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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훈련 말고 현금이라니까요

대통령 공약 ‘청년고용촉진수당’, 추경안에서 쪼그라들어…

내년 예산안에선 생활 보장 수당으로 재설계돼야
등록 2017-06-22 05:00 수정 2020-05-02 19:28
2016년 10월6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취업박람회장에 취업준비생들이 들어가고 있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2016년 10월6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취업박람회장에 취업준비생들이 들어가고 있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차분하고 단호한 호소였다.

“한 청년이 말합니다. ‘제발 면접이라도 한번 봤으면 좋겠어요.’ 실직과 카드빚으로 근심하던 한 청년은 부모에게 보낸 마지막 문자에 이렇게 썼습니다. ‘다음 생에는 공부를 잘할게요.’”

33번 ‘청년’ 호명하며 야당 설득

지난 6월12일 문재인 대통령이 국회에서 한 ‘2017년도 추가경정예산안’ 시정연설의 실질적 ‘화자’는 청년이었다. 구직난과 열악한 일자리에 시달리는 청년들이 마치 국회의원에게 ‘우리는 11조2천억원 규모의 추경예산안이 통과되길 바란다’고 직접 말하는 듯했다. 청년실업률, 구직단념자 수 같은 뭉뚱그린 통계에 가려진 청년 각자의 고된 삶이 도드라지는 순간이었다.

휴대전화 생중계로 시정연설을 지켜보던 백지연(21)씨는 “대통령이 내 마음을 알아주는구나” 하는 생각에 울컥했다. 그 역시 특성화고 졸업 뒤 아르바이트하며 취업을 준비하고 있지만, 원서를 내도 면접 보러 오라는 곳은 별로 없었다. “내 이야기 같았어요. 청년 일자리에 초점을 맞춘다니 기대도 됐고요.”

문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는 이동수(29)씨도 기대가 생겼다. “메마른 땅에 단비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청년을 많이 언급한 점에는 큰 감흥이 없었지만 (정책) 내용이 긍정적이었어요.”

차갑게 얼어버린 청년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문 대통령이 지금까지 보여온 일관된 태도였다. 문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부터 “함께 눈물 흘리는 친구 같은 대통령이 되겠다” “혼자 사는 청년의 가족이 되겠다”며 청년의 벗과 식구를 자처해왔다.

취업준비생 이우연(26)씨는 “문 대통령은 예전부터 청년들과 스킨십을 자주 해왔다. 그의 행동이 (다른 정치인과 달리) 일회용 퍼포먼스가 아니라 진정성 있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청년층은 문 대통령을 호의적으로 바라본다. 지난 대선에서도 20대 47.6%, 30대 56.9%(5월9일 지상파방송 3사의 대선 출구조사)가 문 대통령에게 표를 던졌다. 문 대통령의 평균득표율(41.1%)보다 훨씬 높다.

문 대통령이 국회에서 33번이나 ‘청년’을 호명한 데는 청년 일자리가 최우선 국정 과제라는 소신 외에도,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의 파행으로 꽉 막힌 추경 정국을 돌파하겠다는 전략적 계산이 녹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유창선 정치평론가는 “야당이 추경안 처리에 부정적인 상황에서 청년 문제는 야당을 설득할 수 있는 중요 의제”라며 “절박한 청년 문제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넓기 때문에 야당이 (추경안에) 반대하기에는 곤란한 처지”라고 말했다.

취업 최우선 삼는 ‘취성패’ 근본적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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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을 위한 추경안’이 국회에서 통과되면 청년의 삶은 좀 나아질까. 이번 추경안에는 청년 관련 정책이 다양하게 담겼다(상단 표 참조). 하반기에 청년이 선호하거나 많이 찾는 공무원과 사회서비스 일자리를 3만6천 개 늘리고, 청년 채용 중소기업에 재정 지원을 확대하겠다는 것이 정책의 뼈대다.

이 가운데 ‘청년구직촉진수당’은 대선 기간부터 청년들의 큰 관심을 모았던 문 대통령의 대표 공약이다. 애초 문 대통령은 미취업 상태인 만 18~34살 청년에게 최대 9개월간 월 30만원씩 지급하겠다고 했다. 공약집에는 청년구직촉진수당이 아동수당(신설)·기초연금 등과 함께 ‘생애맞춤형 소득보장체계’로 나란히 소개된 덕에 청년에게도 사회수당이 생길 것이란 기대가 나왔다. 아동수당과 기초연금이 특정 계층에 현금을 지원하는 사회수당 성격을 띠기 때문이다.

