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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장난 권력

개헌
등록 2016-11-02 12:17 수정 2020-05-02 19:28

원래 ‘개헌’은 박근혜 정권 말기 뜨거운 감자 중 하나가 될 예정이었다. ‘정권 재창출’이라는 과제를 국민이 원치 않는 방식의 정치를 통해 외면해온 박근혜 정권으로선 개헌 카드를 꺼낼 수밖에 없으리라는 거였다.

구체적으로는 ‘반기문-TK 연대설’이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 처지에선 분명한 이 시대의 위인이겠으나, 객관적으로 대통령을 할 경험과 철학이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따라서 외치는 대통령이, 내치는 총리가 있는 분권형 대통령제를 도입해 외교 전문가인 반기문 사무총장을 대통령으로 하고, 국회의 이합집산에 따라 결정될 총리는 친박에 가까운 대구·경북(TK) 출신이 맡도록 잘 모색해보자는 구상이다.

분권형 대통령제로의 개헌은 이명박 정권에서도 심도 있게 논의됐다. ‘개헌 전도사’를 자처한 이재오 전 의원이 2011년 강하게 밀어붙였다. 덕분에 국회에서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 초안을 대략 마련하는 데까지 진도가 나갔다. 박근혜 정권에서 개헌을 추진하면 지난 국회가 논의한 개헌안의 골자를 완전히 부정할 수 없을 거다. 개헌을 고리로 해서 친박과 비박이 이해관계를 같이해 보수가 결집할 가능성이 크다.

새누리당 내 대권 구도를 봐도 이런 판단을 할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차기 대권 주자를 따로 키우지 않고 그나마 가능성 있는 주자를 모두 짓밟아버렸기 때문에 제대로 된 대권 주자가 없는 상황이다. ‘제왕적 대통령’에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사람이 다수다. 그러나 권한이 축소된 대통령이나 총리를 상정해놓고 보면 얘기가 다르다.

물론 생각해볼 다른 사정도 있다. 개헌이 되면 지난 헌법에 따라 선출된 국회의원 역시 다시 뽑아야 한다. 그래서 2017년 선출할 대통령의 임기를 다음 총선까지로 제한하고, 2020년에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새 헌법에 따라 같이 선출하는 방안이 유력하게 언급된다.

이것에는 또 다른 정치적 맥락이 작용할 수 있다. 5년짜리 대통령의 가능성엔 고개를 갸우뚱하지만 2년3개월만 대통령을 맡는다고 하면 얘기가 달라지는 정치인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김종인 전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나 손학규 전 의원 같은 ‘정치적 노인’들이 대표적이다.

차기 ‘잠룡’들 처지에서도 2년3개월짜리 대통령의 출현은 나쁘지 않은 조건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이나 남경필 경기도지사, 원희룡 제주도지사 같은 사람들은 무사히 지방자치단체장 임기를 마칠 것을 전제로 2020년 계획을 짤 수 있다. 새누리당 내 비박계 대권 주자들도 친박이 요구하는 ‘반기문-TK’ 체제를 용인하면서 2020년을 비교적 평화롭게 준비할 수 있다.

이미 야권의 ‘유력 주자’로 꼽히는 인물들에겐 달갑지 않은 시나리오다. “2년3개월짜리 대통령은 안 한다”고 하기도 뭐하고 이제 와서 “이번에는 출마하지 않겠다”고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개헌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으나 2년3개월 대통령을 하고 나서 다시 출마할 수 있을지, 거기서 당선될지도 장담할 수 없다. 문재인 더민주 전 대표나 안철수 국민의당 전 공동대표가 개헌에 부정적인 것은 이런 이유도 있지 않나 한다.

새로운 헌법에는 이런저런 정치공학이 아니라 국민의 요구를 제대로 담아야 한다는 의견에도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경제민주화’는 1987년 헌법에 관련 조항이 등장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위력을 발휘했다.

물론 대통령발 개헌 동력은 상실됐기 때문에 지금 상황은 이런 얘길 하는 것조차 사치다. ‘대통령발 개헌’은 누구의 구상인가? 최순실씨가 허락해야 개헌을 할 수 있는 나라에 살았다고 생각하니, 이런 글을 쓰는 것도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

글·컴퓨터그래픽 김민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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