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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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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걸 그림 빌려가실 분?

신진 미술 작가들 작품의 대여·판매 징검다리 역할 하는

박의규 오픈갤러리 대표… “안정적 수입 제공해 창작활동의 생태계 키우고 싶어”
등록 2014-10-18 06:22 수정 2020-05-02 19:27

3766만달러(약 400억원). 온라인 미술 전문매체 (Artnet)이 집계한 현대미술가 이우환(78) 작가의 최근 3년 동안 작품 낙찰액이다. 미술계는 그와 같은 거장에게 가치를 부여한다. 그러나 모두가 거장이 될 수는 없다. 게다가 미술계는 거장이 아닌 대다수의 예술가에게 가혹하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문학·미술·건축·사진 등 10개 분야 예술가 2천 명을 대상으로 한 ‘2012년 문화예술인 실태조사’를 보면, 창작활동으로 월평균 100만원도 못 버는 예술인이 40.3%, 아예 수입이 없는 경우가 26.2%였다. “경제적 능력에 대해 한계를 느낀다”고 답한 이들은 83.6%나 됐다. 꿈을 꾸기에 현실은 배고프다.

거리는 북적이는데, 갤러리는 왜 한가할까?

신진 작가들의 미술품을 일반인들에게 대여·판매해주는 사업을 하고 있는 박의규 오픈갤러리 대표가 서울 삼성동 사무실에서 작가들의 작품과 함께 서 있다.

신진 작가들의 미술품을 일반인들에게 대여·판매해주는 사업을 하고 있는 박의규 오픈갤러리 대표가 서울 삼성동 사무실에서 작가들의 작품과 함께 서 있다.

10월8일 오후 서울 삼성동 사무실에서 만난 박의규(34) 오픈갤러리 대표는 이처럼 ‘부익부 빈익빈’으로 고착화된 미술품의 유통 구조에 새로운 생태계를 키우겠다며 뛰어든 사업가다. 한마디로 그는 ‘미술품 중개인’이다. 그러나 기존 갤러리와는 다른 방식을 추구한다. 오픈갤러리에서 취급하는 작가의 미술품도 다르고, 대중과 연결해주는 방법도 새롭기 때문이다.

그가 미술품 사업에 뛰어든 계기는 ‘갤러리 아니면 고속터미널 상가’로 양분화된 미술품의 유통 현실에 의문을 품으면서다. 갤러리에서는 유명작가의 작품을 주로 취급하고, 무명작가들이 작품을 내다 팔 곳은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우연 반, 의지 반으로 시작했다. 동양화를 그리는 오랜 친구가 있는데,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데도 이 친구의 작품은 거래가 안 됐다. 그리고 주말에 서울 삼청동·인사동 갤러리 근처에는 사람이 북적이지만, 정작 갤러리 안에는 사람이 없는 점에 막연한 의구심을 품게 됐다.” 실제 국내 갤러리에서는 유명작가 가운데에서도 연륜·경험이 쌓인 이들의 작품을 주로 취급하는 게 일반적이다. 미술품 시장에서 높은 가치를 얻으려면 연륜과 경험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이는 젊은 작가들의 창작활동이 녹록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서울대·홍익대 미대 출신의 이른바 ‘미술계 엘리트’조차 졸업생 절반만 작가로 남을 만큼 미술계 현실은 냉혹하다.

이에 박 대표가 생각해낸 건 “소수 자산가들만 누리는 미술작품을 대중으로 확대해 젊은 작가들에게 지속적인 수입을 공유하는 사업모델”이었다. 경영컨설팅 업체를 다니며 해외 경영대학원(MBA) 유학까지 앞두고 있던 그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픈갤러리를 차리게 된 이유에는 ‘계속 이렇게 사는 게 괜찮은 걸까’라는 막연한 생각도 있었다. “학창시절, 국어·영어·수학·과학을 중요하다고들 하지 않나. 그러나 음악·미술·체육도 있다. 사실 사람들에게 음·미·체는 ‘평생 취미’ 같은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체육·음악은 그나마 즐기거나 볼 것이 많지만, 미술은 즐길 만한 게 별로 없다. 사람들에게 미술을 좀더 알게 하고 보게 만들고 의미 있게 하는 것이 처음 세웠던 사업의 목표였다.” 그는 예술인과 큐레이터, 그림을 좋아하는 일반인 등 100명이 넘는 사람을 만나면서 사업을 구체화했다. 평소 알고 지내던 지인에게 사업의 취지를 설명한 뒤 초기 투자를 받았다.