모든 청년에게 지급되는 사회수당까지는 아니더라도 일부 지방자치단체에서 시행하는 ‘청년수당’ 정책이 전국적으로 확대될 거란 기대도 많았다. 특히 주목받은 것은 서울시 청년수당 모델이었다. 모든 청년(만 24살)에게 조건 없이 연 100만원을 지급하는 경기도 성남시의 부분적 기본소득제도인 ‘청년배당’ 모델보다, 가구소득과 미취업 기간을 기준으로 일정 수의 청년(만 19~29살)을 선발해 취업준비 비용과 생활비로 6개월 동안 월 50만원을 주는 서울시 청년수당 모델을 문재인 정부가 벤치마킹하지 않겠느냐는 언론과 청년단체들의 관측이 쏟아졌다.

기대와 전망은 모두 엇나갔다. 추경예산안에 포함된 청년구직촉진수당은 새로운 청년수당이 아닌 기존 ‘취업성공패키지’(취성패) 과정에 지급되는 수당의 하나로 쪼그라들었다. 취성패는 2009년 만 18~64살 취업취약계층에 고용과 현금급여 지원을 목적으로 탄생한 고용 지원 프로그램이다. 이 제도의 혜택을 받는 대상자는 2011년 기초생활수급자·차상위 이하 저소득층·결혼이민자 외에 청년으로도 확대됐다.

취성패는 청년이 직업심리상담을 통해 개인별 취업활동계획을 세우는 1단계(1개월), 직업훈련과 창업 프로그램 등으로 직업 능력을 쌓는 2단계(6개월), 취업 알선을 받는 3단계(3개월)로 진행된다. 현재 1단계에는 참여수당 15만~20만원, 2단계에는 훈련참여수당 월 40만원이 지급되지만, 3단계에는 별도 수당이 없다.

현재 비어 있는 3단계 ‘취업알선참여수당’을 청년구직촉진수당으로 메우겠다는 것이 정부안이다. 구체적으로 올해 취성패에 참여하는 청년을 16만 명에서 19만5천 명으로 늘리고, 총수당도 1인당 최대 260만원에서 350만원으로 올려주겠다는 계획이다.

문재인표 청년고용촉진수당에는 여러 문제가 있다. 우선 지급 기간과 금액이 약속보다 줄어들었다. 문 대통령의 선거 공약은 ‘최대 9개월간 월 30만원씩’이지만, 이번엔 ‘3개월간 월 30만원씩’만 반영됐다. 문 대통령은 시정연설에서 “내년도 예산에서는 더 본격적으로 실시할 수 있을 것”이라며 지원 확대를 시사했다. 그러나 취성패의 3단계인 취업 알선 과정은 3개월간 진행되므로, 3단계 참여수당인 청년구직촉진수당이 대폭 늘어나긴 어려운 구조다.

무엇보다 취성패는 청년들의 다양한 취업 활동과 생활 여건을 뒷받침하기엔 태생적 한계가 많다. 이 프로그램의 최우선 목표는 청년의 빠른 취업이다. 1년 남짓한 기간에 민간 위탁업체를 통해 진로상담, 직업훈련, 취업알선이 쉼없이 이어진다. 취업성공률도 높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참여자의 취업률은 2012년 55.3%에서 출발해 2015년 70.3%로 뛰었다. 비밀이 있다. 직업훈련은 웹디자인·캐드(CAD·컴퓨터 지원설계)·전산세무회계 등 취업이 잘되는 자격증 취득 과정에 집중되고, 실적에 목맨 위탁업체는 참여자에게 저임금의 열악한 일자리까지 적극적으로 알선한다.

단순 고용정책 아닌 사회보장정책 관점 필요

수도권 4년제 대학에 다니는 고아라(24·가명)씨는 6월 들어 취성패 1단계를 밟고 있지만 2단계는 들어가지 않을 생각이다. “사무직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에게 (직업훈련이) 큰 도움이 될 거 같지 않아요. 처음부터 (1단계) 상담만 받아도 참여수당 15만~20만원을 준다고 해서 참여했어요.”

