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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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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과 LG ‘또 하나의 약속’

LG디스플레이 “업무연관성 따지지 않고 암·희귀질병 보상”

반올림, 삼성전자 반도체 직업병 보상 이견으로 노숙농성 600일 넘겨
등록 2017-06-08 11:18 수정 2020-05-02 19:28
서울 서초구 서초동 삼성전자 본관 앞에서 ‘반올림’이 노숙농성을 벌인 지도 600일이 넘었다. 농성 603일을 맞은 지난 5월31일 농성장 모습. 류우종 기자

서울 서초구 서초동 삼성전자 본관 앞에서 ‘반올림’이 노숙농성을 벌인 지도 600일이 넘었다. 농성 603일을 맞은 지난 5월31일 농성장 모습. 류우종 기자

1980년생 박지영(가명)씨와 김기남(가명)씨.

두 사람은 대한민국 최대 대기업의 공장에서 일했다. 지영씨는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취직한 삼성전자 경기도 용인 기흥공장과 충남 천안공장에서 방진복을 입고 액정표시장치(LCD) 패널에 컬러 감광제로 색 입히는 일을 했다. 그러다가 2004년 태반의 세포가 포도송이처럼 커지는 악성 포상기태에 걸렸다. 몇 년 뒤 백혈병까지 지영씨를 덮쳤다. 기남씨는 대학교 졸업 뒤 2005년 LG디스플레이에 장비를 공급하는 하청업체에 엔지니어로 취업했다. 그는 경기도 파주 LG디스플레이 공장 생산라인에 장비를 조립해 설치하고 수시로 프로그램 유지·보수하는 일을 맡아 하루 12시간 넘게 공장을 지켰다. 그러다가 2009년 뇌종양에 걸렸다.

포상기태·백혈병·뇌종양…

두 사람은 늘 벤젠 등 화학물질이나 전자기파에 노출되는 업무 환경에서 일했다. 장시간 노동과 업무 스트레스도 심했다. 그러나 업무상 재해로 인정받지 못했다. 회사로부터는 어떤 지원도 없었다. 몇 년간의 투병 생활을 견디다 못해 지영씨는 2010년, 기남씨는 2012년 하늘나라로 떠났다.

어머니들은 아직도 자식이 처음 아프다고 했던 그날의 기억이 또렷하다. 2004년 어지럽고 몸이 붓는다며 휴가를 내고 집에 온 지영씨는 잘 먹지도 못했다. 그런데 회사에서는 빨리 사표를 쓰라고 독촉했다. 결국 지영씨는 집이 있는 천안에서 다시 기흥 공장까지 올라가 사표를 쓰고 기숙사에 있던 짐을 뺐다.

그날 밤 병원에 입원한 지영씨의 발은 퉁퉁 부어서 신발이 잘 들어가지도 않았다. 물 한 모금 못 마시던 지영씨는 병원에서 입으로는 위액을, 몸 아래로는 피를 쏟아냈다. 몇 년간 통원치료를 계속했지만, 나아지기는커녕 더 나빠졌다. 2010년 백혈병을 진단받았지만 지영씨는 치료를 거부했다. “엄마, 내가 인터넷으로 알아봤는데 골수 이식 안 하고 그냥 머리 긴 예쁜 모습으로 갈래. 그동안 병원비 때문에 우리 집도 날렸잖아.” 제대로 손써볼 새도 없이 지영씨는 백혈병 진단 석 달 만에 눈을 감았다.

2009년 4월, 기남씨는 경기도 파주에 있는 병원에서 자기공명영상(MRI)을 찍고 며칠 뒤 대구 고향집으로 내려왔다. 이미 뇌에 생긴 종양이 운동신경을 눌러서 오른쪽 팔다리가 마비된 상태였다. 해병대 출신의 건장했던 아들은 운동신경 마비로 인해 말을 잘하지도 입술을 움직여 음식을 잘 씹지도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기남씨 어머니는 밥을 숟가락으로 떠먹이고 대소변을 받아내며 아들 재활치료에 힘썼다. “자식 살리겠다”는 마음에 한 달에 수백만원 들어가는 약값이며 병원비는 빚내가며 막았다.

가슴에 묻은 자식이 안타까운 꼭 그만큼 어머니들은 자식의 죽음이 억울하다. “2011년 회사에 보상비 지원 서류를 냈어요. 그때는 이유도 설명해주지 않고 ‘안 된다’고만 하더라고요. 지영이가 살아 있을 때는 산업재해 신청할 돈도 없어서 포기했어요. 애가 죽어가는데 치료가 먼저니까.” 지영씨 어머니는 ‘보상이 안 된다’고 전화로 통보해준 회사 관계자에게 “딸이 (위험한) 어느 공정에서 어떻게 일했는지 뻔히 아는데 이럴 수는 없다”고 항의했지만 소용없었다.

“대통령 바뀌었다고 보상해주려는 건가?”

