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부자 감세, 빈자의 미래가 저당 잡히다


올해 베이비붐 세대의 본격적인 은퇴 시작,
정부의 감세는 연금으로 지급할 돈을 부유층에게 깎아주는 셈
등록 2010-01-21 02:17 수정 2020-05-02 19:25
지난해 6월 이명박 대통령 내외가 ‘아이 낳기 좋은 세상 운동본부’ 출범식에 참여해 다문화가정, 다둥이가정, 입양가정, 맞벌이 부부 임산부들과 환담을 나누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지난해 6월 이명박 대통령 내외가 ‘아이 낳기 좋은 세상 운동본부’ 출범식에 참여해 다문화가정, 다둥이가정, 입양가정, 맞벌이 부부 임산부들과 환담을 나누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2010년은 ‘베이비붐 세대의 본격적인 은퇴’(삼성경제연구소 ‘2010년 국내 10대 트렌드’ 보고서)가 시작되는 해다. 베이비붐 세대는 흔히 ‘뱀이 삼킨 돼지’로 묘사된다. 거대한 뱀이 돼지를 삼켜 배가 불룩해지듯 평평한 인구분포 곡선에서 거대한 돌출부가 생긴다. 이것이 베이비붐 세대다. 베이비붐 세대가 나이가 들면서 이 돌출부는 점차 아래쪽으로 이동한다. 돼지코가 더 아래쪽으로 움직이면 뱀은 사회·경제적 문제에 당면하게 된다. 노년층 사회보장 비용을 어떻게 충당할 것인가?

한국에서는 ‘저출산’과 ‘노인’이라는 인구통계적 홍수가 일어나고 있다. 생산가능인구(15∼64살)는 2016년부터 감소세로 돌아서고, 2005년에 생산가능인구 7.9명당 노인 1명을 부양했다면 2020년에는 4.6명이, 2050년에는 1.4명이 노인 1명을 먹여살려야 한다.

“첫아이는 확실히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일생에서 구입하고 싶어하는 상품 중 가장 비싼 ‘경제적 재화’이다.” 이른바 ‘지대 추구’ 개념을 창안한 고든 털록 교수(미국 조지메이슨대)는 에서 수요·공급 그림을 통해 ‘자녀 생산’ 곡선을 그리고 있다. 다른 조건이 모두 같다면 출산·양육 비용이 감소할수록 공급, 즉 출산 자녀 수가 증가하게 된다. 반면 자녀를 대신해 즐거움을 주는 자동차와 오락기구 가격이 떨어지면 출산율은 감소하게 된다. 가정에서 생산 혹은 소비되는 다른 재화들의 가격과 출산의 비용·편익을 서로 비교해 자녀를 ‘생산’할지 말지 선택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출산의 기회비용(자신이 포기해야 할 시장임금소득이나 더 많은 여가시간 등)과 자녀가 제공하는 편익을 동시에 고려한다. 자녀 생산 역시 새로운 자동차나 마르티니 명품 가방을 구입하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이처럼 털록은 출산도 시장논리로 얼마든지 설명될 수 있다고 말한다.

시장의 힘은 대개 부유층에 유리한 쪽으로 작용하면서 종횡무진으로 질주하기 마련이다. ‘2008 출생통계’(통계청)에 따르면, 서울 강남구의 합계출산율(여성 1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자녀 수)은 0.82명으로, 우리나라 전체 합계출산율(1.19명)보다 낮다. 전남 강진 등 출산율 상위 10위권 시·군·구의 출산율은 1.70∼2.21명이었다. 농촌 지역이거나 공단이 몰려 있는 산업도시일수록 출산율이 높다. 자녀는 미래의 생산인구들이다. 나아가 뱀이 직면하게 될 노인 사회보장 비용 문제를 감당해야 할 세대가 된다. 하지만 노부모 부양이라는 자녀의 역할을 연금·보험 등 사회보장제도가 대체하면서 자녀는 더 이상 ‘좋은 투자재’로 여겨지지 않는다. 부유층일수록 더욱 그렇다.

국민연금제도는 오늘날 근로소득자들에게 “당신들이 공동 출자해 오늘날의 은퇴자들을 보살피고 있듯, 나중에 은퇴하면 미래 세대가 당신들을 보살펴줄 것”이라고 약속하는 것이다. 지금 세대와 뒷세대가 맺는 신탁기금 협정인데, 일종의 ‘행운의 연쇄 편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부유층의 저출산을 감안하면, 저소득층에서 태어난 상대적으로 많은 자녀들이 훗날 자녀가 없는 남의 집 부유층 노인들을 부양하는 격이 된다. 더구나 부유층일수록 빈곤층보다 오래 산다는 것이 인구통계학적인 사실이고, 그 결과 부자가 더 오래 사회보장기금의 수혜를 누리게 된다.

그럼에도 국민연금을 폐지하자는 주장은 반드시 경계해야 한다. 국민연금은 저소득층일수록 기금 기여분에 비해 급여액이 많아지는 ‘부등가교환’에 뿌리를 두고 있고, 따라서 저임금 노동자일수록 수혜율이 유리하도록 설계돼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출산율은 전세계 국가 중 최악의 수준으로 떨어지고 있는데, 뱀의 뱃속에 있는 돼지는 올해 이미 아래쪽으로 가 있다. 국민연금재정 위기가 닥치면 연금 급여를 대규모 삭감하든지 국가재정으로 해결해야 한다. 그러나 ‘신성불가침의 시장’을 주술처럼 외는 이명박 정부는 부자에게 세금을 깎아주는 막대한 감세를 줄기차게 밀고 나가고 있다. 노인인구가 늘면서 저축을 더 해야 하는 판에, 부유층의 소비만 계속 장려하고 있는 셈이다. 해야 할 일을 정반대로 하고 있는 격인데, 부담은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면 그만인가.

생산인구 부족으로 인해 나중에 국가세금을 지원받아 연금을 지급해야 하는 상황이 닥친다고 가정해보자. 그때 은퇴자들에게 연금으로 지급할 돈을 지금 정부가 부유층에게 대규모 세금을 깎아주는 데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또 몇 년 뒤 우리가 내야 할 더 많은 세금 중 일부는 부자 감세 때문에 쌓인 2010년 정부 부채의 이자 지급 비용을 충당하는 데 쓰이게 될 것이다. 이처럼 저출산과 베이비붐 은퇴는 부자 감세와 얽히고설켜 있다. 저출산 부자들의 세금을 깎아 더 많은 자동차를 구입하도록 유도하지 말고, ‘소비재’로서 자녀가 갖는 매력을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건 어떨까. 자녀는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귀엽고 사랑스러운 소비재 아닌가.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