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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 삼성 회장의 3가지 과제 [각주경제]

자본시장과 관련법 등 삼성을 둘러싼 조건, 이건희 시대와는 달라져
등록 2020-10-31 14:41 수정 2022-10-28 02:02
2020년 10월28일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영결식이 열린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앞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유족이 차에서 내리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2020년 10월28일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영결식이 열린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앞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유족이 차에서 내리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이건희. 이름은 평범한 세 음절. 하나 그의 삶은 한마디로 정리하기 쉽지 않다. 2020년 10월25일 그의 별세 소식을 전하는 기사에 언론사의 많은 편집자는 달았던 제목을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며 고심을 거듭했을 터.

더 이상 ‘법보다 밥’ 먼저 아닌 시대

그날 퇴근 뒤 책장을 훑어보니 고인과 그의 가문, 삼성을 다룬 책만 15권이 꽂혀 있었다. 비자금 사건으로 일선에서 물러난 그가 다시 돌아온 2010년, 그해 삼성을 담당한 기자로 연을 맺어 이후 그와 삼성 관련 뉴스를 챙겨보며 하나둘 책들을 모았다. 그렇다고 고인을 더 잘 이해한 것 같지는 않다. 더 깊이 파고든 이들이 쓴 기사나 글에도 어떤 공백이 느껴진다. 빛과 그늘을 온전히 이야기하기엔 그는 넓고 깊다. 미욱한 깜냥으로 고인이 아들(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남긴 과제를 정리한다.

① 법 준수

고인이 혈기 왕성하게 경영할 때 법은 어떤 존재였을까. 그때는 삼성을 비롯한 국내 재벌이 급성장하던 시기다(물론 1997년 외환위기란 풍파도 있었다). 고인은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기 경영인이었다. 성장 제일주의가 사회를 지배할 때, 법의 힘은 상대적으로 약했다. 전란의 참혹함 속에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시기를 경험한 세대가 법보다 밥이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건, 바람직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자연스럽다. 정치권과 정부가 앞에선 준법을, 뒤로는 뇌물을 요구하는 건 익숙한 풍경이었다. 고인이 1995년 “정치는 4류”라고 한 것(베이징 특파원 간담회)도 겉과 속이 다른 정치와 정부에 신물이 나서 튀어나온 토로란 얘기도 있다.

법 자체가 허술하기도 했다. 구멍이 많았다는 얘기다. 아들로의 그룹 지배력 승계 출발점으로 꼽히는 1996년 삼성에버랜드(현 삼성물산) 전환사채 편법 발행이 이후 유죄가 아닌 무죄가 된 이유는 전관을 동원한 삼성의 방어력 덕택이기도 하나, 법 자체의 미비점에서도 찾을 수 있다. 1987년 국내 기업 중 처음으로 거래 회사와의 수평적 관계를 강조하며 ‘하청업체’가 아닌 ‘협력업체’라고 부르면서도 기술 탈취에 준하는 행동이나 무리한 단가 압박 등의 관행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과정보다 결과에 더 주목하던 시기였다.

이재용 부회장이 지휘봉을 잡은 오늘날, 조금은 달라졌다. 정부는 꾸준히 법의 공백을 메워갔다. 상속·증여세법에 완전포괄주의가 도입돼, 과거 같은 방식의 재산 상속은 어려워졌다.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은 내부 거래 기준을 크게 끌어올렸다. 기술 탈취 같은 부당한 하도급거래를 막는 안전장치가 하나둘 하도급법에 반영되고 있다. 지난 10여 년간 보수·진보 정권을 가리지 않고 이어진 흐름이다. 법이 따라오면 사각지대를 찾아 멀리 달아나려는 경우 앞으로도 삼성 본관 앞에서 시위(대)가 끊이지 않을 것이며, 이재용 부회장은 신문 경제면이 아닌 ‘사회면’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잦을 것이다.

② 시장과의 대화

장례식장을 찾은 정·재계 인사들은 고인의 업적으로 우물 안 개구리였던 삼성전자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킨 점을 가장 많이 꼽는다. 주요 매체에는 미국의 베스트바이(가전 대형 양판점)에서 가장 좋은 자리에 있는 삼성 로고를 보고 감격에 젖었던 회상을 담은 글이 적잖게 실렸다. ‘국뽕’(국수주의)에 물들지 않은 이도 얼마든지 말할 수 있는 감상이다. 실제 판매 시장에서 삼성은 애플이나 제너럴모터스(GM) 못지않은 위상을 갖고 있다. 세계적 브랜드 컨설팅사인 인터브랜드의 브랜드 가치 평가에서 애플,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MS), 구글에 이어 삼성이 5위에 오르지 않았나. 고인이 모든 걸 하지 않았지만 고인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는 삼성전자의 오늘날 위상이다.

