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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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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의 국제정치, 검증대에 서다


등록 2010-06-15 09:38 수정 2020-05-02 19:26

부시 행정부에서 국무부 정책실장을 지낸 리처드 하스 미 외교협회 회장은 지난 5월 14일 서울의 한 세미나에서 천안함 사건은 “설득력 있고 확증력 있는 증거를 국제사회에 제시하기 전까지 결론을 유보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5월 20일 발표한 천안함 조사 결과는 설득력과 확증력이 있는가? 이명박 대통령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5월 24일 담화를 통해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어떤 나라도 천안함 사태가 북한에 의해 자행됐음을 부인할 수 없게 됐다”고 못박았다. 지나치게 확신했는지 설득의 자세는 안 보였다. 이 대통령은 부인할 수 없다고 단정했다. 과연 어느 나라가 공식적으로 부인할 수 있을까?











‘확증력 있는’ 증거와 동맹의 덫

〈현대인의 삶1〉, 2009-안미경

〈현대인의 삶1〉, 2009-안미경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이 밝혔듯, 이제 어느 누구도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넘어갈 수 없다. 천안함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남북관계든 북핵 문제든 어떤 현안도 다룰 수 없게 됐다. 이 대통령은 담화에서 “대한민국과 국제사회 앞에 사과하고 이번 사건 관련자들을 즉각 처벌”할 것을 북한에 요구했다. 그는 이 요구를 “북한이 우선적으로 취해야 할 기본적 책무”라고 말했다.

그러나 북한이 이에 응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담화 뒤 나온 북한의 반응은 격렬했다. 최고권력기관인 국방위원회 대변인은 지난 5월 24일 기자와의 회견에서 “담화는 상전과 주구가 머리를 맞대고 꾸민 ‘날조극’이 드러날까봐 쓰고 있는 권모술수”라며 “역적 패당의 서툰 날조극, 모략극”이라고 주장했다. 남북은 천안함의 덫에 갇혔다. 남북관계는 20년 전으로 후퇴했다. 천안함 문제를 둘러싼 대치 상황을 계속할 수밖에 없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는 더 심각한 충돌 상황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크다.

천안함은 미국과 중국도 ‘동맹의 덫’에 가두고 있다. 미국은 동맹의 편에 섰다. 초기엔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거리를 뒀다. 그러나 5월 20일 천안함 조사 결과 발표를 전후해서는 이명박 정부의 가장 든든한 지지자로서 한 치의 흔들림이 없는 모습을 보였다. 미국, 영국, 호주, 캐나다 등은 합동조사단에 자국 전문가들을 참여시켰다. 미국의 무조건적이고 전폭적인 지지는 당연한 것이다. 이 대통령이 언급한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어떤 나라도’라는 표현은 중국을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안보리 상임이사국 중국은 이미 5월 18일 조사 결과를 사전 통보받았음에도 그에 대해선 철저히 중립을 보였다. 오히려 중국은 북한이 이 사건과 무관하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일찍부터 공식화했다. 우리에겐 혈맹인 북한이 있다는 뜻이다.

국제적 검증대에 선 천안함 조사 결과

오히려 러시아가 지지 대열에 가담하지 않은 게 중요하다. 많은 이들이 중국이 열쇠를 쥐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또 다른 상임이사국 러시아의 태도는 국제사회의 지지를 배경으로 한 한-미 대 북-중이라는 힘의 구도에 심각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러시아는 5월27일 천안함 사건 조사 결과를 검토할 자체 전문가팀을 한국에 보내기로 했다. 러시아도 종합적 평가가 필요하다면서 조사 결과를 수용하지 않았다. 한국 쪽이 ‘원한다면 자체 전문가를 보내 확인하라’고 하자,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러시아는 중국처럼 모호하게 말하지 않는다. 이고르 리아킨-프롤로프 외무부 부대변인은 5월 26일 와의 인터뷰에서 “러시아는 이번 사건이 북한의 소행이라는 것이 완벽하게 밝혀질 때까지 대북 제재 협력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는 100% 확실한 증거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극동문제연구소의 알렉산드르 제빈 소장도 이날 일간 와의 인터뷰에서 “천안함 침몰이 북한의 소행이라면 적어도 상시 북한군 동향을 감시하는 미국 위성에 잡혔을 것”이라면서 조사 결과에 의혹을 제기했다. 천안함 조사 결과는 국내는 물론이고 국제사회에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확증력 있는 증거’가 되지 못하고 있다.

송민순 전 외교부 장관(민주당 의원)은 “ ‘우리가 다 조사했으니 따르라’는 식으로는 중국과 러시아가 수긍할 수도 없고, 유엔 안보리에서 획기적 메시지를 끌어낼 수도 없다”고 평가했다.(1)

중국의 단호함, 러시아의 명쾌함

중국의 반응은 러시아보다 신중하지만 일관되고 단호하다. 지난 5월 24일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미-중 전략대화에서 천안함에 대한 북한의 책임을 요구한 데 대해 마자오쉬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국제 문제를 다루는 ‘기본 정신’을 밝혔다. “‘사안의 옳고 그름’에 따라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국제 및 지역 문제에 대응해야 한다”는 게 중국의 기본 정신이며 “천안함 사건과 유관 문제 역시 이같은 기본 정신을 준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쪽 조사 결과로는 천안함의 옳고 그름이 분명치 않다는 뜻이 담겨 있다. 지난 5월 26일 장즈쥔 중국 외교부 부부장의 발언은 좀더 구체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는 5월 28일 원자바오 총리의 한국·일본 등 아시아 4개국 순방을 설명하면서 “천안함 사건은 매우 복잡한 사건”이라고 전제하고, “중국은 관련 정보를 수집 중이며 천안함 사건에 대한 1차적 자료를 확보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원 총리가 이명박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중국의 자체 평가 결과를 전달할 계획이 있느냐’는 물음에 대한 답변이었다. 그는 천안함 조사 결과에 대한 판단에 대해선 “여전히 신중하게 연구하고 평가·분석 작업을 진행 중”이라며 “중국은 공평하게 대처하고 처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중국은 자체 평가 분석 작업을 하고 있지만 1차 자료가 없기 때문에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회적으로 한국 쪽 조사 결과를 요청하면서 검증하겠다는 뜻도 밝힌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원자바오 총리를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 원 총리는 엄정 중립을 강조했다.

