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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쇠약 직전의 사람들



‘한순간의 빈틈이 대통령 목숨을 앗아갈 수 있다’는 중압감에 항상 감각을 최고도로 예민하게 유지하는 경호팀
등록 2009-02-20 02:52 수정 2020-05-02 19:25

1963년 11월22일 미국 텍사스 댈러스 공항. 대통령 전용기인 ‘에어포스원’을 내려서며 손을 흔드는 케네디와 부인 재클린의 표정은 유난히 밝았다. 공항엔 그들을 보기 위해 많은 시민들이 나와 있었다. 오픈카(무개차)에 탄 케네디 부부는 댈러스 중심가로 향했다. 중심가로 다가갈수록 환영 인파 수는 훨씬 늘었고, 케네디는 중간중간 차에서 내려 시민들의 손을 맞잡았다. 케네디 부부가 탄 차량의 바로 뒤엔 클린턴 힐을 비롯한 백악관 경호실 요원들의 차량이 바싹 따라붙었다.

케네디 대통령이 저격당한 직후, 뒤따르던 경호원 클린턴 힐이 대통령 차량에 올라타 케네디에게 다가서려 애쓰고 있다. 연합

케네디 대통령이 저격당한 직후, 뒤따르던 경호원 클린턴 힐이 대통령 차량에 올라타 케네디에게 다가서려 애쓰고 있다. 연합

“수십 년 지났어도 악몽을 꾼다”

“차량이 중심가 코너를 막 돌자마자 무슨 소리가 들렸다. 뭔가 잘못됐구나 싶었다. 대통령이 목을 손으로 감싸쥔 게 보였다. 나는 경호차량에서 뛰어내려 대통령 전용차량 뒤에 매달리려 애썼다. 재클린은 필사적으로 차 트렁크에서 뭘 꺼내려는 것 같았다. 또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전용차량에 뛰어올라 보니, 케네디 대통령의 귓부분에 손바닥만 한 구멍이 나 있었다. 바닥엔 피와 뇌수가 흥건했다.”

케네디가 리 하비 오스왈드에게 암살당하던 순간을 클린턴 힐은 이렇게 기억했다. 미국은 물론 전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순간이었다. 그전에도 대통령 암살은 있었다. 1865년부터 1901년까지 에이브러햄 링컨을 비롯해 세 명의 미국 대통령이 잇따라 암살당했다. 하지만 그때는 전문적인 대통령 경호팀이 생기기 전이었다. 미국 최고의 기관을 자부하는 ‘시크릿 서비스’(Secret Service)가 대통령 경호를 맡은 이래 이런 참담한 실패는 처음이었다. 실패는 깊고 예리한 상흔을 백악관 경호실에 남겼다. 케네디의 절명을 눈앞에서 지켜본 경호원 클린턴 힐은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심리치료를 받았지만 더 이상 경호 업무에 적응하지 못하고 은퇴했다. “수십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악몽을 꾼다. 그 순간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그는 말했다.

역설적으로 대통령 경호는 실패를 거치면서 발전한다. 댈러스 사건 이후 미국 대통령 경호는 모든 게 바뀌었다. 대통령 전용차량 중 무개차는 백악관 의전행사 등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곤 국민 시야에서 사라졌다. 대통령이 어떤 차에 탔는지를 감추기 위해, 똑같은 방탄차량 여러 대가 함께 이동하는 게 기본이 됐다. 케네디가 총에 맞은 직후 댈러스의 파클랜드 메모리얼 병원으로 옮겨진 건 우연이었다. 그 뒤 대통령 방문 지역에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대통령 혈액형과 똑같은 혈액을 비축한 병원을 미리 점검하는 게 관행이 됐다. 대통령 차량의 방탄 기술은 획기적으로 개선됐다. 방탄유리는 기관총 탄환을 튕겨낼 정도로 두꺼워졌고, 차량 밑바닥은 지뢰나 수류탄 폭발도 견딜 수 있게 됐다. 대통령의 일정과 동선은 대외비로 바뀌었다. 케네디 암살 전까지는 대통령 도착시간과 차량 이동경로가 언론에 보도됐다. 시민들이 거리에 나와 대통령을 볼 수 있게 하려는 뜻이었지만, 이건 “암살범을 너무 유리한 위치에 서게 한”(클린턴 힐) 행동이었다. 백악관 경호실은 현지 경찰과 함께 대통령 차량이 이동하는 동선을 수십~수백 번씩 미리 답사하면서 저격 위험성을 제거하는 게 일상화됐다.

문세광 사건 뒤 금속탐지기 도입

한국 역시 마찬가지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됐고, 그보다 5년 앞선 1974년엔 육영수씨가 암살됐다. 1983년엔 버마 아웅산 묘소에서 전두환 대통령을 겨냥한 폭탄테러 사건이 터졌다. 박정희 대통령의 목숨을 앗아간 1979년 10·26 사건은 암살이라기보다는 내부 쿠데타에 가깝다. 순수한 의미의 경호 실패로는 1974년 육영수씨를 숨지게 한 문세광 사건과 1983년 버마 아웅산 폭탄테러 사건을 꼽을 수 있다.

