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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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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 생각’이 실마리다

등록 2012-08-16 06:36 수정 2020-05-02 19:26

안철수씨의 책은 대선 정국에 큰 파장을 일으켰지만, 막상 그 책의 내용에 대해서는 아직 이렇다 할 논평이나 주장이 나온 것 같지 않다. 이 책의 충격에 심사가 편치 않을 수밖에 없는 여러 다른 후보들 쪽에서 부정적인 촌평만 몇 개 나왔을 뿐이다. “내용이 새로운 것이 없다”라든가 “여러 이야기를 짜깁기한 것에 불과하다” “모두 주워들은 것뿐 자기 생각이 없다” 등의 주장이다.

경제만 아니라 사회·정치로도 ‘따라잡기’ 전략
여러 평가가 있을 수 있지만, 나는 이 책이 짜깁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읽은 바로는, (김영사 펴냄)은 지난 50년간 고도성장을 구가하며 달려온 한국 자본주의 모델에 대한 안철수씨 나름의 성격 파악을 담고 있으며 그러한 기본 인식으로부터 ‘복지·정의·평화’라는 삼강(三綱)을 논리적으로 도출하고 있다. 그리고 각각의 쟁점에 대해 논의하고 풀어가며 잔그물을 짜나가는 과정에서도 그러한 인식과 논리는 나름의 일관성을 가지고 독특한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이 과연 얼마나 옳은 것인가, 그의 해법이 얼마나 현실성 있는가에 대해서는 지켜볼 일이요 또 많은 평가가 엇갈릴 수 있다. 하지만 최소한 이 책이 갖고 있는 기존 한국 자본주의 모델에 대한 일관된 문제의식이 여러 정치적 공세와 담론에 밀려 무시되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지면상 인용을 할 수는 없으나, 이 책 82쪽에 나온바 한국 자본주의가 그동안 취해온 ‘추격자’(Fast Follower) 전략이라는 성장 전략에 대한 안철수씨 스스로의 비판적 평가는 이 책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이루고 있다고 보인다. 경제발전론에서 이른바 ‘따라잡기 성장 모델’(Catch-up Growth Model)이라고 하는 것은 일본과 한국 등 동아시아 자본주의의 특징을 말한다. 역사에서 20세기 후반의 동아시아 산업화는 18세기 말의 영국, 19세기 말의 미국과 독일에 이어 세 번째 물결이라고 불리지만, 그 중요한 특징은 기존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산업기술과 심지어 사회제도까지 그대로 모방해 답습하는 과정이었다. 앞의 두 경우 영국은 말할 필요도 없고 ‘후발’ 자본주의 국가였던 미국과 독일도 중후장대 산업의 확장이라는 점에서 놀랄 만한 기술혁신을 이루었던 것과 크게 대비되는 지점이다.

<안철수의 생각>에서 펼친 그의 인식과 논리는 나름의 일관성을 가지고 독특한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 사진 한겨레 강재훈

<안철수의 생각>에서 펼친 그의 인식과 논리는 나름의 일관성을 가지고 독특한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 사진 한겨레 강재훈

이러한 경제성장 전략은 산업 및 경제뿐만 아니라 사회정치적 구조에서도 그 모습을 결정적으로 형성하고 말았다. 먼저 이미 존재하는 산업 및 경제성장의 ‘매뉴얼’을 수입하고 또 그것을 실현하는 데 결정적 도움을 줄 수 있는 강대국들, 특히 미국과의 긴밀한 전략 동맹은 필수적인 일이며, 이는 원하든 원치 않든 미국이 주도하던 냉전의 지정학적 갈등에 일정 정도 말려들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수입된 매뉴얼을 가져오면 국내의 여러 주자들 중 가장 성공적이라고 보이는 소수의 ‘선수’들을 집중적으로 지원한다. ‘집중과 선택’ ‘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습니다’ ‘될 사람을 밀어주자’ 등의 말이 한국 사회를 풍미하게 된 원인이며, 이것이 한국과 일본에서 재벌이나 기업집단 체제가 굳건히 자리잡게 된 원인이기도 하다.

대표주자에게는 국가와 사회가 총력 지원을 하지만 경쟁에서 밀려난 이들은 대표주자를 뒤에서 밀어주는 ‘일꾼’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선별 과정이 공정한지 투명한지는 문제가 되는 법이 없었다. 한국에선 독재 시절부터, 일본의 경우 전쟁 전의 제국주의 시대부터 내려오는 지배 블록과 긴밀한 위치에 있는 이들은 온갖 특혜를 얻을 수 있었다. 몇 가지 매뉴얼을 대표선수들이 실행에 옮기면 온 사회가 이에 부응하는 경제성장의 총동원 체제가 마련된다.