기남씨 가족도 회사에서 “10원 한 장 못 받았다”. 기남씨 어머니는 “환자한테 사람이 붙어 있어야 하니까 회사에 이러쿵저러쿵 말하면서 싸울 생각을 못했다”. 아들이 세상을 떠난 뒤에야 정신을 차리고 산업재해 신청서를 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와중에 LG디스플레이 하청업체였던 회사는 문을 닫았다. “아들이 뭐했는지 다 외우지도, 다 알지도 못하지만 벤젠 같은 나쁜 물질을 만졌다는 건 알아요. 방사능도 그렇게 많이 쐬었다고 하대요. 공장 안에서 쪽잠 자며 밤새 일할 때도 많았고요. 그러니 아무리 건강했던 사람도 일이 안 나겠어요?”

지영씨 어머니는 지난 4월 삼성에서 갑작스런 전화를 받았다. “우리 애 이야기를 하면서 ‘조심스럽게 전화했다. 조금이나마 보상해드리려는 차원에서 전화 드렸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더니 다음날 다시 전화해서는 ‘이메일로 필요한 서류 양식을 받을 수 있냐’고 물었어요.” 얼마 전에 남편 장례를 치른 탓에 경황이 없던 지영씨 어머니는 “2011년 냈던 서류로 처리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삼성 쪽에선 신청서만 있을 뿐 관련 서류가 없다고 다시 알려왔다. “그게 말이 되나요? 2011년 분명히 서류를 보고 나서 ‘안타까운데 못해준다’고 해놓고선. 솔직히 5년이나 지난 이제 와서 다시 전화한 의도가 의심스러워요. 몇 명 보상해줬다고 대통령 바뀐 뒤 내보이려 하는 거 아닌가 말이죠.”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기간이던 지난 5월7일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이하 반올림)과 정책협약을 맺었다. 반올림은 2007년 삼성전자 기흥공장에서 일했던 고 황유미씨가 백혈병에 걸려 숨진 사실을 사회에 가장 먼저 알리고 피해자·유가족들과 함께 삼성전자 직업병 문제 공론화에 앞장서온 단체다.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 선거대책위원회의 우원식 을지로민생본부장과 고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는 이날 국회에서 만나 정책협약서를 교환한 뒤 기자회견을 열었다. 정책협약에는 다음과 같은 4가지 약속이 담겼다. △삼성 직업병 문제의 올바른 해결을 위한 삼성과 반올림 간 대화 재개 △산업재해 은폐 사업주와 관련자 처벌을 강화할 수 있는 제도적 개선책 마련 △위험의 외주화 방지 △유해화학물질 공개에 관한 투명한 절차 마련 등이다.

문 대통령은 지난 5월30일 한국을 찾은 샤란 버로 국제노동조합총연맹 사무총장과 청와대에서 30분가량 면담했다. 버로 사무총장은 전날인 5월29일 반올림이 노숙농성 중인 서울 서초구 서초동 삼성전자 본관 앞을 찾아 “세계 최악의 노동착취 기업”이라며 삼성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국제노총은 전세계 62개국 노동자 1억7600만 명이 가입한 세계 최대 노동조합 조직이다.

버로 사무총장이 반올림 농성장을 찾은 5월29일은 농성 601일째 되는 날이었다. 반올림은 삼성의 일방통행식 보상 결정에 항의하며 2015년 10월부터 삼성전자 본관 앞에서 24시간 거리농성을 시작했다. 반올림 활동가들과 피해자들은 두 번의 겨울, 두 번의 여름을 거리에서 보냈다. 만약 이대로 삼성과 반올림 사이에 대화가 재개되지 않는다면, 반올림 농성장은 세 번째 가을도 거리에서 맞을지 모른다.

문재인 대통령과의 정책협약
지난 5월31일 삼성직업병가족대책위원회(가대위)가 충남 아산시 삼성전자 온양 사업장을 방문해 안전환경을 살펴봤다(위쪽).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장에서 얻은 직업병에 대해 가대위는 삼성전자와 협의해 보상을 받았으나, 또 다른 피해자 단체인 ‘반올림’은 피해자 배제 없는 보상 등을 요구하며 농성 중이다(아래쪽). 삼성전자 제공, 류우종 기자

지난 5월31일 삼성직업병가족대책위원회(가대위)가 충남 아산시 삼성전자 온양 사업장을 방문해 안전환경을 살펴봤다(위쪽).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장에서 얻은 직업병에 대해 가대위는 삼성전자와 협의해 보상을 받았으나, 또 다른 피해자 단체인 ‘반올림’은 피해자 배제 없는 보상 등을 요구하며 농성 중이다(아래쪽). 삼성전자 제공, 류우종 기자