1974년 8·15 기념식장에서 육영수씨가 쓰러지자 당시 경호실 요원이던 박상범씨가 연단 앞에서 총을 겨누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74년 8·15 기념식장에서 육영수씨가 쓰러지자 당시 경호실 요원이던 박상범씨가 연단 앞에서 총을 겨누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문세광 사건 때는 대통령의 행사장 진입을 깔끔하게 하는 데만 신경쓴 나머지 경호의 기본인 검문검색을 소홀히 하는 치명적 실수를 저질렀다. 허술한 검색 시스템을 파고들어 문세광은 행사장인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 진입할 수 있었다. 청와대 경호실 인사들의 얘기와 검경의 수사기록을 종합하면 당시 상황은 이렇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통령 행사장에 금속탐지기가 도입되지 않았다. 행사 시작 1시간30분 전에 고급 승용차를 타고 국립극장에 도착한 문세광은 유창한 일본어로 일본 쪽 인사들을 만나러 왔다고 말했다. 외교사절을 비롯한 고관대작들이 몰려들 걸 대비해야 했던 현장 경호요원은 문세광을 국립극장 내 별도 공간에 잠시 대기시키곤 그 자리를 떴다. 대통령 도착 시간이 가까워오면서 행사장은 몹시 바쁘고 정신이 없어졌다. 그 틈을 타서 문세광은 행사 시작 10분 전에 1층 식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국립극장 현장에 있었던 한 경호요원의 기억은 약간 다르다. “청와대에서 광복절 기념식장인 장충동 국립극장까지 오는 데 정확히 7분이 걸린다. 오전 10시에 식이 시작하므로 박정희 대통령 부부는 9시50분에 청와대에서 출발했다. 그런데 이런 행사 참석자들은 대부분 고관대작들이라 일찍 오지 않고 행사 시작 20∼30분 전에야 몰린다. 청와대에서 대통령이 출발했다는 무전은 왔는데, 국립극장 앞 검색대에는 입장객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대통령이 입장할 때 입구가 혼잡해선 안 된다는 생각에서 검색을 아예 생략하고 입장객들을 서둘러 들여보냈고, 이 틈에 문세광도 식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어쨌든 첨단 검색장비를 갖추지 못했고, 대통령 도착 직전의 혼잡한 상황에서 철저한 검문검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건 분명하다. 이 사건 이후 청와대 경호실은 금속탐지기를 비롯한 첨단 검측·검색 장비를 도입했다. 또 대통령이 입장하는 출입문을 별도로 운용하기 시작했다.

1983년 아웅산 폭탄테러 사건 때엔, 버마가 북한과 가깝다는 점을 들어 경호실과 안기부는 전두환 대통령의 버마 방문에 반대했지만 비동맹 외교의 중요성을 주장하는 외무부 의견에 밀렸다. 그리고 경호실 선발 경호팀은 국내에서처럼 버마 랑군의 아웅산 묘역을 철저하게 점검하지 못했다. 당시 경호실에 근무했던 인사는 “아웅산 묘역은 우리의 국립묘지와 같은 버마의 성지라, 버마 쪽에서 우리 선발 경호팀의 사전 점검을 완강하게 막았다”고 말했다. 우리 쪽이 사전 검색을 주도할 수 없었기에, 북한 공작원들이 묘역에 설치한 폭탄을 미리 발견하지 못했다. 이 사건으로 서석준 부총리 등 15명의 정부 고위관료가 숨지고 청와대 경호원 2명도 순직했다. 다행히 전두환 대통령이 탄 차량은 묘역에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그 뒤 우리 대통령의 다른 나라 순방 때, 특히 후진국을 방문할 때는 상대국으로부터 불쾌하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우리 쪽의 사전 점검이 철저해졌다.

한순간의 빈틈이 대통령 목숨을 앗아갈 수 있다-이런 생각이 경호실 요원들에게 주는 심리적 중압감은 엄청나다. 빌 클린턴 대통령의 근접 경호를 책임졌던 래리 코컬은 “나는 3시간 이상 잠을 자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2000년 첫 남북 정상회담이 평양에서 열렸을 때, 김대중 대통령을 엄호해 북한으로 올라가는 경호실 요원들에겐 이런 내용의 정신교육이 행해졌다. “대통령이 위험에 처하면, 단 한 명도 살아 돌아올 생각을 하지 말라.”

