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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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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 민주화’ 로봇에 물어봐?

알고리즘 기반 투자 ‘로보어드바이저’ 금융권서 유행…

“투자 대중화 이끈다” vs “사소한 결함에도 대재앙” 엇갈린 평가
등록 2017-12-05 08:01 수정 2020-05-02 19:28
로보어드바이저 업체 에임(AIM)의 이지혜 대표가 지난 11월22일 서울 강남구 오토웨이타워 지하 2층의 구글 캠퍼스에서 열린 ‘스타트업 쇼케이스’ 행사에서 자산관리 서비스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정용일 기자

로보어드바이저 업체 에임(AIM)의 이지혜 대표가 지난 11월22일 서울 강남구 오토웨이타워 지하 2층의 구글 캠퍼스에서 열린 ‘스타트업 쇼케이스’ 행사에서 자산관리 서비스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정용일 기자

금융은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다. 돈 있는 사람이 없는 이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행위에서 권력은 본질적으로 가진 자에게 있다. 픽션이긴 하지만 셰익스피어의 희곡 은 이런 금융의 비민주성을 잘 보여준다.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은 결혼비용을 빌리러 온 바사니오에게 악랄하기 이를 데 없는 대출 조건을 제시한다. 살인적인 고금리에 덧붙여 바사니오의 절친인 안토니오의 살 1파운드를 담보로 요구한다. 사람의 생명을 볼모로 잡은 터무니없는 조건이지만 계약은 성사된다. 금융에서 주권은 돈을 가진 쪽에 있음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서민에게 더 가혹한 금융 세계

현실은 픽션보다 더 가혹하다. 2008년 미국 등 금융 선진국들을 강타한 금융위기의 최대 피해자는 ‘없는 사람들’이었다. 집 없는 서민들에게 주택을 담보로 돈을 빌려줘서 막대한 수수료를 챙긴 주택담보대출 업체와 이들이 양산한 부실채권을 사들여 증권화한 대형 은행들은 금융위기의 주범임에도 별 탈 없이 위기를 넘겼다. 오히려 대형 은행들은 더 많은 부를 움켜쥐었다. 반면 돈을 빌린 서민들은 산더미처럼 늘어난 빚을 짊어진 채 살던 집에서 내쫓겼다. 이들의 잘못이라면, 정부와 주택담보대출 업체의 ‘빚내서 집 사라’는 감언이설을 따른 것뿐이었다. 가진 자의 잘못으로 발생한 피해를 합법적으로 없는 자에게 고스란히 뒤집어씌우는 것은 금융의 세계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최근 ‘4차 산업혁명’의 총아로 금융계에서 유행하는 로보어드바이저(robo-advisor)는 이런 비정한 금융의 세계에서 일반 대중을 위한 금융 서비스를 하겠다고 기염을 토한다. 거액 자산가의 전유물이던 프라이빗뱅킹(은행이 거액 자산가의 자산을 종합 관리해주는 서비스)을 서민에게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방법은 미리 짜인 알고리즘을 이용하는 것이다. 시장과 고객에 대한 각종 데이터를 분석해 만든 알고리즘이 몸값 높은 금융 전문가를 대체할 수 있기에 자문료와 최소 투자 한도 등의 진입장벽을 크게 낮출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의 주관적 판단과 감정 등을 최대한 배제하기 때문에 프라이빗뱅킹보다 일관되고 체계적인 자문이 가능하다. 여기에 인공지능(AI)이 본격적으로 접목되면 프라이빗뱅킹보다 뛰어난 서비스를 훨씬 싼값에 제공할 수 있다. 바야흐로 로보어드바이저로 투자의 대중화를 이끌고, 급기야 “금융의 민주화로 나아갈 수 있다”(미국 AI 개발기업 아리스인텔리전스의 후왕 세스 공동대표, 10월25일 ‘2017 미래투자포럼’ 강연)는 것이다.