어쩌다 600일 넘는 노숙농성이 시작됐을까. 2014년 삼성전자는 당시 권오현 부회장이 백혈병 등 직업병 문제에 대해, 피해자들에게 공개 사과한 데 이어 문제 해결을 위해 반올림과의 교섭에 나섰다. 그러나 교섭이 난항을 겪고 피해자들이 반올림과 삼성직업병가족대책위원회(가족대책위) 양쪽으로 나뉘자, 김지형 전 대법관 등 신뢰할 만한 제3자들로 꾸려진 조정위원회의 권고를 받아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기로 했다. 그러나 2015년 7월 조정위원회가 1천억원 규모의 공익법인을 설립해 피해 보상과 재발방지 대책 마련에 나서라는 권고안을 내놓자, 삼성 쪽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채 자체적으로 정한 기준에 따라 보상금을 지급했다. 주요 쟁점이던 보상·사과에 대해서는 반올림과 삼성 사이에 이견이 좁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재발 방지 대책 부분에 한해서만 ‘건강하고 안전한 사업장 내부 체계를 완성하기 위해’ 공익적 성격의 외부 기구인 ‘옴부즈만위원회’를 구성하기로 2016년 1월 합의했다.

지난해 6월 출범한 옴부즈만위원회 위원장인 이철수 서울대 교수(법학)는 “객관성과 전문성 있는 전문가들로 종합진단팀을 구성해 25차례 걸쳐 삼성전자 반도체 생산라인의 현장조사를 실시했다. 조사는 거의 마무리 단계다”라고 밝혔다. 옴부즈만위원회는 지난 5월25~26일 고려대에서 열린 한국환경보건학회 정기학술대회에서 1년간의 활동을 설명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김치년 연세대 교수는 이날 반도체 각 제조 공정마다 벤젠, 포름알데히드 검출 여부 등을 확인하는 작업환경 측정 작업을 진행 중이며, 사업주가 화학물질 관리와 함께 밀폐·격리·환기 등 노출 관리에도 중점을 둬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에 삼성전자는 가족대책위 소속 피해자들이 지난 5월31일 삼성전자 충남 온양사업장을 직접 방문하도록 했다. 삼성전자 쪽은 이들이 반도체 생산 현장을 세밀하게 점검한 뒤 유해물질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노력해달라고 당부했다고 전했다.

이처럼 직업병과 안전보건 문제에 대해 새삼 공개 행보에 나선 기업은 삼성전자만이 아니다. LG디스플레이도 지난 5월28일 1998년 11월 회사가 설립된 뒤 사업장에서 일했던 임직원 중 암이나 특이질병에 걸린 사례가 있으면 업무연관성을 따지지 않고 지원·보상하겠다고 발표했다. 임직원뿐만 아니라 협력사 직원도 지원 대상에 포함된다. 이를 위해 한국산업보건학회에서 선정한 전문가들로 구성된 ‘LG디스플레이 산업보건지원보상위원회’를 설립한 뒤, 지원 대상 범위와 지원 규모 등을 결정할 예정이다. LG디스플레이는 100억원을 출연해 위원회를 10년간 운영한다.

LG디스플레이는 지난해 5월부터 한국산업보건학회에 의뢰해 경기도 파주와 경북 구미 사업장의 작업환경을 분석하는 작업을 진행해왔다. 앞서 SK하이닉스도 산업보건검증위원회를 만들어 1년간 작업환경, 화학물질 관리 실태 등을 점검한 뒤 위원회가 내놓은 포괄적인 피해자 지원·보상안과 산업안전보건 개선안 등을 받아들여 시행한 바 있다. LG디스플레이는 아직 세부적인 보상 기준안을 내놓지 않았다.

당연히 불신의 골은 깊다. “해줘야 해주는 거죠. 산재 신청한다고 역학조사도 하고 서류도 많이 냈는데, 나중에 (근로복지공단에서) 조사해놓은 거 보니까 엉터리더군요.” 기남씨 어머니는 LG디스플레이가 협력업체 직원까지 보상해준다는 소식이 반가우면서도 여전히 못 미더운 눈치였다.

법원·공단만도 못한 삼성의 보상 기준

지난 5월26일 서울고법 행정2부(재판장 김용석)는 삼성전자 기흥공장에서 2년간 일한 ㄱ씨가 다발성경화증을 앓은 것을 업무상재해로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1심에서는 업무상재해로 인정되지 않았으나, 항소심에서 결과가 뒤집혔다. 법원은 유기용제 노출, 햇빛 노출 부족 등을 발병 원인으로 판단했다. 삼성전자가 자체적으로 정한 보상 기준에 따르면, 다발성경화증 등 희귀질환은 가장 낮은 수준의 치료비가 지급되는 ‘3군 질환’으로 분류돼 있다. 삼성전자는 유산·불임은 아예 자체 보상 기준에서 제외하고 있다. 반면 지난 3월 근로복지공단은 삼성전자 기흥공장 여성노동자의 불임을 산재로 판정했다. 반올림의 이종란 노무사는 “근로복지공단 산재 판정이나 법원 판결에서도 확인되듯이, 삼성 자체의 보상 대상이나 기준에 대한 조정이 필요하다. 삼성이 피해자들을 배제하지 않는 투명한 보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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