르윈스키 스캔들에 불려간 경호원들

경호요원들은 항상 신경을 최고로 예민하게 유지하기 위해 수시로 시각·청각 훈련을 받는다. 순간적으로 스쳐지나가는 물체를 정확하게 판별해내고, 행사장에서 나는 다양한 소리 가운데 총성을 구분해내기 위해서다. 청와대 경호실 관계자는 “행사장에서 백열전구가 터지는 소리는 총성과 매우 흡사하다. 전구가 터졌는데 총성인 줄 알고 대통령을 대피시키면 행사장이 아수라장이 된다. 정반대로 총성을 알아채지 못하면 훨씬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실제로 김영삼 대통령 시절에 서울 세종문화회관 천장의 전구가 터진 적이 있다. 다행히 금세 상황을 수습해서 행사는 그대로 진행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지난해 9월6일 청와대 경호원들이 이명박 대통령 앞에서 경호 시범을 보이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지난해 9월6일 청와대 경호원들이 이명박 대통령 앞에서 경호 시범을 보이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그러나 청와대나 백악관에 처음 입성한 대통령들은 경호실의 깐깐한 보호를 싫어하는 경우가 많다. 대중과 좀더 자유롭게 접촉하고 싶은 욕망 때문이다. 빌 클린턴 대통령은 1995년 백악관 앞 총격사건이 발생한 뒤 조깅을 중단하라는 요구를 경호실로부터 받았다. 그는 “나는 받아들였지만, 솔직히 싫었다. 경호가 나를 국민에게서 멀어지게 한다고 느꼈다”고 토로했다. 노무현 대통령도 처음엔 경호실의 ‘지시’를 잘 따르지 않았다. 그는 “시민들과 악수도 나누고 피부로 부딪치는 걸 좋아했다”고 말했다. 그러다 2003년 5월 다양한 상황을 설정한 경호실의 시범훈련을 보곤 “경호실과 호흡을 맞추겠다”고 태도를 바꿨다. 이명박 대통령 역시 지난해 9월 경호 시범을 본 뒤 “내가 일찍 (시범을) 봤더라면 경호원들을 좀더 잘 따랐을 텐데,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조크를 했다.

경호실 요원들은 오직 대통령의 목숨을 지키는 데만 전념하지만, 그 행동에 대해선 때때로 정치적 잣대가 들이대진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경호가 정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건 마찬가지다. 1998년 7월 시크릿 서비스는 발칵 뒤집어졌다. 빌 클린턴 대통령과 백악관 인턴 직원 모니카 르윈스키의 스캔들을 수사하던 케네스 스타 특별검사팀이 래리 코컬을 비롯한 대통령 근접 경호요원 10여 명을 소환한 것이다. 전례가 드문 일이었다. 대통령이 침실로 들어갈 때를 제외하곤 24시간 항상 대통령 곁에 붙어 있는 경호요원들을 조사함으로써, 클린턴의 위증 여부를 가려내려는 계산이었다. 실제로 경호원들은 “정치적 사안에서부터 개인사까지 대통령의 모든 대화를 속속들이 듣는다”.(빌 클린턴 전 대통령) 백악관 내부에서조차 대통령이 경호원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방은 몇 개에 불과하다.

루이스 멀러티 시크릿 서비스 국장은 강하게 반발했다. “경호요원들이 범죄가 아닌 대통령의 행위에 대해 증언을 하게 되면, 대통령과 경호원 간의 신뢰가 심각하게 훼손된다. 대통령이 경호원들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면, 대통령 안전은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연방대법원은 특별검사팀의 손을 들어줬고, 근접경호팀장인 래리 코컬을 비롯해 10여 명의 요원이 대배심 앞에 출두했다. 하지만 경호원들의 진술로 클린턴 대통령을 옭아매려던 특별검사팀의 작전은 실패했다. 특별검사팀은 경호원들의 입에서 아무런 정보도 얻어내지 못했다. 코컬은 “경호원은 벽이다. 우리는 대통령의 민감한 대화를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경호원은 벽이다”
박찬수 한겨레 논설위원

박찬수 한겨레 논설위원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1년 초, 대검 중수부에서 청와대 경호실에 연락이 왔다. ‘김영삼 전 대통령 차남 현철씨와 관련한 사안을 수사하는데 경호실 요원을 한 사람 불러 조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검찰이 찍은 경호원은 김영삼 정부 시절에 현철씨를 근접 경호했던 이였다. 현철씨가 누구를 만나고 어디를 갔는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경호실은 “경호원을 조사한 전례가 없다”며 청와대 민정수석실에 강하게 항의했다. 하지만 민정수석실은 완강했다. “국정원 직원도 조사했는데, 왜 경호실만 버티느냐. 빨리 내보내라”고 다그쳤다. 결국 검찰이 협조를 요청하는 정식 공문을 보내고, 경호실은 이를 받아들이는 선에서 타협이 이뤄졌다. 그 경호실 요원은 검찰에 출두했지만 현철씨의 행적에 대해선 입을 다물었고, 검찰 조사는 흐지부지됐다.

박찬수 한겨레 논설위원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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