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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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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국민연금-청와대 2015년 7월의 ‘시크릿’

국민연금,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찬성’에 삼성 로비와 청와대 외압 있었나
등록 2016-11-24 03:53 수정 2020-05-02 19:28
11월18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관 앞에서 전국사무금융서비스노동조합 조합원들이 박근혜 대통령 퇴진과 전경련 해체를 요구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류우종 기자

11월18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관 앞에서 전국사무금융서비스노동조합 조합원들이 박근혜 대통령 퇴진과 전경련 해체를 요구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류우종 기자

2015년 7월, 삼성과 국민연금공단, 청와대 사이에 대체 무슨 비밀이 있었던 것일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폭풍에 떠밀려 감춰졌던 ‘시크릿가든’(비밀의 정원)의 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삼성의 ‘물러설 수 없는 싸움’

시계를 잠시 과거로 돌려보자. 2015년 5월26일, 삼성은 계열사인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을 1 대 0.35 비율로 합병하겠다고 발표한다.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한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엘리엇)는 합병 비율이 삼성물산 주주들에게 불리하다며 6월4일 합병 ‘반대’ 입장을 밝힌다.

7월17일 주주총회를 앞두고 삼성과 엘리엇 사이에 ‘표 모으기’ 싸움이 벌어졌다. 제일모직의 최대주주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23.24%)이다. 삼성물산 지분을 하나도 갖고 있지 않은 이 부회장은 두 회사가 합병함으로써 삼성전자 지분(4.1%)을 자연스레 확보하게 된다. 경영권 승계를 위한 포석을 둔 삼성으로서는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이었다.

국민연금은 삼성물산의 최대 단일 주주(2015년 3월 기준 11.43%)였다. 국민연금의 표가 결정적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업체인 ISS, 한국기업지배구조원 등은 모두 합병 비율이 불리하게 산정됐다며 삼성물산 주주들에게 반대를 권고했다. 국민연금이 제일모직(5.04%)보다 삼성물산 지분(2015년 5월 기준 9.54%)을 더 많이 갖고 있으므로, 국민연금의 지분 가치를 극대화하려면 합병에 반대하는 게 합리적 선택이라고 여겨졌다.

그런데 7월10일 국민연금은 내부 인사들로만 구성된 기금운용본부 투자위원회를 열어 ‘합병 찬성’을 결정했다. 기금운용본부가 결정하기 곤란한 안건은 외부 인사들로 구성된 주식 의결권행사 전문위원회에 결정을 요청할 수 있다는 지침이 있었지만, 독자 결정했다. 의결권행사 전문위원회는 그해 6월 SK C&C와 SK(주) 합병에 ‘반대’ 표결을 행사하기로 결정한 바 있다. 의결권행사 전문위원회는 7월14일 긴급회의를 소집해 국민연금 쪽에 독자 결정에 대한 유감을 표명했다.

7월17일, 주주총회에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안이 통과됐다. 주주총회에 참석한 삼성물산 주주 가운데 69.53%가 ‘찬성’ 표를 던졌다. 출석한 주주 의결권의 3분의 2(66.7%)를 확보해야 합병안이 가결되므로, 아슬아슬한 승리였다. 국민연금이 아니었다면 합병안이 통과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재용 부회장은 통합 삼성물산의 최대주주(17.08%)가 됐다.

당시 국민연금을 움직인 ‘보이지 않는 손’이 존재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일었다. 한쪽 손은 삼성이었다. 그해 7월7일 홍완선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장이 이재용 부회장을 비밀리에 만난 사실이 국회 국정감사에서 밝혀졌다. 홍 본부장은 “투자와 관련된 의견을 듣기 위해 만났다”고 말했다. 두 사람이 만나고 나서 사흘 뒤에 국민연금은 급작스레 투자위원회를 열어 ‘찬성’을 결정했다.

