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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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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히 터지는 ‘닫힌 입’은 ‘형님’을 향하나

이상득 의원 처조카사위의 향응 의혹을 지원관실이 덮었다는 폭로 등 잇따라…

노동부·TK 출신 ‘닫힌 입’들은 끝까지 윗선을 보호할까
등록 2010-12-02 07:00 수정 2020-05-02 19:26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이하 지원관실)은 정말 ‘권력 실세들의 홍위병’이었던 걸까?
민간인인 김종익 전 KB한마음 대표를 불법사찰한 혐의(강요죄 등)로 구속돼 지난 11월15일 1심 재판에서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은 원충연 전 지원관실 사무관의 수첩이 공개됐다. 검찰은 불법사찰 의혹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108쪽짜리 이 수첩을 발견했다. 여기엔 지원관실 회의 내용과 지시사항 등이 적혀 있다. 또한 지원관실이 정치인·언론계·노동계 등을 전방위로 사찰하고, 이를 청와대에 보고했을 가능성도 보여준다. 하지만 검찰은 “수첩 기재 내용이 범죄와 관련 있다는 점을 입증할 만한 자료를 발견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실세와 맞선 이들의 ‘살생부’

» 손학규 민주당 대표가 11월23일 낮 청와대가 보이는 서울 광화문 세종대왕상 앞에서 민간인 불법사찰과 대포폰 의혹의 국정조사·특검 수용을 요구하며 1인시위를 벌이고 있다. 한겨레 박종식

» 손학규 민주당 대표가 11월23일 낮 청와대가 보이는 서울 광화문 세종대왕상 앞에서 민간인 불법사찰과 대포폰 의혹의 국정조사·특검 수용을 요구하며 1인시위를 벌이고 있다. 한겨레 박종식

원 전 사무관은 왜 자신의 수첩에 이런 내용을 적어뒀을까? 수첩엔 지원관실이 등장인물들에게 ‘관심’을 기울인 이유를 짐작게 하는 기록이 나온다. “방해세력 제거”. 2008년 9월22일 오전 회의 내용 가운데 “첩보 입수, 공직기강-정책점검, 하명사건”이라는 글 뒤에 적힌 문구다. 지원관실이 사찰이나 동향 파악 대상 인물들을 ‘방해세력’으로 여겼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원 전 사무관의 수첩에 적힌 동향 파악 대상자들은 거의가 이명박 대통령과 그 형인 이상득 한나라당 의원 등 권력 핵심에 비판적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가운데 이용득 전 한국노총 위원장의 이름이 눈에 띈다. “수뢰 의혹, 해외여행시 공금 유용”이라는 글이 함께 적혀 있다. 지난 대선 때 위원장이던 그는 당시 한나라당과 한국노총의 정책협약을 맺는 등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을 도운 인사로 꼽힌다. 그런 인물을 왜 지원관실이 노렸던 것일까?

이 대목에서 이영호 전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이 등장한다. 평화은행 노조위원장을 지낸 그는 외환위기 때 금융노조에 파견돼 조직본부장을 지냈다. 이용득 전 위원장은 당시 금융노조위원장이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선가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졌고, 이 일로 이영호 전 비서관은 금융노조 간부직을 그만두게 됐다. 이 전 비서관에게 ‘구원’(舊怨)이 있을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런 관계는 이용득 전 위원장의 진로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이 전 위원장은 이명박 대통령을 도운 ‘공’으로 2008년 총선 때 한나라당 비례대표 후보 상위 순번을 받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제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에 당선된 사람은 이 전 위원장이 아니라 강성천 전 한국노총 자동차연맹위원장이었다. 