자본시장은 어떨까. 고인이 삼성전자를 글로벌 회사로 성장시킬 때만 해도 자본시장의 삼성전자에 대한 주목도는 크지 않았다. 외국인 지분율도 30%가 채 되지 않았다. 높은 배당을 요구하며 위임장 대결 같은 실력 행사나 적대적 인수·합병 시도도 말 그대로 ‘설’만 있었을 뿐이다. 외려 배당은 적어도 고속성장에 따른 기업 가치 상승의 결과물인 주가 차익을 더 기대했다. 고인은 이런 기대에 부응해 배당을 줄여 마련한 유보자금으로 과감한 투자에 나섰다.

주주와 대화하고 때론 시장 눈치 봐야

앞으로도 삼성전자의 성장 스토리는 이어질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고인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시가총액이 300배 이상 불어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아이가 청년으로 성장하는 속도와 성숙한 청년이 장년으로 가는 속도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성장 속도가 느려진다면 시장의 요구도 달라질 것이고 이미 달라지고 있다.

‘나만 믿고 따라오라, 성과를 보여줄 테니’식의 경영은 통하기 어렵다. 흔히 말하는 주주 친화 경영을 넘어 적극적으로 주주를 설득하고 대화해야 할 필요성이 높아졌다. 이젠 총수도 자본시장의 눈치를 봐야 한다는 얘기다. 새 리더십에겐 불편할 수 있으나 다른 최고경영자(CEO)들-팀 쿡(애플), 제프 베이조스(아마존), 사티아 나델라(마이크로소프트), 순다르 피차이(구글) 최고경영자-은 일상적으로 하고 있다. 적어도 2015년 (옛)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추진할 때 국제 기관투자자들을 투기 세력으로 모는 ‘여론전’은 앞으로 유효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어쩌면 그때가 그럴 수 있는 마지막이었을지 모른다. 현대자동차그룹이 전방위적 지배구조 개편을 추진했다가 기관투자자들의 거센 반대에 밀려 백기를 든 건 그로부터 불과 3년이 지나서였다.

③ 그룹 총수와 삼성전자 CEO의 사이

고인은 ‘회장 비서실’(이후 구조조정본부, 전략기획실, 미래전략실, 사업지원티에프(TF)로 이름이 바뀜)을 통해 그룹 전체를 지배했다. 말 그대로 ‘총수’였다. 물론 고인은 큰 그림을 그리고 전문경영인이 각 계열사 경영을 관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옛 삼성그룹 법무팀장 김용철 변호사가 2007년 공개한 ‘회장 지시사항’이란 문건에 담긴 내용처럼, 기업 내 세부 사항에 회장이 관여한 것도 사실이다. 이런 경영 구조는 삼성 특유의 경영이라기보다 그 시절 재벌그룹들의 공통된 풍경이었다. 이 구조에선 총수의 강력한 카리스마가 요구되기도 한다. 고인은 이런 카리스마가 넘쳤다.

‘총수’라는 지위보다 ‘경영자’ 역할 중요

오늘날 각 사업 영역은 유기적으로 얽히면서도 전문화되고 있다. 이 흐름으로 보면 삼성 계열사가 영위하는 업종은 총수 1명이 모두 관할하기엔 너무 넓고 다양하다. 또 고인이 회장이 됐을 때 그룹 전체 자산 규모는 오늘날 주력 계열사 삼성전자 한 곳의 덩치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제는 삼성전자의 경영 성패가 삼성그룹 총수의 알파이자 오메가가 된 상황이다. 상법상 무의미한 ‘회장’이란 자리, 공정거래법상 ‘총수’(동일인)란 지위의 의미는 크게 퇴색했다. 시장은 걸출한 삼성전자 경영자로서 이재용 부회장이 거듭나길 바라는 분위기다. 고인처럼 큰 그림을 그리고 세부 경영은 전문경영인에게 맡기는 전략이 여전히 유효할지, 아니면 총수이자 삼성전자 대표로서 전자 경영을 일선에서 진두지휘하는 게 더 나을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이 역시 새 삼성을 이끄는 이재용 부회장의 선택 사항 중 하나다.

김경락 <한겨레> 기자 sp9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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