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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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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겁다고 던져버리진 맙시다

시장 실패를 보완하는 비시장적 정책 개입 ‘최저임금’
노동시장의 상처와 고통 막는 ‘고약’과도 같은 것
등록 2015-03-26 07:17 수정 2020-05-02 19:27

최저임금이 그야말로 ‘뜨거운 감자’다. 모두들 한 번씩 집어보려 하지만, 화들짝 놀라서 이내 옆 사람에게 떠넘긴다. 그래서인지 말은 무성한데, 딱히 잡히는 것은 없다. 감자가 식어 관심도 같이 시들어가길 바라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익숙한 풍경이다. 최저임금이 도입된 지 한 세기가 훌쩍 지났지만, 잊을 만할 때마다 거친 논쟁이 터져나온다. 90%에 달하는 국가들이 최저임금을 도입한 오늘날에도, 날선 비아냥은 계속된다. 일부 경제학자들은 최저임금을 마치 자신들의 ‘과학적 신념’에 대한 모욕이라 생각하는지, 살벌한 언사도 마다하지 않는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제임스 뷰캐넌은 1996년에 “최저임금 옹호론자는 물이 산으로 거슬러 흐른다고 주장하는 물리학자와 같다”고 했다. “창녀 무리”라는 험한 소리까지 덧붙였다.

지난 3월12일 서울 중구 정동 민주노총 사무실에서 열린 ‘민주노총 최저임금 요구안 발표 기자회견’에서 한 참가자가 ‘최저임금 1만원’이라고 쓰인 손팻말을 들고 있다. 한겨레 이종근 기자

지난 3월12일 서울 중구 정동 민주노총 사무실에서 열린 ‘민주노총 최저임금 요구안 발표 기자회견’에서 한 참가자가 ‘최저임금 1만원’이라고 쓰인 손팻말을 들고 있다. 한겨레 이종근 기자

하지만 목소리 높여서 될 일이 아니다. 경제학 개론에서는 임금이 시장에서 기업과 노동자 간의 자유롭고 동등한 협상을 통해 결정된다고 가르친다. 이것이 가장 효율적이라고 한다. 개인적으로 그랬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있다. 하지만 현실과는 거리가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노동자들이 일상에서 늘 겪는 현실을 보면 된다. 경제학이 경제적 효율성을 따지는 학문이라고 한다면 원칙에만 목소리 높일 것이 아니라, 현실을 효율적 경제 원리에 맞춰갈 방법을 고민해야 할 일이다. 시장 원리를 믿는다면, 노동자가 자유롭고 동등하게 협상할 수 있는 제도적 틀을 만드는 데 경제학자들이 누구보다 팔 걷고 나서야 한다. 그래야 효율적이라는 시장이 제대로 작동한다. 근근이 먹고살기도 힘든 임금을 받고, 자신의 기여분인 노동생산성에도 못 미치는 임금을 받는 상황은 진정 시장 원리를 믿는 경제학자에게 참으로 모욕적이지 않는가.

“최저임금 옹호론자는 창녀 무리”

최저임금이 반시장적이라는 주장은 게으르다. 최저임금은 노동시장이 시장으로서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시장 실패’ 상황에서 정책 개입을 통해 시장을 ‘정상화’하려는 것이다. 이미 실패한 시장에 ‘비시장적인’ 정책 개입을 한다고 해서 이를 반시장적이라고 하면, 감정 돋친 말싸움을 피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최저임금이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그 뜻을 이루고자 하면, 치밀하고 면밀해야 한다. 최저임금을 야심차게 대폭 인상하는 것은 폼나는 일이지만, 앞뒤를 따지지 않은 야심은 뜻을 이루지 못한다. 최저임금은 열악한 처지에 있는 저임금 노동자를 위한 것이다. 그들에게 실제적 도움을 주지 못한 야심은 정치적 슬로건일 뿐이다. 일부 ‘명민한’ 이들이 경계하는 것도 이런 위험이다.

