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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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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만에 어른거리는 카드대란 그림자

한 명당 평균 카드 수 4.6장, 카드론·카드 모집인 40% 급증…

‘약탈적 대출시장’ 규제 없으면 제2의 카드대란 올 수도
등록 2011-01-27 08:00 수정 2020-05-02 19:26

요즘 들어 신용카드에서 데자뷔를 느낀다. 왠지 눈에 익은 현상을 보는 듯한 바로 그 느낌이다. 1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국민의 정부 끝 무렵인 2002년 한국 경제는 불투명한 대외여건 속에서도 7%대의 높은 경제성장률을 올렸다. 2001년 3.8%에 견주면 2배 가까이 뛰어오른 수치다.
이 화려한 지표 뒤에는 신용카드가 숨어 있었다. 국민의 정부 시절, 내수 진작을 위해 동원한 게 카드 부양책이었다. 신용카드 현금서비스 한도가 폐지되고 길거리에선 무차별 회원 모집이 벌어졌다.
 
‘개도 물고 다닐 정도’로 풀린 카드
시중에는 엄청난 카드가 풀렸다. 2002년 당시 시중에 돌아다니던 신용카드 수는 1억480만 장. 경제인구 한 명당 4.57장의 카드를 지갑에 넣고 다니는 셈이었다. ‘돌아다니는 개도 신용카드를 입에 물고 다닌다’는 농담이 나올 정도였다.
정부는 소비가 경제를 살리는 길이라며 국민들 손에 신용카드를 쥐어주고 카드 사용을 독려했다. 카드업체들은 정부의 부양책을 등에 업고 서민을 대상으로 한 30%의 고금리 카드대출로 엄청난 이득을 챙겼다.
1998년 64조원 규모였던 카드 이용 실적은 2002년 623조원으로, 현금대출은 33조원에서 358조원으로 늘었다. ‘카드 버블’이었다.
과잉 소비의 힘으로 7% 성장을 이룬 우리나라 경제는 참여정부가 들어서자마자 심각한 부작용을 드러낸다. ‘신용불량자’로 불린 채무불이행자가 줄줄이 양산되기 시작했다. 2003년 초부터 매월 10만 명의 신규 채무불이행자가 쏟아져나왔다. 은행연합회는 “외환위기 때도 한 달에 8만 명을 넘은 적은 없다”며 우려를 나타내기까지 했다. 1998년 160만 명이던 채무불이행자는 2004년 4월 383만 명으로 정점을 기록했다. 불과 3년여 만에 2배로 늘어난 것이다. 이들 중 대부분은 2개 이상의 금융기관에서 채무불이행자로 등록된 다중채무자였다.
채무불이행자 문제는 단순한 도덕적 해이가 아니라 ‘약탈적 대출’(predatory lending)에서 근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약탈적 대출은 원리금을 갚을 수 없는 채무자에게 돈을 빌려줘 이득을 취하는 행위를 말한다.
외환위기를 겪은 뒤 금융기관들은 안전성과 수익성이 높은 가계부문으로 눈을 돌렸다. 기업대출 대신 가계대출에 ‘올인’ 한 것이다. 대신 금융기관들은 문턱을 크게 높였다. 아파트·주택과 같은 담보가 있어야만 대출을 해줬다. 담보가 없는 서민, 신용도가 낮은 사람들은 돈을 빌리기 더욱 힘들어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별다른 담보를 요구하지 않는 신용카드 현금서비스는 서민들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외환위기 뒤 나빠진 일자리 사정으로 실직한 서민들은 생활비와 사업자금, 병원비를 대기 위해 카드사들이 뿌려준 카드로 현금서비스를 받았다.
하지만 현금자동입출금기(ATM)에서 카드를 긁기만 하면 ‘드르륵’ 하며 쏟아져나온 돈은 30%에 육박하는 고금리였다.
채무불이행자 수 그래프가 높아졌고, ‘일가족 동반자살’이라는 참담한 뉴스도 빈번하게 전해졌다. 일가족이 여관에서 약을 먹거나, 부모가 자녀들과 함께 고층아파트에서 뛰어내리는 일이 비일비재해졌다. 200만원 남짓한 카드빚 때문에 ‘신체포기각서’를 써야 하는 여대생도 있었다. 전체 범죄 가운데 경제범죄 비중이 1999년 18.5%에서 2003년 23.5%로 늘었다. 같은 기간 경제 문제로 이혼하는 부부 비율도 7.1%에서 16.4%로 높아졌다.
 
