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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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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말은 뻥이 아니다

한-미 FTA 공식 폐기 엄포한 트럼프의 속내와

한국 정부의 우려스러운 협상 전략과 태도
등록 2017-09-12 08:29 수정 2020-05-02 19:28
청와대사진기자단

청와대사진기자단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정말 없어지는 것일까? 지난 9월2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또다시 ‘한-미 FTA 폐기’를 입에 올렸다는 사실이 미국 일간지 를 통해 알려졌다. 내용은 구체적이었다. ‘이르면 다음주에 공식적인 폐기 절차에 돌입’하겠다는 것이다. 시기도 의미심장했다. 한국과 미국 정상이 40분간 전화로 북한 도발에 대응해 양국 군사 공조를 강화하자고 결의한 바로 다음날이었다. 미국의 요구로 한-미 FTA 개정 협의(한-미 FTA 공동위원회 특별회기)가 열린 지 열흘밖에 안 된 시점이기도 했다. 한-미 FTA 폐기 발언이 있던 바로 다음날 북한은 축포라도 쏘듯 6차 핵실험을 감행했다.

협정 내용에 관심 없는 트럼프

한-미 FTA는 한국과 미국 중 어느 한쪽이 끝내자고 마음먹으면 특별한 사유 없이 끝낼 수 있다. 상대국에 통보하면 180일 후 종료된다. 더욱이 (이견이 있기는 하지만) 현재 트럼프 대통령에게는 미 의회의 동의 없이도 한-미 FTA를 끝낼 권한이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트럼프가 누구인가? 대통령선거 후보 시절 통상협정을 “찢어발기겠다”(rip off)고 공약했고, 실제 취임하자마자 행정명령 하나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서 탈퇴하고,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재협상을 시작한 이다.

그럼에도 한국 분위기는 대체로 차분했다. 대다수 언론은 트럼프가 장사꾼 기질을 발휘해 엄포를 놓는 것뿐이라고 분석했다. 청와대도 미국으로부터 한-미 FTA 폐기에 관한 정식 통보를 받은 적 없다고 선을 그었다. 실제 한-미 FTA 폐기 발언이 있은 지 나흘 뒤인 9월6일 미국 통상전문지 는 트럼프 정부가 ‘당분간 한-미 FTA 폐기 논의는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미국 의회에 전달했다고 보도했다. ‘그럼 그렇지’ 하는 반응이 뒤따랐다. 미국 의회, 상공회의소, 농축산업계 등의 강한 반발과 북한 6차 핵실험이 트럼프의 입장 변화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분석도 곁들였다.

정말 트럼프가 며칠 뒤면 번복할 ‘뻥’을 친 것인가, 아니면 정말 한-미 FTA를 없애려는 마음이 있는 걸까? 대체 트럼프의 속내는 무엇인가? 트럼프는 한-미 FTA 내용을 잘 모른다. 한-미 FTA에는 시한이 있다는 둥 그동안 트럼프가 쏟아낸 ‘무식한’ 발언이 이를 잘 보여준다.

사실 트럼프는 한-미 FTA 내용에 관심 없다. 한-미 FTA가 그동안 미국에 얼마만큼 이익을 주었는지도 그의 관심사가 전혀 아니다. 트럼프의 관심은 앞으로 어떻게 한-미 FTA를 뜯어고쳐야 자신의 지지 기반인 전통적 제조업 종사 백인 남성 노동자들이 환호할까에 있다. 한-미 FTA를 이들의 입맛대로 뜯어고치지 못할 바에야 없애버리는 게 트럼프의 정치적 이익에 더 부합한다. 그는 지난 4월 영국 통신사 와의 인터뷰에서 “끔찍한 한-미 FTA를 재협상하거나 종료하길 원한다”고 말했다. 이는 한-미 FTA의 개정 또는 폐기 중 양자택일만 가능하다는 선언이었다.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가 한국에 한-미 FTA 개정 협의를 요청하면서 “우리는 더 잘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 한다”(We can and we must do better)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트럼프 목표는 바꾸는 것 그 자체

한국 정부는 트럼프가 한-미 FTA를 오해해서 그런 것이니 이를 풀어주면 된다는 전략으로 대응하고 있다. 김현종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은 지난 8월22일 국회에서 “한-미 FTA를 현행대로 유지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면서 미국에 한-미 FTA가 이익을 주는 협정이라는 점을 잘 설명하겠다고 발언했다. 그러나 애초 한-미 FTA 내용에 관심 없는 트럼프에게 이 전략이 통할 리 만무하다. 한국의 이런 전략을 확인한 트럼프가 한-미 FTA 폐기를 외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트럼프의 한-미 FTA 폐기 발언이 결코 ‘뻥’이 아닌 이유다.

트럼프의 오해를 불식시켜 한-미 FTA를 유지하겠다는 김현종의 통상 전략은 이미 실패했다. 정교한 논리와 통계를 동원해 한-미 FTA가 그동안 미국에 얼마나 이익이 됐는지 설명해도 상황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개정이든 폐기든 현 상태를 바꾸는 것 자체가 목표인 상대방에게 현 상태도 좋다고 설득해봐야 먹힐 리 없다. 트럼프는 ‘그래도 더’를 외칠 것이다.

우리의 협상 전략은 지금이라도 수정해야 한다. 어떻게? 우리도 트럼프처럼 개정 또는 폐기 중 양자택일을 하면 된다. 협상 테이블에 앉아 상대국이 뭘 원하는지 듣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말하면서 개정하면 될 일이다. 그러다 합의에 이르지 못하면 폐기도 고려해볼 수 있다. 먼저 폐기를 입에 담은 것은 트럼프이므로 외교적 부담은 미국이 더 많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미국의 요구와 논리가 무엇인지 확인해 대응논리를 개발하고, 우리 입장에서 요구할 협상 의제를 고르는 것이다. 당연히 협상 의제는 통상교섭본부의 닫힌 문 안에서가 아니라 촛불이 밝혀진 광장에서 나와야 한다.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은 8월28일 국회에서 역사에 남을 거짓말을 했다. 미국이 한-미 FTA 공동위원회 특별회기에서 협상 의제를 밝혔냐는 손금주 국민의당 의원의 질문에 “아니요”라면서 “(미국의) 무역 적자를 줄이는 방법에 대해 한국이 아이디어 좀 내줬으면 좋겠다는 수준이었다”고 답한 것이다. 미국 무역대표부는 발끈했다. 미국 언론에 미국은 이미 한국에 미국산 농산물 관세 즉시 철폐 등 구체적 협상 쟁점을 제시했다고 슬쩍 흘린 것이다.

이 거짓말을 막지 못하면

이 거짓말은 앞으로 있을 한-미 FTA 개정 협상의 예고편이다. 이 거짓말을 막지 못하면, 촛불 광장에서 우리의 협상 의제가 나올 수 없다. 이 거짓말을 막지 못하면, 우리가 원하는 것은 과연 어떤 한-미 FTA인지 논의조차 할 수 없다. 이 거짓말을 막지 못하면, 한-미 FTA는 결국 트럼프의 입맛대로 개정될 것이다.

노주희 변호사·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국제통상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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