몇 가지 원칙이 있다. 우선 협상과 합의의 원칙이다. 최저임금 결정은 과학이 아니다. 수학적 모델이나 통계 기법을 통해 최저임금의 최적 수준을 정할 수 있었다면 논란도 없을 터다. 하지만 유일무이한 최적의 최저임금이란 존재하지 않는 허깨비이고, 따라서 알 수도 없다. 최저임금의 적절성은 결국 노·사·정의 토론과 합의를 통해서 나온다. 노동자나 사용자가 배제된 채 정부가 일방적으로 지정한 최저임금은 행정적으로 용이하겠지만, 적절하지도 효과적이지도 않다. 정부는 토론과 합의의 장을 만들고 유지할 의무가 있다. 시간과 불편함을 핑계로 협상의 판을 깨서는 안 된다. 쉽게 한번 가자는 것이 최저임금을 식물인간으로 만든다. 최저임금은 ‘정치과학’이다.

최저임금은 ‘정치과학’이다

협상과 합의는 막무가내로 우기는 것이 아니다. 협상 테이블에 앉은 이들이 존중해야 할 기본 원칙들이 있다. 말하자면 경기 규칙이다. 우선 최저임금의 구매력 보존 원칙이다. 최저임금은 저임금 노동자의 생활을 유지하도록 하는 정책 방편인 만큼, 적어도 물가가 오르는 만큼 최저임금은 올라야 한다. 지난해에 소비자물가가 3% 올랐다면, 최저임금은 최소한 3%는 올라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최저임금으로 생활하는 노동자의 생활은 더 궁핍해진다. 최저임금이 그 소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다. 협상이란 무릇 각종 전략이 난무하는 것이지만, 이런 원칙마저 무시하고 물가상승률에 못 미치는 최저임금 인상률을 제안하는 것은 최저임금을 없애자는 말과 진배없다.

둘째, 나눔의 원칙이다. 최저임금은 경제성장의 과실을 저임금 노동자에게 나누는 주요한 방식이다. 자명해 보이지만, 쉽게 무시되는 원칙이다. 가령 물가상승분을 제외한 실질 노동생산성 증가율이 4%였다면, 이 또한 최저임금에 반영되어야 한다. 물가상승분만 반영해서 최저임금의 구매력만 유지한다면, 최저임금 노동자의 상대적 처지는 악화된다. 최저임금이 임금 최저선 또는 임금 ‘바닥’(floor)이라고 불리지만, 흙투성이 바닥에 포복하는 병사처럼 웅크리고 있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전반적인 경제 살림이 좋아져서 전망 좋은 고층으로 올라가는데, 마룻바닥만 아래층에 두고 갈 수는 없는 일이다.

셋째, 형평성의 원칙이다. 최저임금이라고 해서 무작정 낮기만을 바라면 안 된다. 오히려 평균적인 임금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면 최저임금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 최소한 중위임금의 40% 이상은 되어야 최저임금이 제구실을 한다. 물론 너무 높아서도 안 된다. 최저임금이 중위임금에 육박한다면 최저임금이 아니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최저임금이 너무 높으면, 저임금 노동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기업이 아예 무시하게 되고, 저임금 노동자들도 최저임금을 내놓으라고 따지기 힘들다. 기업에도 노동자에게도 비현실적인 최저임금은 ‘종이호랑이’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된다. 나라마다 사정이 다르니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으나, 최저임금은 중위임금의 40~60% 수준은 되어야 한다. 이 정도 수준에서는 최저임금 때문에 일자리가 줄어들 것이라는 걱정을 과하게 할 필요는 없다.

이 세 가지 원칙만 잘 고려해도 최저임금을 둘러싼 협상은 훨씬 생산적으로 된다. 한쪽에서는 동결을 주장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30%를 주장하면서 서로 목청만 높이다가 합의 없이 협상이 끝나는 위험은 줄일 수 있다. 또 이 원칙들이 제대로 반영되려면, 면밀한 조사와 연구가 중요한 전제조건이다.

더 곤란한 건 무규칙과 예측 불가능성

여기에 한 가지 원칙을 더 부여한다면, 규칙성과 예측성의 원칙이 있겠다. 현재 최저임금이 너무 낮다고 해서 하룻밤 새 100% 인상할 수는 없다. 의욕은 좋지만, 기업에 미치는 영향은 치명적이다. 노동자에게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다. 저임금 노동자를 돕자고 한 정책이 오히려 그들의 일자리를 해칠 수 있다. 최저임금의 대폭적 인상은 체계적이고 계획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그래야 기업이 최저임금에 실질적이고 체계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기업 입장에서 최저임금의 수준보다 더 곤혹스러운 것은 예측 불가능한 불규칙적 변화다. 따라서 최저임금을 두 배로 올리려면, 수년에 걸친 조정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그러려면 노동자 대표와 기업 대표 간의 합의와 신뢰가 필요한데, 이때 정부가 ‘보증인’ 역할을 자임하고 나서면 된다. 브라질 같은 개발도상국에서도 5개년 계획을 통해 거뜬히 해낸 일이다.

