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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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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가 너에게 묻는다

문선희 사진작가가 살처분 매몰지 100곳을 돌아다니며
상처받고 죽어가는 땅을 찍고 기록한 책 <묻다>
등록 2022-08-09 09:13 수정 2022-08-10 00:35
1588. 충북 증평의 한 콩밭이다. 밭고랑 사이로 돼지의 얼굴뼈가 드러났다. 죽은 돼지들이 땅을 비옥하게 해줬을 거라고 믿고 농사를 시작했으나, 질소 과잉으로 콩은 제대로 자라지 못했다.

1588. 충북 증평의 한 콩밭이다. 밭고랑 사이로 돼지의 얼굴뼈가 드러났다. 죽은 돼지들이 땅을 비옥하게 해줬을 거라고 믿고 농사를 시작했으나, 질소 과잉으로 콩은 제대로 자라지 못했다.

2022년 5월26일 강원도 홍천군 양돈농장에서 아프리카돼지열병이 발생해 돼지 1175마리가 살처분됐다. 가장 최근의 살처분이다. 뉴스에서 거의 다루지 않지만 매년 수천 마리에서 수만 마리의 가축이 전염병에 걸렸거나 병을 옮길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다. 12년 전 구제역과 조류독감 사태로 전국의 소·돼지·닭·오리 1천만 마리가 희생됐지만 이후에도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과도한 육식 수요가 있고 이를 충족하기 위한 축산업이 지속되는 한 살처분이라는 야만은 사라지지 않는다.
동물이 고통 속에 묻힌 땅은 어떻게 변했을까. 문선희 사진작가의 책 <묻다: 전염병에 의한 동물 살처분 매몰지에 대한 기록>(책공장더불어 펴냄)은 어쩌면 우리가 외면하고 싶은 진실을 드러낸다. 가축이 묻혔던 매몰지의 법정 발굴 금지 기간(3년)이 끝난 뒤 저자는 2년간 매몰지 100곳을 찾아다니며 죽음을 토해내는 땅의 모습을 담았다. 문 작가가 찍은 주요 사진을 소개한다. 사진 설명의 숫자는 사진을 찍은 곳에서 살처분된 가축 수를 말한다. _편집자
11800. 광주의 한 비닐하우스 내부를 찍었다. 오리를 키우던 비닐하우스 안에 1만1800마리의 오리를 그대로 파묻었다. 3년이 지났지만 땅 위로 끝없이 하얀 곰팡이가 피어올랐다. 농장주는 습기를 걷어내기 위해 모래를 뿌리고 또 뿌렸다. 가느다랗게 자란 초록색 잎은 부추잎이다. 법정 발굴 금지 기간이 해제돼 부추를 심었으나 거의 자라지 못했다.

11800. 광주의 한 비닐하우스 내부를 찍었다. 오리를 키우던 비닐하우스 안에 1만1800마리의 오리를 그대로 파묻었다. 3년이 지났지만 땅 위로 끝없이 하얀 곰팡이가 피어올랐다. 농장주는 습기를 걷어내기 위해 모래를 뿌리고 또 뿌렸다. 가느다랗게 자란 초록색 잎은 부추잎이다. 법정 발굴 금지 기간이 해제돼 부추를 심었으나 거의 자라지 못했다.

8975. 전남 나주의 한 매몰지에 설치된 침출수 배출관이 터진 자리에 선홍색 고체가 맺혔다. 침출수 배출관은 사체가 썩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액체를 빼내는 관이다. 침출수 배출관이 제대로 설치되지 않은 곳이 대다수였고, 설치된 곳도 관리되지 않아 용암처럼 부풀어오른 액체가 관을 뚫고 흘러넘쳐 기이한 모양으로 굳었다.

8975. 전남 나주의 한 매몰지에 설치된 침출수 배출관이 터진 자리에 선홍색 고체가 맺혔다. 침출수 배출관은 사체가 썩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액체를 빼내는 관이다. 침출수 배출관이 제대로 설치되지 않은 곳이 대다수였고, 설치된 곳도 관리되지 않아 용암처럼 부풀어오른 액체가 관을 뚫고 흘러넘쳐 기이한 모양으로 굳었다.

12000. 전남 영암의 논 귀퉁이에 조성된 매몰지에 보라색 곰팡이가 피어올랐다. 매몰지 선정 기준은 ‘집단 가옥, 수원지 하천이나 도로에 인접하지 아니한 곳’이었으나, 마을 어귀나 도로변, 무너질 위험이 있는 산비탈이나 언제 물이 흐를지 모르는 계곡과 수로, 물을 대야 하는 논 한가운데도 버젓이 매몰지가 있었다.

12000. 전남 영암의 논 귀퉁이에 조성된 매몰지에 보라색 곰팡이가 피어올랐다. 매몰지 선정 기준은 ‘집단 가옥, 수원지 하천이나 도로에 인접하지 아니한 곳’이었으나, 마을 어귀나 도로변, 무너질 위험이 있는 산비탈이나 언제 물이 흐를지 모르는 계곡과 수로, 물을 대야 하는 논 한가운데도 버젓이 매몰지가 있었다.

84879. 오리 8만4879마리를 파묻은 전남 나주의 매몰지. 땅속에서 올라온 유독가스로 며칠 사이 비닐 아래 풀만 투명한 흰색으로 변해 죽었다.

84879. 오리 8만4879마리를 파묻은 전남 나주의 매몰지. 땅속에서 올라온 유독가스로 며칠 사이 비닐 아래 풀만 투명한 흰색으로 변해 죽었다.

글·사진 문선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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