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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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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누나 점심값’ 빼내 ‘동생들 보육비’로 쓰자?

무상보육과 무상급식을 양자택일의 문제로 몰고 가는 퇴행적 논쟁…

정부 ‘증세 없는 복지’ 허구성을 가리고 보편적 복지 확장을 차단하려는 의도라는 지적 나와
등록 2014-11-18 06:46 수정 2020-05-02 19:27
장휘국 광주시교육감(맨 왼쪽)을 비롯한 전국 시·도 교육감들이 지난 11월6일 대전시교육청에서 내년도 어린이집 누리과정 예산과 관련한 임시총회를 열고 있다. 교육감들은 어린이집 누리과정 예산에 대한 정부의 지원을 계속 요구하는 한편 보육 혼돈을 우려해 관련 예산 일부를 편성하기로 했다. 한겨레 이정아 기자

장휘국 광주시교육감(맨 왼쪽)을 비롯한 전국 시·도 교육감들이 지난 11월6일 대전시교육청에서 내년도 어린이집 누리과정 예산과 관련한 임시총회를 열고 있다. 교육감들은 어린이집 누리과정 예산에 대한 정부의 지원을 계속 요구하는 한편 보육 혼돈을 우려해 관련 예산 일부를 편성하기로 했다. 한겨레 이정아 기자

‘박근혜계’(친박)를 자임하는 새누리당 중진 의원을 최근 만났다. 무상복지 예산 논란과 관련해 지면에 담기 어려운 그의 거친 표현 몇 개를 걷어내면 대략 세 문장으로 요약된다. “시·도교육감들 정신 차리게 만들어야 한다. 무상급식은 표를 얻으려고 하는 거다. (표를 얻으려는 정책들이 대부분) 다 쓸데없는 것들이다.” 그의 말이 새누리당과 친박 전체의 생각을 대표할 순 없다. 다만 ‘학교 무상급식 돈을 빼서 무상보육 예산에 써야 한다’는 청와대·여당의 인식 밑바탕을 엿볼 순 있다. 여권의 이런 주장은 ‘형·누나들의 식판을 뺏어 어린아이들 보육비로 쓰자는 유치한 발상’이란 비판을 불렀다. 쌍둥이 형제 같은 ‘무상급식-무상보육’ 정책을 찢어놓지 말라는 목소리도 나왔다.

무상보육은 박 대통령 공약이니까

우선 누리과정 예산 문제로 출발해 무상복지 예산 논쟁으로 번진 과정을 잠시 살펴보자. 누리과정은 만 3~5살 아이들에게 정부가 보육비(어린이집)와 교육비(유치원)를 지원하는 사업이다. 2012년까지 만 5살만 지원하다 2013년부터 만 3~4살까지 대상이 확대됐다. 정부는 소득과 상관없이 유아 한 명당 지원금을 22만원(2013년), 24만원(2014년), 27만원(2015년), 30만원(2016년)으로 늘려가기로 했으나, 국가재정 사정을 들어 내년에도 2013년 수준인 22만원으로 동결했다. 문제는 무상보육을 대선 공약으로 내세운 박근혜 정부가 내년 예산을 짜면서 누리과정 전체 예산을 전국 시·도교육청의 지방교육재정교부금으로 모두 충당하도록 맡기면서 불거졌다. 전국 시·도교육감들은 즉각 반발했다.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은 정부가 각 교육청에 내려보내는 돈으로, 교육청 1년 예산의 70%를 넘게 차지한다. 교육감들은 내년 시·도교육청에 내려오는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이 전체 1조3475억원이나 줄었고, 인건비 상승 등 지출 요인이 많아 누리과정 예산을 모두 떠안을 수 없다고 반박했다. 이런 점 때문에 교육부 소관인 유치원에 다니는 만 3~5살 아이들은 지원하겠으나, 보건복지부 소관인 어린이집을 이용하는 아이들에 대한 예산 전체(2조1249억원)까지 전국 교육청이 부담하기 어렵다고 나섰다. 무상보육은 박 대통령의 공약이기도 한 만큼 국가가 누리과정 사업을 위해 예산을 추가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 교육부도 교육청의 재정 부담을 고려해 기획재정부에 누리과정 ‘어린이집’ 지원 예산 2조2천억원을 요구했지만, 기재부가 반영하지 않았다(무상복지 논쟁의 주요 쟁점은 표 참조).

그러자 청와대와 새누리당은 ‘무상급식에 과다하게 돈을 쓰면서 누리과정 어린이집 예산을 편성하지 않는 건 문제가 있다’라는 논리로 대응했다. ‘형·누나 점심값’을 빼내 ‘아기들 보육비’로 쓰자는 식의 비생산적인 주장을 촉발한 것이다. 수습은커녕 갈등을 키운 건 “무상급식은 (대통령의) 공약이 아니다”(11월9일)라는 안종범 청와대 경제수석의 발언이었다. 야권의 주요 공약(무상급식)은 폐기하고, 대통령의 공약(무상보육)은 지키려고 누리과정 예산을 교육청에 모두 떠넘기려 한다는 반발을 부른 순간이었다. 사실 액수로만 보면, 2014년 기준 누리과정 전체 예산(3조9284억원)이 지방자치단체와 교육청이 시행하는 무상급식 전국 예산(2조6239억원)보다 많다.