인간의 주관적 판단 배제한 투자
2011년 10월 미국 뉴욕 중심가에서 열린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 시위 모습. 로보어드바이저는 소득 상위 1%를 위한 자산관리 서비스를 일반 대중에게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연합뉴스

2011년 10월 미국 뉴욕 중심가에서 열린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 시위 모습. 로보어드바이저는 소득 상위 1%를 위한 자산관리 서비스를 일반 대중에게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연합뉴스

지난 11월22일 서울 강남구 구글 서울캠퍼스에서 열린 스타트업 설명회에서 단연 화제가 된 것은 로보어드바이저였다. 구글이 선정한 ‘싹수 있는’ 6개 벤처기업 가운데 로보어드바이저 기반 자산운용사인 에임(AIM)이 단연 주목을 받았다. 12월부터 본격적으로 서비스를 시작하는 에임은 기존 프라이빗뱅킹을 이용할 때 드는 비용의 100분의 1 수준으로 자산관리 서비스를 제공한다. 최소 투자 한도가 500만원으로 웬만한 급여생활자도 투자할 수 있다. 미국 뉴욕의 월가 출신인 이지혜 대표는 “2008년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무엇이 좋은 투자인지 고민했다. 투자의 대중화에 기여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하지만 장밋빛 전망만 있는 게 아니다. 로보어드바이저도 사람이 설계하기 때문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로보어드바이저와 같은 알고리즘에 기반한 투자는 미국에서 이미 30여 년 전부터 시작됐다.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이종우 IBK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알고리즘에 의한 투자는 과거 데이터를 분석하기 때문에 새로운 사건이 터지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 미국의 대표적 로보어드바이저 업체 가운데 하나인 베터먼트(Betterment)는 2016년 국제 금융시장을 뒤흔든 브렉시트(Brexit) 당시 큰 수모를 당했다. 유럽연합(EU) 탈퇴라는 아주 뜻밖의 결정을 내린 영국 국민투표 결과가 나온 6월24일 반나절 동안 ‘먹통’이 된 것이다. 이날 하루 동안 미국 S&P 500 지수는 3.2%나 떨어졌다. 베터먼트에 돈을 맡긴 손님들은 막대한 손해를 봤지만, 사전에 회사 쪽으로부터 아무런 통보를 받지 못했다. 베터먼트는 이후 주식거래가 중단된 것에 ‘컴퓨터 버그가 아닌, 정상적인 기능’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베터먼트가 전혀 예상치 못한 사건을 당한 뒤 그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해 발생한 현상으로 풀이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 금융 당국이 로보어드바이저 감독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로보어드바이저의 알고리즘이 어떤 목적으로 설계되고 무슨 변수를 쓰는지 등 세부적인 내용을 공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로보어드바이저는 손님이 정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제대로 질문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또 포트폴리오 구성 자산의 잠재적 위험성을 충분히 설명하지 않거나 고의로 숨길 수도 있다. 이 밖에 난해한 알고리즘의 특성 때문에 여러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따라서 로보어드바이저의 알고리즘은 주기적으로 관리·감독해야 한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는다.

알고리즘 결함 땐 대혼란 우려

미국은 2008년 금융위기 때 알고리즘을 ‘맹신한’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부실채권인 주택저당증권(MBS)을 팔기 위해 은행들은 최신 알고리즘을 써서 MBS를 안전한 금융상품으로 교묘하게 둔갑시켰다. MBS의 위험 등급을 수학적으로 복잡해 보이도록 설계해 매수자가 위험 수준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MBS 등급 평가에 따른 막대한 수수료를 노린 스탠더드앤드푸어스, 무디스, 피치 등 신용평가회사들도 공범이었다. 이를 알 리 없는 다른 금융회사들은 알고리즘이 MBS의 위험을 제대로 분석했을 것으로 믿고 ‘폭탄 돌리기’에 참여했다. 폭탄이 터지자 거래에 참여한 금융회사들은 줄도산을 했고, 결국 미국 금융시장 전체가 큰 타격을 받았다.

