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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T 시대, 저작권 부자들의 반격…‘제2의 양준일’은 없다?

OTT 시대, 영상 콘텐츠를 축적해온 방송사와 디즈니 등 저작권 부자 회사들의 반격
등록 2020-01-09 02:06 수정 2020-05-07 04:32
가수 양준일이 2019년 12월31일 열린 팬미팅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가수 양준일이 2019년 12월31일 열린 팬미팅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야기’는 완연히 새로운 시대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언제 어디서든 볼 수 있다. 시청의 자유는 이야기의 자유다. 시간성을 벗어난다. 수십 년 전 이야기가 망각을 뚫고 되돌아온다. 공간성도 흐릿해진다. 남미 드라마부터 한국 드라마까지 지구 반대편 이야기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화면에 한데 뭉쳐 있는 게 자연스럽다.

‘이야기’의 탄생은 사실 별로 변한 게 없는 것처럼도 보인다. 보호받으며 이야기를 축적해온 거대 미디어 회사 소속 캐릭터 목록 안에서 대개 맴돈다. 전세계 이야기를 발굴해 제대로 포장할 수 있는 자본이 곧 힘이기도 하다. 미국을 중심으로 돈다. 공정한가? “꼭 그렇지는 않지만 피할 수는 없다.” 바람직한가? “아직은 좀더 지켜봐야 한다.” 전문가와 업계도 혼란스럽다. 1만원 남짓한 돈을 내고 주말을 OTT 앞에 온전히 바치고야 마는 일상이 자연스러운 시대, 울리고 웃기는 이야기는 어디로 향해가고 있는 걸까?

따뜻한 이야기.

“아 누군가 나를 바라보고 있고 내가 보이는구나. …내가 투명인간이 됐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어요. …대한민국이 나를 받아주는 따뜻함이 그걸 놓게 해줬습니다. 더는 과거가 나를 괴롭히지 않는 것 같아요.”(가수 양준일, JTBC <뉴스룸> 인터뷰)

30년 가까운 시간을 건너 잊고 있던 가수 양준일이 대중 앞에 섰다. 지상파 3사가 유튜브에 풀어낸 ‘어게인(Again) 가요 톱10’(KBS), ‘옛송TV’(MBC) 같은 1990년대 영상이 시작이었다. 관심이 불붙으며 ‘SBS 복고채널’(SBS)은 예능 출연 영상까지 더했다. 2000년대까지 영상 콘텐츠를 축적해온 지상파 방송사의 자원이 예기치 못한 힘을 발했다. 2019년 마지막 날 팬미팅, 마침내 모인 수많은 팬 앞에서 양준일은 <리베카>의 전주가 나오는 동안 흐느낀다. 시작은 지상파 영상이었지만 재발견에서 확산까지, 팬들과 다른 방송사들의 변주와 재창작이 이룬 결과다. 유튜브에 오른 주요 영상은 여전히 지상파가 제공한 것이지만 그의 가치가 엄격하게 독점되지는 않았다. 그를 주인공으로 한 팬 애니메이션 영상이 등장했고 부분 부분만 추린 팬미팅 영상도 올라왔다. 간간이 “이것도 저작권 문제가 될까요?” 걱정스러운 물음과 함께 올린 영상도 눈에 띈다.

복고는 새롭지 않다. 다만 퍼져나가는 모습이 좀 다르다. “재방송되지 않으면 시청하기 어려웠던 복고 콘텐츠들도 OTT 환경에서는 시청자 필요에 의해서 언제든지 시청할 수 있게 됐다. …구작의 가치 상승이 기대된다.”(유진투자증권, ‘콘텐츠 산업의 탑골공원 열풍, 라이브러리 가치 부각’) 이야기는 기술 덕에 시간을 넘나든다. 지난 시간을 되부르고 확산하는 과정 곳곳 평범한 시청자의 힘이 엿보인다. ‘이제는 정말 콘텐츠 소비자가 주도하는 세상’이라는 자신감이 붙는다.

냉혹한 이야기.

