타고 오면서 박경석 선생님의 은혜를 생각했습니다. 몸에 쇠사슬 두르고 지하철 선로를 점거하고 ‘버스를 타라’ 시위를 하지 않았으면 저상버스가 도입됐을까 싶어요. 덕분에 노인 이동권도 보장됐고요. ‘떼쟁이’가 만든 인권이죠. 세계 여성의 날 행사는 어땠나요?

박경석  안철수씨가 그렇게 답할 줄 꿈에도 몰랐어요. 11시에 시작하는 행사를 10시30분에 알았어요. 피켓이 없어 도화지에 구호를 쓰고 플래카드를 재활용했어요. 안희정 후보 행사에 항의할 때 만들어둔 플래카드에 이름만 지우고 다시 썼죠. 안희정도 부양의무제 폐지 공약을 안 했거든요. 후보 4명이 여성정책 발표할 때는 안 끼어들었어요. 예의를 갖췄죠. (일동 웃음)

발표 뒤 사진을 찍는 사이 연단에 나갔죠. 마이크는 못 빌렸어요. 딸이 결혼해 사위의 수입이 생기자 수급권을 박탈당하고 자살한 할머니도 여성이다, 지난해 장애인 자녀를 목 졸라 죽인 어머니도 여성이다, 부양의무제 폐지가 여성정책에서 중요한데 왜 빠졌느냐? 이렇게 발언하자 후보들이 답했는데, 문재인씨만 준비된 마무리 멘트를 했어요.

광장과 정치는 다르다굽쇼?

촛불광장 화제의 스티커가 대담을 진행한 들다방(노들장애인야학 카페)에 붙어 있었다. ‘나라를 바꾸는 가난뱅이·호모’. 구호는 유쾌 상쾌 통쾌했지만 광장과 정치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박경석의 촛불집회 발언 동영상은 ‘랩하는 할아버지’로 불리며 인기를 얻었다. 곽이경은 퇴진행동 활동가로 촛불 준비부터 미아 찾기까지 헌신했다. 그냥 촛불 시민일 때는 괜찮지만 정치적 요구를 하는 성소수자·수급권자가 되면 대접은 달라진다.

사회  야당이 압도하는 대선인데도 여러분의 의제는 배제되고 있어요.

박경석  성소수자 혐오 세력은 명확하지만 장애는 좀 달라요. 우리를 시혜와 동정의 대상으로 보죠. 시혜와 동정은 숨겨진 혐오예요. 오히려 더 혐오적이에요.

곽이경  결론은 같아요. 사람으로 권리를 요구하면 같은 반응이 나와요. 가만히 있어라, 나는 너희 동성애자들의 삶에 간섭하지 않는데 굳이 나서서 시끄럽게 구냐. 장애인도 시혜만 받으란 거죠.

박경석  부양의무제 폐지는 돈 문제가 있어요. 10조원 드는데 별거 아니에요. (수혜자가 대한민국) 5% 정도 되죠. 수급권자 140만 명과 (현재 수급권을 못 받는) 사각지대 110만 명. 국내총생산(GDP) 1%면 돼요. 유승민이 원내대표가 되면서 박근혜 복지정책에 반기를 들었다 잘렸잖아요? 유승민의 복지정책 1호 과제가 부양의무제 기준 폐지예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노인빈곤율 1위, 자살률 1위잖아요. 아까 말한 자살한 할머니 얘기를 하면서 노인복지 공약으로 들고나왔죠.

사회  장애인에게 좋은 건 모두에게 좋군요.

박경석  오른쪽의 유승민이 그렇게 할 정도로 심각하죠. 안희정이 ‘동의는 하지만 예산 문제로 봐야 한다’고 그래요. 박근혜와 같아요. 이명박은 22조원 드는 4대강사업도 공약하고 돈 만들어냈잖아요?

곽이경  보수 야당은 촛불에서 배운 게 없어요. ‘꽃길을 부탁해’ 시민대토론회에서 제가 모둠 사회를 봤는데 경기도 광주의 한 여성이 같은 조였어요. 스스로 보수라고 하는 분인데, 촛불광장에서 자기가 변한 얘기를 해요. 맨날 부스를 보니 유성기업 한광호 열사가 정말 억울하게 죽었더라, 그래서 (유성기업 회장) 유시영이 구속됐을 때 자기 일처럼 기뻤다. 마음이 녹아서 내 얘기를 했어요.

이번엔 ‘파파이스’(하니TV 프로그램) 애청자 한 분이 자기 소수성을 발견한 얘기를 해요. 또래 주부들 사이에서 자기는 너무 이상한 사람이란 거예요. 정치 얘기를 많이 하고, 아이를 데리고 광장에 나가니까. 여기 나와서 얘기하니 너무 좋대요. 성소수자 차별이 어떤 건지 알 것 같다고요.

