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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그놈을 만나러 간다

‘행복’이란 화두와 평생 씨름한 제러미 벤담과 루쉰… 희망은 함께 구체적으로 그리며 찾아가는 것
등록 2016-01-06 09:10 수정 2020-05-02 19:28
새해 첫 해를 바라보며 사람들이 소망을 빌고 있다. 올해는 비뚤어지는 마음을 다독거리며 행복과 희망을 마주 보기로 했다. 한겨레 탁기형 기자

새해 첫 해를 바라보며 사람들이 소망을 빌고 있다. 올해는 비뚤어지는 마음을 다독거리며 행복과 희망을 마주 보기로 했다. 한겨레 탁기형 기자

“그녀를 만나러 가겠네, 서른 살이 되면.” 성석제의 소설 ‘황금의 나날’을 여는 첫 문장이다. 해가 능청스럽게 바뀔 때마다 나는 이 구절을 애써 떠올린다. 새해 첫 해와 함께 솟아오르는 습관적 냉소 때문이다.

‘지난해’라는 시간은 늘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이 가득 적힌, 그래서 구겨져 바닥에 뒹구는 낡은 종이 한 장 같다. 그런 까닭에 새해 첫날이 되면 시큰둥해진다. 날짜 하나 바뀌는 것일 뿐인데 왜 이리 번거로운 성화냐면서 투덜대기도 한다.

“그녀를 만나러 가겠네, 서른 살이 되면.” 기괴한 냉소와 자기 연민이 똬리를 틀게 될 즈음이면, 나는 이런 가슴 떨리는 문장을 되뇐다. ‘서른’이라는 새로운 시간을 기다리는 행복한 설렘과 ‘그녀’라는 목표를 향한 떨리는 희망이 응축된 문장을 읽으면, 이제는 서른을 한참 넘겨버린 나에게도 마치 서른이 곧 돌아올 것처럼 힘이 난다. 그런 단단한 힘 덕분에 당장 내 손마디 끝에서 단단한 현실이 빚어 나올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그녀’는 곧 희망이고 행복이며, ‘서른 살’은 늘 찾아오는 새해다.

별수 있겠어요 그냥 살아요

이번 새해 첫날에는 비뚤어지는 마음을 다독거리며 행복과 희망을 마주 보기로 한다. 나의 행복과 희망을 들여다볼 자신은 없으니, 이 두 가지 주제를 평생의 화두로 두고 씨름한 인물을 생각해내었다. 제러미 벤담과 루쉰(노신)이다.

제러미 벤담은 그야말로 국민의 행복을 국가의 정책 대상으로 끌어들인 인물이다. 18세기 말, 정치인들이 정의·선악·의무·도덕 등을 숨소리처럼 내뱉으면서 정작 그들의 정책은 정반대로 가는 것을 보고, 벤담은 신물이 났다. 법률을 공부한 그는 누구보다도 독해 불가한 법률과 그들만의 해석이 지배하는 법률 체계에 비판적이었다. 그래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으로 널리 알려진 원리를 통해, 국민의 행복을 정책의 최종 목표로 삼자는 과격한 주장을 했다. 서민들의 관심사인 행복을 끌어들여 기존 세력정치를 뒤엎으려는 일종의 ‘언어를 통한 전복’이었다.

행복이라는 원리에서 시작하다보니, 그의 정치적 견해도 상당히 파격적이었다. 언론과 발언의 자유를 옹호했고, 노예제와 사형제의 폐지를 주장했다. 모든 육체적 체벌에 반대했으며, 동물의 ‘권리’에도 관심이 컸다. 당시 폭발성이 높았던 주제인 성적 자유와 결혼의 자유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발언했고, 양성평등 원리를 주창했다. 따라서 공상적 사회주의자인 로버트 오언이 벤담의 제자였다는 것은 그다지 놀랍지 않다. 그의 공상적 사회주의는 기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달성하는 제도였다.

하지만 세상의 행복이 다 그러하듯이, 벤담의 행복론도 빈틈투성이였다. 그가 생각한 행복이란 고통을 줄이고 즐거움을 늘리는 것인데, 사회 전체의 행복을 극대화하려면 보상과 처벌의 체계가 필요하다고 믿었다. 벤담의 생각은 여기서 묘하게 어깃장이 난다. 그는 자유시장 체계가 보상을 통한 행복 추구를 보장해줄 것이라 믿었다. 시장이 각자의 행복을 조화롭게 추구하는 곳이라는 것인데, 이 점은 물론 그의 친구인 애덤 스미스와 닿아 있다.

결국 국가에 남겨진 역할은 처벌뿐이다. 허울 좋은 추상적 언어 체계에서 벗어나 실질적인 처벌 체계를 꼼꼼히 구성하여 타인의 행복을 저해하는 행위를 극소화하자는 생각이다. 여기에 매진하다보니, 그는 팬옵티콘(Panopticon)이라 불리는 원형감옥 체계를 디자인하기도 했다.

