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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어진 ‘호갱’ 탈출

단말기유통법, 시행하기도 전에 분리공시제 등 핵심 제도 빠지게 돼…

“제조사·이통사에 선물을 안겨준 셈”
등록 2014-09-30 06:01 수정 2020-05-02 19:27
한겨레 자료

한겨레 자료

‘반값 통신비’ 실현이라는 거창한 목표를 내걸었던 ‘이동통신단말장치 유통구조 개선에 관한 법률’(단말기유통법)이 시행도 되기 전에 반쪽짜리로 전락했다. 이동통신사와 휴대전화 제조사, 각 정부 부처들 사이에선 서로 ‘네 탓’ 공방을 벌인다. 고래 싸움에 등 터진 소비자만 또 ‘호갱’(만만한 고객을 뜻하는 은어)이 될 판이다. 대체 단통법(단말기유통법)을 둘러싸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단통법이 나온 배경은 우리나라의 기형적인 휴대전화 유통시장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9월26일부터 판매를 시작한 삼성전자 갤럭시노트4의 국내 출고가는 95만7천원이다. 하지만 제값을 다 내고 휴대전화를 사는 소비자는 없다. 휴대전화 제조사와 이동통신사가 보조금을 지급하기 때문이다. 보조금은 천차만별이다. 신규 가입인지, 기기 변경인지에 따라, 어느 대리점을 통해 어느 시간대에 사느냐에 따라, 어떤 요금제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보조금은 20만~70만원까지 차이가 난다. 계산기를 제대로 두드리지 않았다가는 자칫 손해를 본다. 출고가 95만원 정도면 보통 50만원의 보조금이 붙는다. 방송통신위원회는 2010년 이후 보조금 상한선을 27만원으로 묶어뒀지만, 이통 3사는 수백억원대 과징금과 영업정지도 아랑곳하지 않고 1년에 보조금을 포함한 마케팅비로만 8조원을 쏟아붓고 있다.

삼성전자 등 제조사 앞에 무뎌진 칼

보조금은 혼탁한 휴대전화 유통시장의 원인이자 결과다. 미래창조과학부에 따르면, 우리나라 휴대전화 교체 주기는 15.6개월로 세계에서 가장 짧다. 휴대전화 평균 공급가(415달러)도 세계 1위다. 비싼 휴대전화를 자주 파는 대가로, 삼성·LG·팬택 등 제조사는 이통사와 대리점에 ‘단말기 판매 장려금’을 준다. 여기에다 이통사도 지원금을 보탠다. 대신 이통사들은 소비자한테서 비싼 요금을 받아낸다. 우리나라 가계소비지출에서 통신비 비중(4.3%)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1위다(2013년 7월 기준). 보조금은 제조사와 이통사의 합작품이다. 휴대전화 제조사와 이통사가 소비자의 부담을 덜어주는 척 ‘눈 가리고 아웅’ 하면서, 고가의 스마트폰을 고가의 요금제로 팔아 이익을 챙겨가는 구조인 것이다.

이같은 왜곡된 유통 구조를 바꾸기 위해 미래부와 방통위는 ‘단통법’이라는 칼을 꺼내들었다. 기존 전기통신사업법을 근거로 이통사만 제재하는 것만으로는 효과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우선 이통사와 제조사가 각각 휴대전화 출고가와 보조금 액수를 정부에 제출하도록 했다. 특히 방통위 고시를 통해 이통사 지원금과 제조사 장려금을 따로 공시하도록 강제할 작정이었다. 이른바 ‘분리공시제’다. 만약 갤럭시노트4를 산 고객이 받는 보조금이 30만원이라면, 제조사가 15만원, 이통사가 15만원을 냈다는 걸 홈페이지 등을 통해 공시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동안 보조금 전체 규모와 분담 비율 등은 제조사와 이통사, 대리점 간에 힘의 역학관계에 의해 결정돼왔다.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져 있는 업계 비밀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정부는 보조금을 투명하게 하면, 소비자의 합리적인 선택을 돕는 한편 휴대전화 가격 거품을 걷어낼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제동이 걸렸다. 그것도 단통법 시행일인 10월1일을 불과 일주일 앞두고서.