아르바이트 구인·구직 전문 사이트 ‘알바몬’은 지난 2월1일 TV 광고 ‘최저시급 편’ 등을 내보냈다. 이 광고에는 법으로 정한 1시간 최저임금이 5580원이고 ‘이 금액이 적다’는 우회적 표현을 담아 화제가 됐다. 한겨레

아르바이트 구인·구직 전문 사이트 ‘알바몬’은 지난 2월1일 TV 광고 ‘최저시급 편’ 등을 내보냈다. 이 광고에는 법으로 정한 1시간 최저임금이 5580원이고 ‘이 금액이 적다’는 우회적 표현을 담아 화제가 됐다. 한겨레

최저임금을 정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저임금 노동자를 돕자고 하는 정책이라면, 최저임금이 실제로 적용되어야 한다. 합의문을 환영하고 기념사진을 찍는 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최저임금 인상 소식을 대대적으로 알려야 한다. 저임금 노동자뿐만 아니라 중소기업에도 널리 알려야 한다. 저임금 노동자는 일터에서 목소리 내기가 쉽지 않고, 최저임금 인상에 맞추어 월급을 올려달라는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는 데도 눈치 보기 쉽다. 그래서 공격적으로 알려야 한다. 정부의 선심성 예산을 아껴서 주요 언론 1면에 최저임금 인상 소식을 대문짝만하게 알리는 방법도 있다. 노동자들은 이런 신문 광고를 오려서 기업주에게 보여주면 된다. 이것으로도 부족하다면, 편의점과 같이 최저임금 노동자가 집중된 곳에는 의무적으로 최저임금을 공지하도록 해도 좋다. 방법은 많고, 법을 널리 알리는 일은 정부가 게을리할 수 없는 임무다. 최저임금을 단속한다고 한바탕 휘젓고 다니는 것보다 훨씬 경제적이다.

처벌도 중요하다. 최저임금을 주지 않는 기업은 법에 따라 처벌해야 한다. 최저임금을 주지 못할 정도로 운영이 어려운 기업은 퇴출되도록 유도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 빈자리는 좀더 경쟁력 있는 기업이 채우는 것이 경제 전체적으로 이익이다. 최저임금이 기업 생산성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가 많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일시적인 유동성 어려움으로 고군분투하는 기업에는 단기적 지원을 해주는 것이 옳다. 방식은 많다. 최저임금은 지불하도록 하되, 4대 보험료를 일시적으로 면제해주거나 직접적으로 임금을 지원하는 방식 등이 있다. 기존 재원을 잘 활용한다면 큰 어려움 없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다만 일시적이고 한정적 지원이어야 한다. 뜻만 세우면 ‘창조적’인 방법이 생겨난다.

아픈 노동에 약이 필요하다

보기에 따라 최저임금은 임금의 하한선을 일률적으로 정하는 다소 난폭한 방식이다. 하지만 최저임금 없는 노동시장은 더 폭력적이다. 최저임금은 이상적인 임금 결정 방식도 아니다. 북구 유럽의 일부 국가처럼 거의 모든 노동자에게 단체 임금협상이 적용된다면, 최저임금은 필요 없다. 실제로 세계 최고의 노조 조직률을 자랑하던 덴마크에는 법정 최저임금이 없다. 반면 노조 조직률이 급락한 독일에서는 올해부터 법정 최저임금이 도입되었다. 따라서 최저임금은 노동시장의 ‘상처’와 ‘고통’을 막아보자는 ‘이명래 고약’과 같은 것이다. 고약한 냄새를 때로 풍기지만, 그것이 싫다고 커져가는 상처를 내버려둘 수는 없는 일이다. 오늘날의 노동은 많이 아프다.

국제노동기구(ILO) 부사무총장 정책특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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