원래 취지는 한 사람 정도의 최소 인력으로 모든 수감인들을 감시하는 ‘최적화 감옥’이었지만, 훗날 철학자 미셸 푸코는 여기서 현대 ‘감시사회’의 원형을 발견했다. 개인의 행복과 자유를 줄기차게 주장한 벤담이 졸지에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기제의 진원지가 되어버렸다. 그로서는 억울한 일이겠지만, 세상의 이치를 빨리 보고 바꾸어보려 한 자들이 흔히 겪는 운명이기도 하다.

그의 행복론은 현대 경제학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정치인을 신뢰하지 못한 그는 개인의 행복을 국가의 목표로 삼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정치적 조작과 오용을 막기 위해 행복도 측정돼야 한다고 믿었다. 그가 내세운 것은, 즐거울 때 뛰는 ‘맥박’과 개인적 만족을 위해 기꺼이 지불하려는 ‘금전’이었다.

맥박을 믿지 않는 경제학은 손쉽게 금전에 집중했다. 오늘날 경제학의 기본 개념인 ‘효용’이니 ‘선호’니 하는 개념은 여기서 나왔다. 정교한 수학 체계가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그렇게 얻은 자신감으로 경제학은 더 이상 도덕적이거나 정치적인 학문이 아니라 과학이라는 인식도 싹텄다.

국가의 최종 목표, 행복
제러미 벤담(왼쪽)은 국가 정책의 최종 목표로서 행복을 주장했고, 루쉰(오른쪽)은 새해가 되면 행복을 주제로 한 글을 곧잘 썼다. 왼쪽부터 위키피디아, 한겨레

제러미 벤담(왼쪽)은 국가 정책의 최종 목표로서 행복을 주장했고, 루쉰(오른쪽)은 새해가 되면 행복을 주제로 한 글을 곧잘 썼다. 왼쪽부터 위키피디아, 한겨레

역설적이게도 이런 전환이 완성되자, 경제학은 더 이상 행복을 언급하지 않게 되었다. 행복을 측정하려는 수단으로 효용 개념이 나왔으나, 효용은 주인이 되고 행복은 거세됐다. 백년의 세월이 흘러서 새천년을 구가하는 21세기에 들어, 경제학은 이제야 ‘행복’을 다시 불러들이고, ‘행복 경제학’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핵심 주장은 ‘행복은 돈으로만 살 수는 없잖아요’인데, 이런 얘기를 이미 한 벤담은 더 이상 하소연할 길이 없다.

벤담의 행복론은 실용적이다. 플라토닉한 사랑에 행복을 걸어두지 않았다. 그는 행복의 이름으로 에로스를 지키려 했고 당연히 연애, 결혼 그리고 성적 결합의 자유를 열렬히 옹호했다. 정연한 논리와 풍부한 사례를 통해 따졌고, 이를 애써 무시하는 ‘근엄한’ 자들의 위선을 고발했다.

하지만 이런 기준으로 보자면, 그는 행복하지 못했다. 여든이 넘도록 결혼하지 못했다. 젊은 시절 결혼하고 싶은 여인이 있었으나, 돈과 권력만이 행복이라고 믿는 아버지는 가난한 여자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늘 아버지 뜻대로 살아온 ‘파파보이’ 벤담은 차마 대들지 못했다.

한번 어긋난 사랑은 평생 그의 족쇄가 되었다. 아버지가 죽고 나서는 총명하고 급진적인 여인을 만나 열렬한 사랑을 나누었다. 그는 그녀와 침대에서 나눈 사랑을 세세히 기록해두었다. 하지만 ‘근엄한’ 스승을 원했던 제자들은 부인했다. 벤담의 수제자인 존 스튜어트 밀은 ‘벤담이 성적 열정은 전혀 없었다’고 공언했고, 섹스에 대한 벤담의 원고들은 꼭꼭 숨겨졌다. 그가 죽은 지 무려 150년이 지난 1980년대에 들어서야 원고는 공개됐다.

20세기 초, 암울했던 중국에서 루쉰은 평생 희망과 사투를 벌였다. 그는 1월1일에 희망에 관한 글을 곧잘 썼다. 그의 유명한 글 ‘고향’도 새해에 발표됐다.

루쉰이 20년 만에 고향을 찾는다. 고향 살림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제법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루쉰은 집안일을 도와주는 사내의 아이와 동갑내기로 친했다. 그때 할 법한 장난질을 몰래 같이 했던 ‘은밀한 공범’이었다. 하지만 막상 만나본 친구는 삶에 피폐해져 있었고, 세상의 질서에 익숙해져 이제 루쉰에게는 말을 높였다.