비슷한 시간, 세계 미디어 시장에서 복고는 좀더 야멸치다. 내 것 네 것 엄격히 구분한다. <오피스>(2013년 종영)나 <프렌즈>(2004년 종영) 같은 과거 미국 시리즈는 넷플릭스의 인기 작품 최상위 목록에 꾸준히 포함됐지만 언제까지 재생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세계 최대 콘텐츠 기업인 월트디즈니컴퍼니에 소속된 마블 영화와 픽사의 애니메이션, 내셔널지오그래픽 다큐멘터리도 차츰차츰 넷플릭스의 목록에서 빠진다. 2019년 11월 디즈니(디즈니플러스)를 시작으로 NBC유니버설(피콕, 2020년 예정), 워너미디어(HBO맥스, 2020년 예정)가 속속 자기만의 OTT를 꾸린다. 수십 년간 이야기를 만들어왔고, 합병하며 덩치를 키운 콘텐츠 공룡이 OTT 시장에 뛰어든다. 넷플릭스와 계약해 넘기기보다 자신들의 OTT를 강화하는 데 쌓아놓은 이야기를 쓸 요량이다. 넷플릭스는 넷플릭스대로 오리지널 시리즈의 독점적 제공에 집착한다. 당연했지만 잊고 있던 사실을 깨우친다. ‘이야기를 소유한 누군가 있었다.’

한때 TV 같은 기기가, 또 어떤 때 희소한 전파를 쥔 채널이 이야기를 소유했다. OTT가 주목받으며 한동안 이야기를 더 많이 모으고 더 쉽게 퍼트리는 플랫폼 기업이 주도권을 쥔 것 같았다. 약간의 환상이 끼어들었다. 매달 구독료 얼마를 내는 1억여 명이 모여, 이야기의 향방을 결정하는 시대가 왔다는. 플랫폼의 핵심인 넷플릭스가 홍보해온 논리이기도 했다.

대규모 미디어 기업의 OTT 시장 진출과 냉혹한 경쟁은 ‘이야기의 민주적인 결정이 착각이었을 수 있다’는 의구심으로 번진다. “결국은 C(콘텐츠), P(플랫폼), N(네트워크), D(디바이스) 사업자 사이의 긴장 관계였고, 희소성을 가진 쪽이 힘을 얻으며 엎치락뒤치락해왔다. 최근 기술을 기반으로 ‘번들링’(묶어 팔기)과 ‘구독’이라는 전략을 편 플랫폼 사업자 넷플릭스가 엄청난 성공을 거뒀지만, 콘텐츠 사업자들의 OTT 진출로 이번에는 콘텐츠를 바탕으로 한 플랫폼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김기홍 한성대 교수) 그 시간의 힘을 과시하듯 디즈니플러스가 출시와 함께 내놓은 작품은 스타워즈의 세계관을 활용한 <만달로리안>이다. 1977년 첫 시리즈가 나온 <스타워즈>를 변주할 수 있는 권리를 디즈니는 독점적으로 가지고 있다. <토이 스토리 4>의 ‘포키’, 마블 시리즈의 ‘팔콘’과 ‘윈터솔저’를 활용한 콘텐츠도 살뜰하게 제작 계획 목록에 포함했다. 기다리던 1천만 명이 출시와 함께 가입했다.

보호받는 이야기.

거대 기업들이 긴 시간 쌓아온 이야기가 OTT 시대에도 자산이 된다. 우연은 아니다.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와 함께 지식재산, 특히 저작권에 대한 신화를 전 지구적으로 차곡차곡 다져온 역사가 있다. “문화가 저작권 보호에 달려 있다거나 저작권법이 경쟁과 지식경제의 주된 원동력이라는 근본적인 믿음”(윌리엄 패트리, <저작권, 무엇이 문제인가>)이다. 어느 정도 타당하다. 다만 창조성을 보장하기 위한 저작권 보호 기간은 20세기 후반 들어 가쁘게 늘어났다. 그때마다 디즈니가 소유권을 가진 1928년생 미키마우스의 저작권 수명은 연장됐다. “처음 미국 의회가 저자들에게 부여한 저작권은 첫 14년 동안만 유효했다. 지금은 저자가 살아 있는 기간에다가 70년을 덧붙인다. …미키마우스가 저작권이 적용되지 않는 퍼블릭 도메인으로 이전돼야 할 때마다 저작권 적용 기간이 연장됐다는 볼멘소리도 터져나왔다.”(로런스 레식, <아이디어의 미래>)

세계화 흐름 속에 우리나라도 미국 수준에 맞춰 부지런히 저작권 보호를 강화했다. 세계가 함께, 이야기가 돈이 되는 시간을 연장했다. 수혜는 대개 거대 미국 기업이 입었다. 이전에 쥐고 있던 이야기의 세계관과 캐릭터를 활용한 재창작은 2000년대 이후 세계를 지배한 이야기의 동력이었다.