“꿈꿀 수 있는 환경” 만드는 사업

오픈갤러리가 하는 사업은 크게 세 가지다. 우선 30~40대 신진 작가들의 서양화·동양화·팝아트 등 평면화 작품을 일반인에게 빌려주는 대여 서비스를 한다. 작품 크기마다 차이가 있지만, 한 달에 3만5천~25만원의 이용료를 받는다. 일반 가정집뿐만 아니라 병원, 회사 사무실, 로펌 등 대상도 다양하다. 고객이 직접 작품을 고르거나 큐레이터가 추천해준다. 주기적으로 작품을 바꿔주기도 하고, 운송·설치까지 해준다. 대여 서비스를 받은 고객에게 작품을 판매하기도 한다. 대여·판매로 나온 수익은 작가와 나눈다. 그 밖에 해외 미술관 여행에 작품 설명을 곁들여주는 서비스도 한다. “고객 입장에서는 미술품의 중간시장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이를 통해 지금 전체 미술인 가운데 창작활동을 하는 이가 10%라면 적어도 20~30%까지는 늘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박 대표는 미술 분야에 대한 안목은 없다. 사업을 함께 꾸리는 큐레이터들이 작가를 발굴한다. 정보기술(IT) 담당자는 고객이 온라인에서 직접 작품을 고르고 주문하는 인프라를 관리한다. 사업을 시작한 지 갓 1년이 넘었지만, 직원 수만 10명이다. 현재 오픈갤러리를 통해 창작활동을 하는 작가만 100명이 넘는다. 거래된 작품 수는 수백 점이다. 최근에는 새로운 시장도 개척했다. 미국의 유명 감독이 제작하고 있는 미국 드라마를 국내에서 촬영하면서 세트장에 놓기 위해 미술작품을 대여해가기도 했다. 작품 대여료뿐만 아니라 저작료도 받을 수 있어 신진 작가들이 예전엔 상상하지 못했던 수익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미술 영역이 다른 문화 영역과 겹치는 부분이 많다. 틈틈이 고민하면 중·장기적으로 사업을 확장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지속 가능을 위한 철저한 영리 추구

그는 오픈갤러리 활동을 하면서 가장 보람을 느끼는 경우가 “작가들이 고마움을 표현할 때”라고 했다. “한 작가가 사무실로 찾아온 적이 있었다. 작업실 운영비와 재료비 때문에 작가들은 대부분 미술학원 교사나 디자인 관련 아르바이트를 한다. 어렵게 작품활동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 작가가 ‘오픈갤러리 덕분에 더 이상 아르바이트를 안 해도 된다’고 말했을 때 뿌듯했다.” 그는 또 “작가들이 꿈을 꿀 수 있는 환경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사업을 하면서 당연히 돈 버는 게 중요하다. 낯간지럽지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지만 열심히 공부해 하고 싶은 만큼 일하고 그만큼 돈도 받았다. 그런데 미술계 작가들은 이런 환경에 놓여 있지 않다. 우리가 해야 할 사회적 역할 가운데 하나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넘어야 할 산도 많다. 미술품 시장을 바라보는 사회의 곱지 않은 시선이다. 언론 등을 통해 미술품이 편법 증여와 탈세의 소재로 등장하는 탓에 여전히 미술품은 대중이 다가가기 쉽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동안 미술의 본질인 ‘감상’에 치중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다. 고가의 작품이 없기도 하지만 오픈갤러리에서는 작가들로부터 작품을 직접 받고 다른 사람이 산 작품을 재구매하지 않는다. 최대한 감상을 목적으로 구입할 수 있도록 한다. 미술품이 경제력 있는 소수만 향유하는 영역이 됐는데, 결국 미술품을 어떻게 접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에게도 기회를 줘 이해를 넓혀가야 한다고 본다.”

아직까지는 ‘그림을 빌린다’는 개념이 생소한 게 사실이다. 박 대표도 “많은 사람들이 내가 그림을 좋아해도 될까, 부자만 누리는 거 아닐까라는 막연한 생각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인이 미술에 관심을 갖도록 징검다리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미술계에 새로운 생태계를 만드는 작업을 하는 한편 철저하게 ‘영리’를 추구할 계획이다. 좀더 영리를 추구해야 신진 작가들의 활동도 더 많이 지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흔히 사회적 기업을 ‘영리와 비영리의 중간에 있고 사회적 목적에 따른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 오픈갤러리는 어느 정도 맞고 일부는 틀리다. 우리는 영리를 추구한다. 고객에게 대여료를 받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대여료는 작가에게 가고 그 돈으로 작가는 안정적으로 창작활동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회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우리가 돈을 많이 벌어 의미 있게 쓰고 싶은 이유이기도 하다.”

글 김성환 기자 hwany@hani.co.kr
사진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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