그의 오롯한 관심사는 루쉰이 남겨둘 세간뿐이었다. 팍팍한 살림인데도 그는 향로와 촛대에 욕심을 내었다. 친구의 허허한 욕심이 우상 숭배와 뭐가 다르며, 자신 또한 고향에 오며 품었던 희망이라는 것도 스스로 키워온 우상이 아닌가. 그래도 그는 자신을 다독거리다 그 유명한 구절로 글을 맺는다.

“나는 생각했다. 희망이란 본래부터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마치 땅 위에 난 길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길이란 본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차차 생기는 것이다.”

어떻게 무쇠 방을 무너뜨릴 것인가

루쉰은 이 글을 마흔 살이 되던 해, 1921년에 썼다. 하지만 이후로도 그는 ‘희망’이라는 말 앞에 서성거렸다. 피와 복수가 난무하던 시절이었다. 그의 가슴은 텅텅 비어갔다. 그럴수록 그는 “때로는 일부러 자기를 속이는 덧없는 희망으로 그 텅 빈 자리를 메우려 했다. 희망, 이 희망이란 방패로 습격해 텅 빈 어두운 밤을 메우려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렇게 희망의 방패만 앞세우고 청춘은 흘러갔고, 쓸쓸해졌고, 그리고 절망했다. 1925년 ‘희망’이라는 글에서 그가 쏟아낸 말은 차라리 처참하다. “절망이란 희망처럼 허망한 것이리라.”

젊은 시절 루쉰은 의학에서 중국의 희망을 찾았다. 일본 유학을 나선 것도 그 때문이다. 러일전쟁이 한창이었다. 관련 홍보 영화도 많았다. 운명적으로 영화 한 장면을 보게 된다. 중국인 한 사람이 일본군에 잡혀 목이 잘리는 순간인데, 주위에 중국인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얼빠진 표정으로” 구경을 나온 장면이었다. 루쉰은 거기서 몸의 병을 치료하는 의학을 버리고, 중국인의 마음과 의식과 싸울 작정을 했다. 글을 쓰기로 하고, 중국으로 돌아왔다.

루쉰은 열정적이었지만 치밀하진 못했다. 잡지 작업은 번번이 실패했고 살림은 기울었다. 그는 허름한 집에 몸을 누이고 칩거했다. 어느 날 친구가 찾아와 글 쓰기를 권했다. 세상에 싫증이 난 루쉰은 친구를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가령 창문이 하나도 없고 무너뜨리기 어려운 무쇠로 지은 방이 있다고 하세. 만일 그 방에서 많은 사람이 잠이 들었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이 막혀 죽을 게 아닌가. 그런데 이렇게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가 죽는다면 죽음의 슬픔을 느끼지 않을 거네. 지금 자네가 큰소리를 쳐서 잠이 깊이 들지 않은 몇몇 사람을 깨워 그 불행한 사람들에게 임종의 괴로움을 맛보인다면 오히려 더 미안하지 않은가.”

그럴듯한 말에 친구는 차분하게 답했다. “하지만 몇몇 사람이 일어난 이상 이 무쇠 방을 무너뜨릴 희망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 없지 않은가.” 그리고 루쉰은 글을 쓰기 시작했고, 그 첫 작품이 다. 미친 세상을 ‘미친 사람’의 입을 통해 까발렸다.

나는 벤담의 공리주의자는 아니다. 하지만 고색창연한 도덕이나 설익은 정의를 외치기보다는 개인의 구체적인 행복을 말하는 것이 정치의 도리라는 데는 동의한다. 행복이 추상적이면, 권력자의 도덕이나 정의 타령과 다를 바 없다. 행복은 벤담의 ‘침대의 기록’만큼 구체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루쉰의 희망은 그 자체로 정의되지 않는다. 절망과의 끊임없는 싸움일 뿐이다. 따라서 희망이란 싸우는 자만이 내뱉을 수 있는 말이다. 아마도 새해가 희망인 것은 또 다른 싸움의 시간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싸우는 자만이 할 수 있는 말

또 희망은 홀로 키우기 어렵다. 러시아 태생의 프랑스 작가 로맹 가리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생사를 넘나드는 시절을 보냈다. 그 시절에 그가 실낱같은 삶의 희망을 키우게 된 것은 그의 어머니가 어렵게 전해온 편지 덕분이었다. 드물지만 꾸준히 보내온 편지를 읽으며 새삼 삶의 의미를 되새겼다.

전쟁이 끝날 무렵, 그는 마침내 프랑스 니스에 있는 어머니를 찾아볼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없었다. 이미 3년 전에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어머니는 죽기 전에 아들을 위해 무려 200여 통에 달하는 편지를 미리 써두고, 친구에게 맡겼다. 틈틈이 한 통씩 아들에게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탯줄의 인연이 끊어지면 아들의 삶의 의지도 약해질 것을 두려워한 어머니의 마지막 부탁이었다. 희망은 같이 키우는 법이다.

이제 새해라는 그놈을 만나러 간다.

이상헌 경제학 박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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