카드론 금리, 현금서비스와 겨우 2%포인트 차

» 현재 2003년의 ‘카드 대란’ 데자뷔가 느껴진다. 카드사는 카드 대란 뒤 수익 악화를 이유로 수수료를 대폭 인상했다. 카드 대란 당시 서울 서초동 비씨카드 본사 앞에서 전국가맹점사업자단체협의회 회원들이 수수료 인상에 반대하며 카드 모형물을 부수고 있다. 한겨레 김종수 기자

» 현재 2003년의 ‘카드 대란’ 데자뷔가 느껴진다. 카드사는 카드 대란 뒤 수익 악화를 이유로 수수료를 대폭 인상했다. 카드 대란 당시 서울 서초동 비씨카드 본사 앞에서 전국가맹점사업자단체협의회 회원들이 수수료 인상에 반대하며 카드 모형물을 부수고 있다. 한겨레 김종수 기자

이처럼 카드 대란은 신자유주의 정책의 일환으로 금융규제가 풀리면서 약탈적 대출시장이 형성된 결과물인 셈이다. 잘못된 경제정책과 카드사 과당경쟁의 희생자들이 바로 채무불이행자였다.

강경훈 동국대 교수(경영학)는 “2001년께 신용카드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한 금융감독위원회에서 신용카드 현금대출 제한을 건의했지만 번번이 규제개혁위원회 등의 반대에 부딪혀 무산됐다”고 말했다.

결국 참여정부는 2004년 3월10일 채무불이행자 종합대책을 내놓는다. 은행의 채무 재조정과 배드뱅크 설립, 법원의 개인회생제 및 개인파산제 도입 등이 대책의 뼈대다. 이 대책이 나온 뒤에야 카드 사태는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최근 카드 대란의 데자뷔가 다시 어른거린다. 지난해 이명박 정부는 불투명한 대외여건 속에서도 6.1%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수출이 늘어난 덕분이기는 하지만, 카드업계의 과당경쟁 역시 내수를 키웠다.

카드업계는 카드 대란 이후 외형 위주의 과당경쟁을 자제해왔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카드업체들은 과열경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카드 관련 각종 지표는 이미 ‘빨간불’이다. 지난해 경제활동인구 한 명당 카드 수는 평균 4.6장으로, 카드 대란 직전인 4.57장을 넘어서며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 신용카드 모집인도 5만 명을 넘어서 한 해 전보다 40% 이상 늘었다. 신용카드 모집인 수가 크게 증가하면서 불법 영업행위도 기승을 부리고 있다.

금융위기 뒤 미국에선 카드빚이 줄어들고 있는 반면, 우리나라는 오히려 늘고 있다. 미연방준비제도(FRB·연준) 자료를 보면, 지난해 11월 미국에선 신용카드 채무가 43억달러 감소했다. 27개월째 순상환이다. 10월에는 54억달러 줄었다. 반면 우리나라의 카드론 규모는 지난해 9월 말 현재 18조원으로 전년 같은 기간에 견줘 40%가량 늘어났다. 카드 대란 이후 최대치다. 지금과 같은 추세가 지속되면 몇 년 안에 ‘제2의 카드 대란’ 사태가 도래할 수 있다는 우려마저 나온다.

약탈적 대출도 여전하다. 여신금융협회의 신용카드사별 이자율 현황을 보면 카드론은 최고 27.90%에 이른다. 현금서비스 최고 금리가 29.83%인 것과 견줘보면, 최고금리 차이는 2%포인트 정도에 그친다. 카드사들은 보통 5%대 금리의 카드채를 발행해 자금을 조달한 뒤, 카드론 서비스를 해주고 있다.

강경훈 교수는 “제2의 카드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정책 당국이 과열된 카드시장에 대해 선제적인 금융규제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홍종학 경원대 교수(경제학)는 “현 정부의 경제관료들이 약탈적 대출이란 개념을 인정하지 않는데다 대출에 규제를 가하는 것 자체를 달가워하지 않는 게 문제”라며 “대출 능력이 안 되는 사람에게 무리하게 대출을 해줬을 때 그 금융기관에 책임을 물리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홍 교수는 “미국에선 공정채권추심법이라든가 채무자에게 관대한 파산법 또는 약탈적 대출을 직접적으로 처벌하는 채무자 보호제도를 통해 약탈적 대출을 억제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약탈적 대출에 관대한 MB 정부

‘신용불량자’라는 표현은 2004년 말 법률 개정으로 사라졌지만, 대신 등장한 ‘과다채무자’와 ‘채무불이행자’라는 이름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 어른거리고 있다.

정혁준 기자 한겨레 경제부문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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