❶ 1928년 애니메이션 <증기선 윌리> 속 미키마우스. ❷ 미국 티브이 시리즈 <프렌즈>. ❸ 디즈니플러스 오리지널 시리즈 <만달로리안>. ❹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킹덤>. 한겨레 자료, 디즈니 누리집 갈무리, 넷플릭스 제공

❶ 1928년 애니메이션 <증기선 윌리> 속 미키마우스. ❷ 미국 티브이 시리즈 <프렌즈>. ❸ 디즈니플러스 오리지널 시리즈 <만달로리안>. ❹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킹덤>. 한겨레 자료, 디즈니 누리집 갈무리, 넷플릭스 제공

보편적 또는 획일적인 이야기.

독점해온 시간만 새로운 미디어 환경에서 힘을 발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OTT 절대 강자는 넷플릭스다. 이제는 오리지널 시리즈 제작자로 더 익숙한 넷플릭스는 자기들 이야기가 기존 미디어 기업들과 “다르다”고 말한다. “전세계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발굴하고 콘텐츠로 제작한다”(넷플릭스 보도자료)고 선 긋는다. 역사는 짧아도 1억5천만 명 가까운 전세계 구독자를 확보하고 이들의 데이터를 가지고 있다. 조선시대 배경인 <킹덤>,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중심인물 삼은 <더 크라운>을 앞세운다. 글로벌과 로컬을 합친 ‘글로컬리즘’이라고 하지만, 형태가 기묘하다. 콘텐츠의 배경 지역이 다양해졌지만, 결국 모두가 같은 콘텐츠를 본다. “넷플릭스의 플랫폼 위에서는 지역 콘텐츠와 글로벌 콘텐츠의 간격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획일화된 시장으로 그들을 포섭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정승애·임대근, ‘넷플릭스의 초국가적 유통 전략과 그 비판’)

반복되는 이야기.

긴 시간 축적한 콘텐츠를 독점적으로 활용해 시간을 넘나드는 거대 미디어 기업과, 제작 기반의 넓이를 강조하며 공간성을 획일화하는 거대 플랫폼 기업 사이, 경쟁이 치열하다. 다만 그래 봐야 미국 기업, 어쨌든 거대 자본이다. 우리 입장에서야 “OTT들은 치열한 경쟁으로 아시아 전역을 커버할 수 있는 한국 드라마가 필요해 한류 드라마 저작권을 보유한 제작사들에 이익이 될 것”(한국투자증권)이라는 기대 정도가 고개를 든다. 이렇게 보면 크기의 문제일 뿐 콘텐츠 산업의 번영과 갈등 구조는 별반 달라진 게 없다. 미국 자본을 중심으로 콘텐츠 산업은 이어지고, 부분적인 영향력이 있는 지역 콘텐츠가 플랫폼에 얹혀 나름의 이익을 챙긴다. 예술적 의미와 별개로 산업으로서 콘텐츠의 힘이 약한 유럽은 OTT 쿼터제(유럽 콘텐츠로 30% 이상 채울 것을 요구)를 주장하고 나온다. 앞서 영화 산업, TV 산업에서 볼 수 있던 익숙한 풍경이다.

다만 OTT에 얹히며 콘텐츠는 물리적인 시공간 제약에서 무한히 자유로워졌다. 역설적으로, 이제는 고루해질 법도 한 미국 거대 기업 OTT와 콘텐츠로의 쏠림이 한층 심화되기 쉬운 형태다. 각박하게 챙기는 이야기의 소유권 속에 우리 모두가 참여한 양준일의 재기 같은 따뜻한 이야기를 만날 일은 점점 드물어질까. 내 주말을 지배하는 이야기는 결국 내 것이 될 수 없는, 자본이 소유한 이야기로만 가득 차게 될까. 이야기를 둘러싼 조짐은 불안하기만 하다.

방준호 기자 whor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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