보편증세와 결합된 보편복지 그리고

이는 교육제도에도 깊은 영향을 끼친다. 우선 창의성이나 고도의 천재성 같은 것은 필요 없다. 그 ‘매뉴얼’을 이해하고 한국 상황에서 실행할 수 있을 정도의 지적 능력과 훈련을 갖춘 이들- 엘리트라기보다는 간부들(Cadres)에 가깝다- 을 짧은 시간 안에 육성해서 충분히 공급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경쟁 과정에서 탈락한 이들은 엘리트 혹은 간부들의 지휘에 순종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자리로 가게 된다. 중등교육 과정은 이렇게 수많은 학동들을 일할 사람과 일 시킬 사람으로 나누는 ‘입시 교육’이 본질이 된다. 그렇게 해서 뽑힌 학생들로 채워지는 소수의 ‘일류대학’은 더 높은 엘리트 자리로 갈 사람들끼리의 네트워크 형성의 장이 되어 ‘학벌’을 구성한다.

이 책은 이러한 기존 한국 자본주의 성장 모델이 과연 21세기의 변화된 세계경제 환경에서도 작동할 수 있을지, 그래서 고도성장의 신화를 이어갈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를 깔고 있다.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한국 경제는 이제 따라잡기 전략을 계속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며, 변화된 현재 세계경제의 산업구조는 따라잡기 전략이 아니라 ‘선도자(First-mover) 전략’을 취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82쪽). 이렇게 되면 덩치 큰 소수의 대표선수를 집단으로 밀어주는 것이 아니라 가급적 많은 사람들을 더 능동적이고 창의적·진취적인 존재로 개발하고 교육해 더 많은 아이디어와 모험에 도전할 수 있도록 리스크를 떠안아주는 형태로 사회 전체를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복지와 정의로운 경제 질서라는 것이 지상 과제로 도출된다. 복지는 지금 누구나 이야기하는 단순한 보편복지가 아니라, 보편증세와 결합해 선별적 복지와 보편적 복지를 적절하게 혼합하는 행태가 추천된다. 경제민주화 또한 화끈한 ‘재벌 때리기’가 아니라 산업구조 자체의 연성화라는 장기적 관점에서 기업집단법을 제정하는 논의로 이어지게 된다 등등.

때가 때이다 보니 강조해야겠다. 안철수씨를 지지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대통령 자리는 단지 한국 사회에 대해 나름 고민 좀 했다고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또 (이런 식으로 이 책을 이해하는 것이 옳다는 전제하에서) 그의 생각과 논리가 옳은지, 과연 현실성이 있는지도 많이 따져봐야 한다. 나 자신도 이렇게 다분히 실리콘밸리를 염두에 둔 것 같은 미래의 연성화된 사회 및 산업구조가 과연 한국 사회의 어느 만큼이나 포괄할 수 있을지 회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굳이 내가 이 귀한 지면을 빌려서, 엉뚱한 정치적 오해의 위험까지 무릅쓰며 이 책이 짜깁기가 아님을 지적하는 이유가 있다.

베끼다 구별이 힘든 상황이 된 지금

대통령 선거라는 장에서, 드디어 기존 한국 자본주의 모델이 과연 앞으로도 유효한 것일지라는 근본적인 질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어서다. 얼마간 복지를 둘러싼 논쟁이 정치권을 달구는가 싶더니 별 결론도 못 본 상태에서 금세 재벌과 경제민주화 문제로 옮아갔고고 지금은 그나마도 논의가 실종되었다. 선거판에는 그저 그렇고 비슷비슷한 공약만 난무해 이제는 이쪽저쪽을 구별하기도 힘들게 돼가고 있다. 어느새 정책이나 노선은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와 모순에 대한 사려 깊은 진단에 기반해 나름의 이념과 가치에 비추어 나온 해결책이라기보다는 그저 이쪽에서 나온 정책을 저쪽도 베껴가고 그쪽도 입에 담다가 썰렁해지면 팽개치면 되는 일회용품이 돼버린 감이 있다. 누군가는 이야기해야 한다. 지금 격변하는 세계경제의 조건에서 기존 한국 자본주의 모델을 앞으로도 계속할 수 있을지는 민족 전체의 운명이 걸린 큰 문제이며, 이번 선거는 그 문제를 풀기 위한 실마리가 마련되어야 할 장이라고.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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