때를 맞춰 북한은 5월 28일 박림수 국방위원회 정책국장을 내세워 평양 주재 각국 대사관 관계자들과 내외신 기자들을 앞에 두고 합조단의 조사 결과를 조목조목 반박했다. 이는 중국의 요청에 부응한 것이다. 5월 26일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의 국제 문제 전문지 는 ‘외부 세계의 의혹에 진지하게 응하는 것이 북한에 유리하다’는 제목의 사설에서 “성의 있는 진실 규명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천안함으로 북-중 관계가 시험대에 섰다”고 말했다. 그러나 오히려 본격적이고 혹독한 국제적 차원의 검증이라는 시험대에 선 건 합조단의 조사 결과다.

안보리 회부와 미-중의 공동 이해

천안함 사태를 유엔 안보리에 회부하겠다는 이 대통령의 담화문 뒤 유엔 주재 한국대표부는 안보리 이사국을 상대로 한 물밑 접촉을 시작했다. 그런데 유엔대표부 관계자는 “지금 북한을 제재하면 점점 더 강수를 둘 공산이 크고 이는 한반도 안정에도 도움이 안 된다는 게 중국의 입장”이라고 말했다. 한국이 기댈 수 있는 카드는 미국의 지원사격이다. 그러나 미국도 안보리에선 중국을 일방적으로 압박하기 어려운 처지다. 미국은 이란의 핵개발을 저지하기 위해 유엔 안보리 제재를 추진하고 있다.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중국은 이란 제재에도 결정적 카드를 쥐고 있다. 수전 라이스 유엔 주재 미국대사도 5월 25일 이런 미국의 입장을 우회적으로 내비쳤다. 그는 “미국은 한국 정부가 이번 사건을 유엔 안보리에 회부하기로 한 결정을 지지한다”면서도 “우리는 이 문제를 언제 어떤 방식으로 안보리에 제기할 것인지 한국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안보리에서 한국의 입장을 적극 지원은 하되 미국이 앞장서지는 않겠다고 선을 그은 것이다.

천안함 사건을 둘러싸고 미국과 중국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가? 미국과 중국은 천안함의 조사 결과를 수용하는가 아닌가에서 분명 다르다. 그러나 양쪽은 어떤 갈등도 드러내지 않았다. 5월 24~25일 미-중 전략대화 뒤 열린 공동기자회견에서 클린턴 장관은 “천안함 사건은 지역 안정에 심각한 도전”이라면서도 “천안함 사건에 효과적이고 적절하게 대응하기 위해 미국은 앞으로 중국과 협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 쪽 다이빙궈 국무위원은 “미-중 양국은 동아시아와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 유지가 매우 중요하다고 믿는다”며 “유관국들이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 수호를 바탕으로 냉정과 절제를 유지해 관련 문제를 적절하게 처리함으로써 한반도 정세의 긴장을 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은 공식적으로는 중국에 안보리 회부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중국을 압박하지도 않았다. 미-중이 합의한 것은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 실현이라는 목표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오바마 행정부의 핵심 관리들 발언 어디를 봐도 중국을 압박하지 않고 있다. 커트 캠벨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는 5월 27일 “중국이 북한을 천안함의 배후로 인정하고, (그런 쪽으로) 미묘하게 태도를 바꾸게 될 것이라는 느낌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그랬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제임스 존스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 보좌관도 기대만을 표명했다. 그는 5월 27일 유엔 안보리에서 중국의 동참 여부에 대해 “중국이 주어진 증거를 바탕으로 틀림없이 올바르게 행동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미국이 천안함 문제에서 한국을 지지하기 위해 중국과 대립할 것으로 보는 건 순진하다. 천안함 문제 해결 없이 6자회담은 불가능하다. 미국도 이에 동의했다. 그러나 중국과 마찬가지로 미국도 6자회담보다 ‘천안함’을 더 중요하게 본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물론 한반도 평화와 안정이라는 관점에서 보더라도 천안함 문제는 긴급 현안이다. 그러나 천안함 문제가 해결되는 건 언제인가? 정부가 요구하는 천안함 문제의 해결은 북한이 사과하고 책임자를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다. 남북은 그 답을 찾을 수 없다. 천안함 조사 결과는 오히려 그동안 제기된 숱한 의문점을 공론화하고, 논쟁을 국제화하는 조짐이다. 게다가 천안함을 둘러싼 남북 대립이 심화하면서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은 더 위협을 받고 있다. 미-중의 공동 이해와는 다른 방향이다.

송민순 전 장관은 이렇게 말했다. “미국은 지금 구두로만 지지하고 있다. 한국 정부가 강대국의 정치 논리를 알아야 한다. 미국과 중국은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 북한 비핵화, 긴장보다는 안정에 대해 공유하는 ‘이익’이 있다. 남북 간 긴장이 고조되면 결국 나중에는 미국과 중국이 개입해서 말리는 형국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한국은 한반도 문제 해결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다.”(2)

글•강태호
에서 남북 문제를 줄곧 다뤄왔다.


(1) ‘북·중·러 참여시켜 천안함 조사 검증 필요’, 5월 25일자 인터뷰.
(2) 위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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