로보어드바이저의 활성화에 따른 시장의 쏠림도 경계 대상이다. 로보어드바이저 간 경쟁이 심화되면 알고리즘 자문 결과가 한쪽으로 수렴될 가능성이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1987년 미국의 ‘블랙먼데이’ 같은 대혼란이 일어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블랙먼데이의 원인은 포트폴리오 보험이라는 ‘원시적인 알고리즘’이었다. 투자자들이 주가가 떨어질 경우에 대비해 미리 주식선물을 매도해놓고, 주가가 하락하면 그 손실을 선물 매도로 메우려는 전략이었다.

위험을 회피하려는 전략은 오히려 주가 하락이 시작되자 위험을 가속화했다. 투자자들이 붕괴되는 시장에서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선물을 매도하기 시작했는데, 이 때문에 현물 주식가격도 같이 떨어진 것이다. 이런 시장 변동은 포트폴리오 보험에 가입한 투자자가 더 많은 주식을 팔도록 유도했다. 위험을 피하려는 투자자의 선택이 한쪽으로 쏠리면서 전체 시장의 붕괴를 촉발한 셈이다.

알고리즘에서 발생한 결함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시장의 대혼란으로 이어질 수 있다. 2010년 5월6일 미국 증시의 갑작스러운 폭락장으로 시가총액 1조원이 증발한 사건이 대표적이다. 이날 한 증권사가 보유 중인 포트폴리오를 헤지하기 위한 알고리즘을 설계하는 과정에서 실수를 저질러 다우존스 지수가 수분 만에 9% 떨어졌다가 회복하는 극심한 변동성을 보였다.

로보어드바이저 예찬론자들은 이런 시장의 변동성에 충분히 대처할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국내 1호 로보어드바이저 업체인 쿼터백자산운용 조홍래 최고투자책임자(CIO)는 “로보어드바이저는 기존 시스템 트레이딩 같은 컴퓨터 프로그램 투자와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말했다. 이지혜 에임 대표는 “시장 평가뿐만 아니라 고객의 요구에 따라 포트폴리오를 구성하기 때문에 변동성에 결코 취약하지 않다”고 말했다. 로보어드바이저로 인해 블랙먼데이 같은 대재앙이 발생할 일은 절대 없다는 것이다.

금융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하지만 국내 로보어드바이저 업체의 실적은 장밋빛 전망과 거리가 있다. 출범 2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대부분의 업체가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다. 선두 주자로 꼽히는 쿼터백자산운용도 2017년 2분기 기준 7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가 개인 자산을 투자해 만든 디셈버앤컴퍼니도 같은 기간 5억원의 영업손실을 냈다. 국내 로보어드바이저 업체들의 평균수익률은 코스피(KOSPI) 평균 상승률을 밑돈다. 반면 미국은 로보어드바이저가 시장 수익률보다 1.5% 이상 앞선다.

로보어드바이저 업체들은 실적이 부진한 이유를 규제 탓으로 돌리고 있다. 현행 자본시장법이 판매자의 직접 설명 없이 온라인으로 계약하는 ‘비대면 투자일임’을 금지하기 때문에 수수료 등의 비용을 줄이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운용자산 규모가 적어 실적을 올리는 데도 한계가 있다는 설명이 뒤따른다. 조홍래 이사는 “쿼터백의 경우 운용자산이 1800억원인데 지금보다 두 배 정도는 돼야 본궤도에 오를 것”이라고 말했다.

규제 탓만 하는 것은 로보어드바이저의 미래에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로보어드바이저 업체가 구체적인 실적을 보여줘야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결국은 로보어드바이저를 운용하는 사람의 능력이 중요하다.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열쇳말
로보어드바이저(robo-advisor)는 2002년 미국 언론에서 처음 사용된 용어다. 자동화를 의미하는 로봇(robot)과 투자 전문가를 의미하는 어드바이저(advisor)의 합성어다. 아직까지 명확하게 합의된 정의는 없지만, 대체로 사람 대신 컴퓨터가 알고리즘으로 포트폴리오 관리를 수행하는 온라인 자산관리 서비스를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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