고씨처럼 상당수 청년들은 정부 고용 지원 프로그램에 들어가기를 원하지 않는다. 한국의 양극화된 노동시장을 똑똑히 지켜봐온 청년들은 몇 년이 걸리더라도 공무원, 공기업, 대기업 같은 안정된 직장에 들어가겠다는 목표를 세운다. 그만큼 스펙도 치열하게 쌓고 있다. 이들에게 필요한 건 직업상담과 직업훈련이 아니라 영어학원비와 교재비·교통비·식비·월세보증금·공과금이다.

청년들이 오랜 구직 기간을 버틸 수 있도록 자율적으로 쓸 현금 지원을 바란다는 통계도 있다. 지난해 8월 서울시로부터 한 달간 50만원의 청년수당을 받은 969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청년들은 수당을 학원비·교재비 등 직접비용(39.9%), 식비·교통비·공과금 등 생활비(22.3%), 응시료·사진촬영비 등 구직 비용(16.7%), 세미나 모임 등 간접비용(13.3%)에 썼다고 응답했다.

청년단체들도 특정 고용 지원 프로그램에 참여한 대가로 일부 청년에게만 지급되는 청년구직촉진수당에 우려의 목소리를 높인다. 김영민 청년유니온 정책팀장은 “이번 수당은 오로지 취성패 3단계까지 온 청년만이 지급 대상자다. 더군다나 (주 30시간 이상 아르바이트한다는 이유로) 일하는 저소득 청년은 취성패 대상에서 제외되고 있다. 우리는 이를 청년구직촉진수당으로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추경안을 심사하는 국회 예산결산위원회에서도 어설픈 청년구직촉진수당을 둘러싼 논란이 빚어질 가능성이 크다. 예결위원인 윤소하 정의당 의원실은 청년구직촉진수당이 부실한 취성패와 연계되고, 지원 금액마저 적게 책정된 이유를 정부에 따져 물을 계획이다.

문재인 정부도 재설계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새 제도를 올해 추경안에 반영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다”며 “각 부처의 의견이 다르지만 (고용노동부에선) ‘자기주도적 구직 활동을 하는 청년 전체를 지원하겠다’는 (문 대통령의) 공약 취지를 담기에 취성패 제도가 제한적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고 설명했다.

문재인 정부는 유럽의 경험을 참고할필요가 있다. 유럽연합(EU)은 2013년 재정 지원을 전제로 ‘청년보장제’(The Youth Guarantee) 프로그램을 수립하라고 회원국에 권고했다. 재정위기 여파로 유럽에서 청년실업자와 니트족(취업·교육·훈련을 받지 않는 청년)이 급증하던 때였다.

프랑스가 가장 적극적이었다. 지난 2월부터 청년보장제를 전면 실시하는 프랑스는 18~25살 청년이 1년 동안 개인 면담, 일자리 실습 등 관리·지원을 받는 계약에 동의하면 취업준비 비용과 생활비 명목으로 월 461유로(약 58만원)를 지원한다. 계약은 한 차례 더 연장할 수 있다. 교육·주거·노동 문제가 다층적으로 얽힌 청년 문제를 단순한 고용정책이 아니라 사회보장정책 관점에서 풀어야 한다는 철학을 읽을 수 있다.

8월 말까지 시간 있다

한국의 상황은 유럽보다 더 심각하다. 정부가 인정한 체감청년실업률이 23.4%까지 치솟았고, 니트족도 10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도 청년보장제는 여전히 낯선 개념이다. 서울시가 2015년 처음 일자리(일경험)·설자리(사회참여활동)·살자리(주거)·놀자리(공유공간) 등 다양한 영역을 포괄하는 ‘서울시 청년보장제’를 들고나오긴 했다. 그러나 다양한 활동을 지원하는 청년수당이 박근혜 정부의 반대로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면서 청년보장제는 빛을 보지 못했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위원은 “단 6개월, 1년이라도 청년들이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도록 동등한 시간과 기회를 줘야 한다. (청년수당 비용은) 중앙과 지방정부가 매칭해 마련하면 된다. 이는 청년에 대한 배려나 시혜가 아닌 ‘보장’이다”라고 말했다. 추경안은 이미 끝났지만 내년도 예산안 편성 시한인 8월 말까지는 시간이 있다. 청년들이 원하는 청년정책을 만들 기회도 아직 남아 있다.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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