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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 배차해주는 이놈, 속을 모르겠네

배달 라이더들 “주행거리 100㎞에서 AI 배차 후 150㎞로 늘어나”
AI가 호출 배정, 보수 결정, 등급관리까지
등록 2020-10-31 09:53 수정 2020-11-02 02:02
2020년 8월 서울의 한 도로에서 배민라이더스 배달원이 잠시 멈춰서 있다. 연합뉴스

2020년 8월 서울의 한 도로에서 배민라이더스 배달원이 잠시 멈춰서 있다. 연합뉴스

이아무개씨의 휴대전화 배경화면 가족사진 위엔 ‘배달현황’ ‘대기’라는 잔상이 남아 있다. 특정 화면을 오래 띄워놓으면 화면에 그 자국이 남는 ‘번인’ 현상이다. 이씨는 하루 10시간 넘게 휴대전화에 뜬 배달목록을 바라보고 호출에 응한다. 그다음 음식점에서 음식을 받아 고객에게 가져다준다. 그는 배달음식 주문 플랫폼 ‘배달의민족’의 배달대행회사인 ‘배민라이더스’의 5년차 기사다.

‘노동자성’ 논란 일자 AI 배차 등장

배민라이더스 초창기부터 일한 이씨는 배민라이더스의 정책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몸으로 기억한다. 배민라이더스는 처음엔 월급제 기사를 쓰고 모자라는 인력을 일당을 주는 일용직으로 메웠다. 이씨는 일용직으로 일주일에 3~4일씩 일하다, 배민라이더스가 운영 방식을 ‘건바이건’(배달 건수대로 수수료를 받는 체계)으로 바꾼 뒤 본격적으로 ‘전업 라이더’가 됐다.

처음엔 시시콜콜한 부분까지 ‘지휘·감독’이 많았다. 출퇴근 시간이나 밥 먹는 시간이 정해졌고 지각하면 벌금이 있었다. 2019년 말 배달라이더의 ‘노동자성’ 논란이 생기자 이런 지휘·감독 요소는 제법 사라졌다고 한다. 그런데 이후부터 뭔가 꼬이기 시작했다는 게 이씨 주장이다. 일반인 라이더가 배민라이더스 같은 ‘직업 라이더’와 동일한 구조로 일하는 ‘배민커넥트’가 생기고, 배달 플랫폼 사이 ‘프로모션 경쟁’ 등에 따라 근무조건이 널뛰었다. 정점을 찍은 것은 2020년 2월 시작된 ‘인공지능(AI) 배차’다.

해당 지역에 배정된 호출 가운데서 특정 호출을 라이더가 골라 수행하는 일반 배차(이른바 ‘전투콜’)와 달리 AI 배차는 플랫폼이 적정한 라이더를 선택해 호출을 부여한다. 현재 배민라이더스는 일반 배차엔 건당 3천원을 지급하지만, AI 배차는 3500원을 지급한다. AI 배차를 장려하기 위한 프로모션인데 언제까지 지속할지는 모른다. 배달의민족을 운영하는 ‘우아한형제들’ 관계자는 “라이더들이 서로 배차를 따내기 위해 경쟁하면서 주행 중에도 휴대전화를 보는 등 안전 문제 발생이 우려됐다. 하지만 AI 배차로 배차 경쟁 없이 라이더가 배달 업무에 집중할 수 있어 라이더 안전에도 도움이 되는 것으로 판단한다. AI 배차 이후 배달 시간이 단축되고, 전체적으로 라이더들의 수입도 늘었다”고 했다.

AI 배차 이후 “최적 경로 짜기 힘들어”

이씨 생각은 다르다. AI 배차가 완전하지 않아 배차와 픽업-배송이 꼬인다고 했다. “내가 서울 강남·서초에서 일하는데, 주문이 들어간 음식점 근처에 라이더가 없을 리 없고, 내 근처에 콜이 없을 리 없는데도 AI가 현재 위치에서 2~3㎞ 이상 멀리 떨어진 콜을 준다. 배송을 마치고 나면 또 같은 방식으로 멀리 있는 콜을 준다. 예전에는 콜 50개를 수행하면 주행거리가 100㎞ 정도였지만, AI 배차 이후에는 150㎞ 이상 나온다. 주유비는 물론 오토바이 감가상각에 라이더 혹사까지 유발한다.”