국민연금 전문위원, 청와대 ‘간접 압박’ 고백

보이지 않던 다른 쪽 손은 청와대였다. 삼성뿐만 아니라 청와대가 국민연금을 움직였다는 사실이 최근 새롭게 드러났다. 국민연금 의결권행사 전문위원회의 한 위원이 “문형표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한테서 (합병에) 찬성해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지인을 통해 ‘청와대의 뜻이다. 찬성을 표시해달라’는 전화도 받았다. ‘청와대’를 곧 안종범 당시 경제수석으로 이해했다”고 말했다고 가 11월17일 보도했다. 다른 전문위원도 “지인들이 수차례 전화해 ‘찬성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삼성의 부탁으로 전화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문형표 전 장관은 지난해 8월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의 책임을 지고 장관직에서 물러났다가, 넉 달 뒤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문 전 장관은 11월17일 보도자료를 내어 “전 직장 동료였던 의결권행사 전문위원에게 쟁점 사안과 전문가로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등에 대해 개인적으로 통화한 바는 있으나 찬성하라고 한 적은 없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개인적 통화였다 하더라도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던 복지부 장관으로서 부적절한 처신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국민의 노후 재산을 지키기 위해 불리한 합병 비율에 반대해야 했던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는 비상식적인 결정을 했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은 당시 누구에게 어떤 외압을 받았는지, 청와대의 누가, 왜 삼성물산 합병 건을 국민연금에 찬성하도록 강요했는지 밝혀야 한다.”(‘내가만드는복지국가’ 11월17일 논평)

법원도 국민연금의 결정에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지난 5월 서울고법 민사35부(재판장 윤종구)는 옛 삼성물산 지분 2.1%를 갖고 있던 일성신약이 삼성물산을 상대로 ‘주식매수청구권’(자신이 보유한 주식을 사달라고 청구할 권리)을 행사하면서 법원에 주식매수 적정가격을 결정해달라고 낸 사건의 항소심에서 일성신약 쪽 손을 들어주면서 “국민연금의 옛 삼성물산 주식 매도가 정당한 판단에 근거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의심을 배제하기 어렵다”고 적시했다. 국민연금은 삼성물산 주가가 1주당 6만원대(2015년 1월)에서 5만5천원대(2015년 5월)로 8.9% 하락하는 사이, 이상하게도 삼성물산 주식은 팔고 제일모직 주식은 사들였다.

이 결정문에서 법원은 적정 합병 비율을 1 대 0.4로 판단했다. 이 기준에 따르면, 국민연금은 581억원을 손해 보고, 이재용 부회장을 포함한 삼성 총수 일가는 3718억원의 이득을 챙긴 것으로 추정된다. 국민연금 투자위원회 자체적으로도 ‘적정 합병 비율은 1 대 0.46이며, 합병 비율에 있어서 삼성물산이 다소 불리하다’고 판단했는데, 이 비율을 적용하면 국민연금은 1164억원 손실, 삼성 총수 일가는 7445억원의 부당이득을 취한 셈이다(11월15일 더불어민주당 제윤경 의원실 보도자료).

국민연금, 581억~1164억원 손실

2015년 7월, 결정적 장면이 하나 더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7월24일 청와대에서 열린 ‘창조경제혁신센터장’ 간담회 전후로 7개 그룹 총수들과 따로 만났다. 이 가운데는 이재용 부회장도 있었다. 검찰이 최근 압수한 안종범 전 경제수석의 수첩에는 대통령과 독대한 7개 그룹의 민원사항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삼성의 민원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헤지펀드 엘리엇의 반대가 심하다’였다. 이재용 부회장과 따로 만난 홍완선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장은 최경환 당시 경제부총리와 대구고 동기동창이고, 그의 후임으로 지난 2월 임명된 강면욱 기금운용본부장은 안종범 전 경제수석과 대구 계성고, 성균관대학 1년 선후배 사이다. 지난 6월 참여연대와 공적연금강화국민행동은 이재용 부회장, 옛 삼성물산 경영진, 홍완선 전 본부장 등을 배임과 주가조작 혐의 등으로 검찰에 형사고발해놓은 상태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경제개혁연대 소장)는 “삼성이 당시 청와대, 정부, 국민연금 등에 전방위적 로비를 벌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 로비에 연루된 정부와 국민연금 관계자들은 모두 불법 내지는 부당행위를 저질렀다. 이제라도 국민연금은 투자위원회 회의록을 공개해 진실을 밝혀야 한다. 또 모든 것을 로비를 통해서 해결하려는 삼성 지배구조의 본질적인 문제를 개선할 방법이 무엇인지도 고민해야 할 때다”라고 말했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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