지난 9월24일 국무총리실 산하 규제개혁위원회는 단통법 고시안 가운데 ‘분리공시제’ 조항을 삭제하도록 방통위에 권고했다. 상위법인 단통법의 위임 범위를 넘어선다는 이유에서다. 사실 단통법 제정 때부터 충분히 예상된 수순이었다. 이통사와 제조사의 자료 제출 의무를 정해놓은 단통법 제12조 1항 마지막 문장은 ‘다만’이라는 단어 뒤로 이렇게 이어진다. “이통사가 제출하는 자료는 휴대전화 제조사마다 이통사에게 지급한 장려금 규모를 알 수 있게 작성되어서는 안 된다.” 법 제정 때부터 삼성전자가 강력하게 요구해 들어간 문구다.

보조금 상한선은 오히려 올라

삼성전자는 왜 분리공시제에 반대하는 걸까? 한 이통사 임원의 말이다. “삼성전자는 자기 물건을 많이 팔아주는 대형 대리점에 장려금을 더 많이 준다. 그런데 삼성전자가 장려금을 각각 얼마씩 준다는 게 공개돼버리면, 대리점을 통제할 채찍과 당근이 없어진다. 이는 삼성전자 휴대전화 판매량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삼성과 경쟁관계에 있는 LG전자는 분리공시제에 반대하다가, 최근 찬성 입장으로 돌아섰다. 삼성전자 쪽은 영업비밀에 해당하는 국내 판매장려금 규모가 공개되면 해외 이통사도 같은 요구를 해올 수 있다는 이유 등을 들어 분리공시제를 반대하고 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분리 공시 여부는 소비자 혜택과는 무관하다. 소비자 입장에선 보조금을 얼마나 더 받느냐가 중요하지, 제조사와 이통사가 얼마를 지원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지 않느냐”고 말했다. 미래부와 방통위, 시민사회단체 등에서 “삼성의 로비로 인해 분리공시제가 무산됐다”는 비판이 쏟아져나오는 것을 삼성 쪽은 억울해하는 분위기다.

안진걸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은 “정부가 결국 이통사와 제조사한테 각각 하나씩 선물을 준 셈”이라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단통법 제정 때부터 필사적으로 막으려 했던 분리공시제 도입을 결국 막아냈다. 그렇다고 분리공시제 도입을 찬성했던 이통사에 손해도 아니다. 보조금 상한선이 27만원에서 30만원(대리점 보조금까지 합치면 최대 34만5천원)으로 오른데다, 단통법 시행 뒤 고객이 보조금 최대치인 34만5천원을 받으려면 새 휴대전화를 구입해 월 9만원 이상(무약정 기준) 요금제에 가입해야 한다. 안 사무처장은 “단통법이 시행되면 소비자 차별이 없어진다고 했는데, 이통사에 대놓고 고가 요금제 가입을 권유하라는 길을 열어준 거다. 소비자 입장에선 (요금이 더 비싸지는) 절대적인 차별이 더 심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물론 단통법 시행 효과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이통사 대리점을 통하지 않고 온라인 쇼핑몰 등을 통해 자급폰이나 외국 휴대전화를 구입한 소비자가 보조금을 못 받는 대신 요금 할인을 받을 수 있도록 해줬기 때문이다. 요금제, 거주 지역, 가입 유형 등의 이유로 부당하게 보조금을 차별받을 여지도 낮아진다. 인터넷 게시판을 뒤지거나 발품을 팔아 조금이라도 보조금을 많이 주는 곳을 찾아다녀야 하는 수고로움이 다소 줄어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와 같은 방식의 불법 보조금이 사라질지는 의문이다. 한현배 아주대 겸임교수(카이스트 통신공학 박사)는 “혼탁한 시장을 정화시키겠다고 만든 단통법이 규제개혁위원회에 막혀서 용두사미가 됐다. 지금 통신시장은 이동통신사의 과점, 휴대전화 제조사의 독점이 가장 큰 문제다. 이게 깨질 수 있는 구조로 가야 통신비도 내리고 휴대전화 가격도 내릴 수 있다”고 말했다.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가진 신규 사업자가 시장에 끼어들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줘야 한다는 뜻이다.

한국자유총연맹이 제4이통사?

그런데 다소 뜬금없는 곳에서 ‘대안’이라며 나섰다. 규개위가 단통법을 반쪽짜리로 만들어버린 다음날인 9월25일, 대표적인 보수 관변단체인 한국자유총연맹이 4번째 이동통신사업자가 되겠다고 알리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자본금 1조원을 이미 마련했고, 올해 안에 사업 허가를 받을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업에 나선 이유는 “박근혜 정부의 대선 공약인 ‘반값 통신비, 단말기값 인하’를 실현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박근혜 정부에서 ‘반값 통신비’도 경제민주화처럼 점점 산으로 가려는 모양이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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