그 순간 (저도) 알겠더라고요. 이렇게 열린 시민들이 만든 광장인데 (야당은) 광장을 (주먹을 작게 쥐며) 요만하게 만들어버려요. 도전받지 않은 거죠. 최근 성소수자 인권포럼 뒤에 ‘더 못되게 굴고 난장을 피우자’고 했어요. 그래야 겨우 도전을 받으니까요. 그들은 한번도 민주주의를 어떻게 구성할지 생각해본 적 없어요. 표를 많이 얻어서 민주당식 민주주의를 만들면 그만이죠. 이제 비시민들이 기어오를 테니까 민주당은 도전받을 일만 남았어요. 표 계산 때문에 (한국 사회가) 한 걸음도 못 나가고 있어요.

너희의 힘을 표로 증명하라?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공동대표가 서울 서대문구 국민연금공단 사옥에 ‘나 박경석은 개가 아니라 사람이다’라고 쓰고 사회보장법 개정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국민연금은 271만원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한겨레 김정효 기자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공동대표가 서울 서대문구 국민연금공단 사옥에 ‘나 박경석은 개가 아니라 사람이다’라고 쓰고 사회보장법 개정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국민연금은 271만원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한겨레 김정효 기자

사회  야당은 보수 기독교는 표가 있고 성소수자는 없다는 식이잖아요?

곽이경  보수 기독교 표는 허수예요. 보수 기독교가 탄기국(탄핵기각을 위한 국민총궐기 운동본부)과 밀접하잖아요? 그들에게 줄 서는 것보다 인권 보장을 지지하는 사람이 많다는 걸 증명할 겁니다.

사회  차별금지법, 부양의무제 폐지가 진보적 의제도 아니죠. 보편적 의제죠.

박경석  인간으로서 존재를 인정하라는 거죠. (장애인이) 거리의 턱을 낮춰달라고 하는 것이 혁명적 요구입니까? 부양의무제 폐지, 가능하고 이번에 할 겁니다.

사회  정말요? 믿습니까?

박경석  걱정하지 마세요. 굴복시킬 수 있어요.

사회  대선까지 시간이 없는데요?

박경석  방법이 있어요.

곽이경  ‘나, 다니엘 블레이크 운동’을 (영화 감독) 켄 로치가 리트윗해서 부러웠어요.

사회  그런데 벌금뿐인 영광?

벌금에 벌금을 더한 인생을 살아온 박경석 대표가 3월15일 271만원 손해배상청구를 당했다. 국민연금공단 벽에 ‘박경석, 나는 개가 아니고 인간이다’라고 썼다가 형사고발당했다. 노들장애인야학 교장인 그는 영화 를 보며 학생들과 같이 눈물을 흘렸다. “수급 하나 받으려고 겪어야 하는 설움이 복받쳐서”다. 영화의 다니엘은 낙서를 하고 훈방됐지만, 그는 벌금을 청구받았다. 국민연금공단에는 수급권 판정을 하는 사회보장위원회가 있다.

곽이경  벽에 칠하고, 소리치는 뒷맥락을 읽어주면 안 되나?

박경석  국민연금 사람들은 우리가 왜 갔는지 몰라요.

사회  지금 얘기한 것들을 공감하는 것이 한국 사회가 인간에 대한 이해의 깊이를 넓힐 기회란 생각이 듭니다.

박경석  우리 삶에 대해 (다수가) 정말 몰라요.

사회  젊은 박경석이 할아버지 소리 들을 때까지 몸부림쳤는데도 모르면 어떡해요.

박경석  몇천 일을 해도 동종 업계 사람들은 우리 농성을 몰라요. 농성 4년에 대략 10만 명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서명 받았나? 100만 명 목표를 채우려면 40년을 해야 해요.

곽이경  댓글에 그래요. ‘왜 문재인 후보한테 와서 그러냐? 쉽게 보이냐? 새누리당이나 기독교에는 가만히 있다가.’ 청소년 성소수자 육우당 현석이가 죽고 한기총 앞에서 몇 달간 시위를 했어요. 15년 전이에요. 차별금지법으로 10년을 싸웠어요. 그걸 모르는 사람들이 부끄러워해야죠.

그들의 정의를 배반하라

사회  촛불집회엔 열심히 나갔죠?

박경석  우리는 나갈 필요도 없어요. 계속 거기 있었으니까. 다음 정권에서도 (부양의무제) 폐지 안 되면 광화문에 있어야죠. 광화문광장의 터줏대감인데 우리 주제는 이야기도 안 하고 인사도 없이 가버리네…. 근데 차별금지법 제정될 거예요.

곽이경  정말요?

박경석  싸우고 있잖아요. 올해 4월20일 장애인차별철폐의 날 구호가 ‘문제로 정의된 사람이 그 문제를 다시 정의할 수 있는 힘을 가질 때 혁명은 시작된다’예요. 전통 야당은 촛불집회 같은 (시민) 참여는 이야기하지만, 참여한 우리한테 권력을 나눠주지 않아요. 너희는 힘을 길러라, 권력은 우리가 가진다는 거죠. 그러나 이미 소수자, 민중이 권력을 쟁취하는 과정에 있어요. 파워투더피플(Power To The People)!

사회·정리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독자  퍼스트  언론,    정기구독으로  응원하기!


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인터넷신청▶ http://bit.ly/1HZ0DmD
카톡 선물하기▶ http://bit.ly/1UELpok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