“불필요한 논쟁이 일어났다”

궁금해지는 대목은 ‘부잣집 아이들까지 공짜 점심을 줘야 하느냐’고 주장했던 여권이 무상보육에는 관대하다는 점이다. 보편적 복지가 아닌 선별적 복지를 주장한다면 무상급식·무상보육 모두 반대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이다. 우상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무상급식과 누리과정(무상보육) 모두 보편적 복지인데 대통령이 공약한 복지는 괜찮으니, 지자체와 교육청이 시행하던 무상급식 예산을 떼내어 하자는 건 모순된 접근법”이라고 말했다. “재원이 모자라면 솔직하게 말하고 다른 정부 예산을 돌리거나 증세 논의를 시작하면 되는데 지자체·교육청 예산을 대통령 공약 예산에 쓰겠다고 하면서 불필요한 논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권이 왜 무상보육에 상대적으로 집착하는지를 좀더 들여다봐야 한다. 이명박 정부는 2012년 1월에 2013년부터 누리과정 지원을 5살에서 3~4살까지 확대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이어 그해 9월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는 이명박 대통령과 청와대에서 만나 “0~5살 양육수당의 전 소득 계층 확대에 정부가 나서달라. 정부가 보육료 지원이 불필요하다고 지목한 소득 상위 30%도 대부분 우리 주변의 평범한 맞벌이 가구다. 보육은 국가가 책임지는 게 맞다”며 무상보육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 실천을 주문했다. 박 후보는 대선 당시에도 국가책임보육을 재차 약속했다. 결국 모든 노인에게 기초연금 20만원을 주겠다던 공약, 4대 중증질환 의료비 지원 공약 등을 지키지 못한 상황에서 박 대통령이 깊숙이 개입한 무상보육까지 훼손하기 어려운 정치적 상황에 태생적으로 놓였던 것이다. 야권은 무상보육을 위한 충분한 국가 예산을 마련하지 못한 현실을 타개하려고 예산 책임을 교육청에 미루면서 야권의 대표 공약인 무상급식을 치고 들어왔다고 본다.

이상이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제주대 교수)는 이런 분석을 내놓았다. “복지에서 보육은 교육·의료와 함께 사회서비스의 핵심이다. 사회서비스는 모든 국민에게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여권이) ‘삼성그룹 손자에게도 공짜 점심을 줘야 하느냐’고 말하면서도, ‘(초·증등학교) 교육비를 왜 부잣집 애들이 내지 않느냐’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선별적 복지를 말하는 이들도 보육·교육·의료 등 사회서비스가 갖는 보편성에 도전하기 어려운 것이다. 보수 엘리트들이 그걸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손을 다시 댄 것이 야권이 주도한 무상급식이다. (소득에 상관없이) 점심까지 무상으로 줘야 하느냐는 논리가 (여론에) 파고들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학교에서 이뤄지는 급식도 (기회를 균등히 주는) 교육의 일환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진보교육감 위세 누르려는 여권의 속내

2010년 지방선거와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박원순 후보) 때 야권의 무상급식 의제에 일격을 당했다고 여긴 여권이 무상급식에 거듭 흠집을 냄으로써 보편적 복지에 공감하는 야권 지지층의 확대를 차단하려는 의도로 보는 해석도 있다. 특히 무상급식의 지속적 실천을 약속하며 2014년 6월 지방선거에서 약진한 진보교육감의 위세를 누르려는 속내가 담겨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서울시의회의 한 전문위원은 “청와대는 무상급식 논쟁을 유발해 누리과정 어린이집 예산을 편성하기 어렵다고 나선 교육감들의 도발과 보편적 복지 확장을 모두 정리할 수 있다고 본 것 같다”고 말했다. 재원 부족 등으로 야기된 누리과정 예산 논란을 무상급식 과다 지출 논쟁으로 변질시킴으로써 박 대통령의 ‘증세 없는 복지’의 허구성을 가리고 증세 논의로 넘어가지 못하게 차단하려는 것이 이번 논쟁의 본질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장기적으로 중산층을 야권 지지층에서 분리해 여권 지지 성향으로 포섭하려는 속내로 읽는 분석도 있다.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이 주장했던 것처럼 “급식은 소득 하위 50%만 지원한다”로 전환되면 소득 중간층도 무상급식의 복지 수혜 대상에서 빠지게 된다. 이상이 공동대표는 “보편적 복지가 확대되면 중산층도 친복지국가 성향이 되지만 복지 혜택 범위에서 벗어나면 세금은 더 내면서 복지 혜택이 줄어든다는 생각 때문에 ‘반복지국가 성향’으로 바뀔 수 있다. 미국의 중·상위 계층이 (보수 성향의) 공화당을 더 지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고 짚었다.

무상보육을 위해 무상급식을 희생시키려는 여권의 태도는 “퇴행”이란 지적이 나온다. 심상정 정의당 원내대표는 “무상급식은 2010년 지방선거 이후 선거 때마다 주민 동의를 거쳐서 순조롭게 자리잡아가고 있다. 무상급식과 무상보육은 (같이 가야 하는) 형제지간이다. 정부가 더 이상 둘 사이를 이간질하지 말라”고 말했다.

3~7개월분 누리과정 예산 편성했지만…

정부는 교육청이 지방채를 발행하면 정부가 이를 사주는 방법으로 부족한 누리과정 예산 일부를 채워주는 안을 제시했으나, 교육청은 지방채는 어차피 갚아야 할 빚이라며 근원적 해법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야권은 이번 사태를 푸는 방법으로 교육부가 누리과정 지원 예산으로 기재부에 요청했다 묵살된 2조2천억원을 국회 예산 심의 과정에서 최대한 살려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전국 교육청은 일단 보육 혼란을 우려해 내년 3~7개월분의 누리과정 어린이집 지원 예산을 편성했다. 하지만 ‘형·누나 점심값’과 ‘아이들 보육비’ 중 어떤 게 우선이냐는 수준의 논쟁에 계속 머물면 ‘3~7개월분의 교육청 누리과정 예산’이 바닥나는 내년 상반기 이후 사회적 혼란이 다시 불붙을 수 있다.

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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