완벽하지 않은 경로 안내 시스템도 라이더를 위험하게 한다. “음식을 픽업하면 고객에게 배달하기까지 남은 시간을 알려준다. 그런데 도저히 시간 내 배달할 수 없는 경우도 많다. 고객은 GPS(위성항법시스템)로 내 위치를 보고 있으니 교통법규를 위반하며 빨리 달릴 수밖에 없다.”(이에 대해 우아한형제들 쪽은 “라이더의 개별 환경에 따라 안내 시간이 촉박하게 주어지는 일이 종종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 지속해서 노력한다”고 밝혔다.)

음식 종류에 따라, 픽업지와 배송지에 따라 최적의 경로를 짜는 데 익숙했던 이씨에게 AI 배차는 자신을 “무감각”하게 한다. “AI 배차 이후 콜을 하나 뛰면 다음에 안 좋은 콜이 들어와도 수락할 수밖에 없다. 계속 거절하면 콜이 안 들어올 수도 있고, 다음에 언제 어떤 콜을 줄지 모르니까. 이를 통해 사람을 길들인다.”

주문 수요와 라이더 공급에 따라 배달 수수료가 결정되고 그 편차도 적지 않지만, 사람이 AI만큼 정확하게 배달 수요와 동료 라이더의 공급을 예측하긴 어렵다. 쿠팡이츠 라이더로 활동하는 박정훈 라이더유니온 위원장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10월24일 쿠팡이츠 앱 화면 갈무리를 보면, 서울 마포구의 배송 단가는 오후 4시42분부터 44분까지 1분 단위로 100원씩 떨어졌다. 박 위원장은 “3500원 배달 단가를 보고 집을 나섰다가 3400원으로 떨어진 것을 확인하고, 오토바이 시동을 걸면 3300원이 되는 현실”이라며 “플랫폼기업의 과학적인 알고리즘에 따라 노동자 임금이 실시간 변동한다. 알고리즘을 적절히 통제하지 못하면 노동자가 무한히 통제당한다”고 했다.

플랫폼노동에서 알고리즘이 관여하는 영역은 업무지시라 볼 수 있는 ‘호출 배정’과 ‘보수 결정’에만 있는 게 아니다. 인사평가에 해당하는 ‘등급관리’도 한다. 등록 대리운전 기사 수가 가장 많은 ‘카카오T대리’는 10월21일부터 ‘기사보상제도’라는 이름으로 콜을 많이 운행하는 기사에게 수수료를 지급하는 등급제도를 시범운영한다. ‘타다 대리’도 이용자로부터 평점을 높게, 많이 받을수록 기사 등급을 올려주고 이에 따라 추가 수수료를 지급한다.

“알고리즘에 관한 단체협약 필요해”

플랫폼노동자는 근로기준법의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지만, 알고리즘의 지휘를 받으며 평가와 보수를 받는다. 그래서 중요한 노동조건에 해당하는 알고리즘 공개와 변경에 대한 노동자들의 교섭 요구가 보장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근로기준법의 사용자가 노동조건이 담긴 취업규칙을 공개해야 하고, 취업규칙을 노동자에게 불리하게 개정하려 할 경우 노동자 과반수의 서면 동의를 받게 한 것과 유사하다.

박은정 인제대 교수(노동법)는 “대법원은 이미 운수회사에서 배차 행위는 업무명령에 속하므로, 노동조합과 사용자가 배차 기준을 합의해 정하기로 한 경우 단체교섭 대상이 된다고 판결한 바 있다. 대리운전기사도 대리운전 앱을 구동하는 알고리즘을 노동조건으로 보고 단체교섭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알고리즘에 관한 단체협약을 맺어 노동조건을 결정할 수 있는 게 당연히 가능하다”고 밝혔다. 박 교수는 이어 “배달노동자들이 일하는 중에 수수료가 변해 그 이유를 알려달라는 것은 기본이다. 이 과정에서 알고리즘의 불합리성, 차별적 성격 등이 발견된다면 당연히 변경을 요구해야 한다. 또한 수수료 결정에 관한 알고리즘이 바뀔 때는 그 변경 내용과 사유를 알려야 할 의무도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박태우 기자 eh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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