이상득 의원 처조카사위만 징계 안 해

이와 관련해 이 전 위원장은 과의 통화에서 “나하고 이영호 전 비서관 관계가 안 좋으니 사찰한 것 아니겠느냐”며 “수첩에 적힌 수뢰 의혹, 공금 유용 같은 건 모두 얼토당토않은 얘기”라고 말했다. 비례대표 공천 문제를 놓고선 “공천은 (나와의 나쁜 관계보다) 이 전 비서관과 강 의원의 친분 때문에 이뤄진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비례대표 후보 공천에 이 전 비서관이 개입했을 가능성을 제기한 것이다. “일일이 말하기는 그렇지만, (이 전 비서관은) 노동부 산하기관 인사를 비롯해 온갖 일에 다 개입했다. 그럴 수 있었던 건 대선 때 인연을 맺은 박영준 (지식경제부) 차관 때문으로 안다. 이 정부엔 노동 전문가는 없고, 기술자만 득시글댄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영호 전 비서관이 지원관실의 ‘윗선’ 중 한 명이라는 의혹을 받는 핵심적 이유 가운데 하나는, 불법사찰을 자행한 지원관실 핵심과 증거인멸에 사용된 대포폰을 건넨 이가 모두 노동부와 포항, 또는 대구·경북 출신으로 그와 가깝다는 것이다. 왜 하필 이들이었을까? 정권 실세들의 ‘방해세력’을 은밀히 ‘제거’하려면 무엇보다 끈끈한 내부 결속이 중요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원 전 사무관의 수첩에 적힌 “눈+귀, 입 ×. ‘목숨 걸고’”라는 메모다. 지원관실 직원들은 누가 뭘 지시하고 무슨 일을 하는지 보고 들을 눈과 귀는 있지만, 이를 외부에 발설해선 절대 안 된다는 뜻으로 읽힌다.

실제로 이인규 전 지원관 등 검찰 수사를 받은 지원관실 직원 7명은 ‘윗선’이 누구인지에는 일절 입을 열지 않았다. 눈만 뜨면 새로운 의혹이 불거지다시피 하면서 ‘봐주기 수사’ 논란이 커지는데도 검찰이 “입증하기 어렵다”는 말을 반복하는 것은 일정 부분 이들의 ‘닫힌 입’ 때문이다.

지원관실은 이런 결속력을 바탕으로 ‘실세 보위’ 역할도 한 것으로 보인다. 유성엽 의원(무소속)은 10월19일 국회 교육과학기술위원회의 한국과학기술평가원(과기평) 감사에서 이상득 의원의 처조카사위인 김아무개 과기평 본부장의 향응·성매매 의혹을 지원관실이 조사하고도 덮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유 의원이 공개한 자료를 보면, 지원관실은 올 초 교육과학기술부(교과부) 간부들이 산하기관인 과기평 간부들한테서 성접대·향응을 받은 사실을 확인하고, 과기평 간부 3명의 중징계를 요구하는 공문을 교과부에 보냈다. 그런데 접대를 받은 교과부 공무원들에 대해선 아무런 조처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과기평 간부들을 조사하면서 김아무개 본부장의 향응·성매매 의혹을 확인하고 이를 교과부에 보낸 공문에 적시하면서도 정작 김 본부장은 조사조차 하지 않았다. 지원관실이 징계를 요구한 간부 3명은 정직 처분을 받았지만, 김 본부장은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았다. 이 사건은 이미 2008년 경찰과 검찰이 수사했지만, 과기평 실무자만 벌금 1천만원에 약식 기소하는 선에서 마무리됐기 때문에 지원관실이 재조사에 나서게 됐다. ‘축소 의혹’ 때문에 재조사를 시작한 지원관실 역시 ‘축소 의혹’을 사게 된 셈이다.

이 때문에 유 의원은 국정감사에서 김 본부장에게 “이명박 정부 핵심 실세, 공직윤리지원관실의 핵심 관계자와 친분을 과시했다는 이야기가 누누이 들려온다. 지원관실이 김 본부장에 대해선 철저히 봐주기로 일관하고 있다”고 따졌다. 물론 김 본부장은 향응·성매매 의혹을 모두 부인했고, 정권 실세와의 친분을 과시한 적도 없다고 반박했다. 

“언젠가는 내부에서 터질 일”

지원관실 근무자들의 ‘닫힌 입’은 끝까지 열리지 않을까? 재판을 받은 한 지원관실 관계자는 과의 전화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검찰이 잡아넣어야 할 사람들은 안 잡아넣고 엉뚱한 사람만 괴롭힌다. (시키는 일만 했는데)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변호사 비용도 안 대준다. 자기들끼리는 다 해주면서….” 몹시 격한 목소리였다. 변호사 비용을 대주지 않는 사람이 ‘윗선’이냐는 질문엔 답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그의 말은 견고해 보이던 지원관실 내부의 결속이 흔들리고 있다는 징후로 읽힌다.

한나라당에서도 “언젠가는 지원관실 관계자들 내부에서 터질(윗선이 폭로될) 일이다. 정권 말기로 가면 수습이 불가능하다. 그러니 빨리 재수사를 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네덜란드 소년’은 아무 데서나 나오는 게 아니다.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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