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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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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폰의 두 얼굴

(명) MS독점 견제·국내사 경쟁 촉진·콘텐츠 시장 확대
(암) 국내 업체 타격·요금 상승 효과·업무 강도 강화 활용
등록 2009-12-30 07:08 수정 2020-05-02 19:25
메기

메기

미꾸라지를 모아 기르면, 미꾸라지들의 몸이 점점 둔해져 활동량이 줄어들고 생기를 잃게 된다. 미꾸라지의 천적인 메기를 한 마리 수족관에 넣으면 상황은 변한다. 처음에는 맥없이 메기의 먹이가 되던 미꾸라지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재빠르게 움직이고 살도 통통하게 찐다.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는 쌍권총을 차고 집을 나선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쌍권총을 ‘좌사우포’라고 일컬었다. 왼쪽엔 사과(애플의 아이폰), 오른쪽엔 포도(블랙베리)라는 뜻이다. 블랙베리폰을 쓰다 아이폰이 나오자 곧바로 아이폰도 구입했다. 그는 2개의 스마트폰을 쓰는 것에 대해 “왜곡된 한국 정보기술(IT) 정책의 폐해를 체험하고 무선통신 세계의 변화와 발전을 체감하기 위해서”라고 강조했다.

‘IT 쇄국주의’로 한국에만 뒤늦게 소개

아이폰이 우리나라 이동통신 환경을 흔들어놓고 있다. 그동안 우리나라 휴대전화 이용자들은 손쉬운 고객이었다. 일부 휴대전화 업체들은 해외 출시 제품에 견줘 내수용 사양을 낮춰 판매하기도 했다. 무선인터넷 통신 요금을 지나치게 높게 책정해 10분짜리 동영상 하나 내려받으려면 3만~4만원이나 내야 했다.

정부의 ‘IT 쇄국주의’ 정책으로 2007년 출시된 아이폰을 유독 우리나라에선 쓰지 못했다. IT 업계 사람들은 이를 ‘갈라파고스 신드롬’이라고 했다. 2009년 7월 는 기술 혁신으로 최신 기능을 선도해온 일본 휴대전화가 해외 시장에서 외면당하고 있는 현실을 빗대 갈라파고스 신드롬이라고 표현했다. 다윈이 갈라파고스섬에서 본래 종과 다르게 진화한 생물을 발견한 것처럼, 일본 업체들이 세계 시장과 동떨어진 채 진화해왔다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스마트폰 시장이 폭발적인 성장을 거두는 동안 한국에서 스마트폰이 차지하는 비중은 고작 1%였다. 쇄국주의의 빗장을 푼 아이폰이라는 용병은 우리나라 스마트폰 시장 파이를 키우고 있다. 그동안 형편없던 무선인터넷 서비스에도 변화의 바람을 불러일으킬 전망이다.

KT가 아이폰 개통을 시작한 지 열흘 만에 가입자는 10만 명을 넘어섰다. 소비자들은 짭짤한 혜택을 누린다. SK텔레콤과 KT의 스마트폰 보조금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출고 가격이 100만원 가까운 스마트폰을 거의 공짜 수준으로 구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폰3GS의 출고가는 80만원 정도다. 하지만 월 6만5천원짜리 정액요금제에 가입하면 13만2천원에 살 수 있다. 여기다 대리점에서 보조금을 얹어주기 때문에 실제 구입가는 공짜다. 삼성의 최신 스마트폰인 T옴니아2도 90만원대에 출고된다. 월 6만5천원짜리 정액요금제로 2년 약정을 하면 6만6천원에 살 수 있다. 대리점 보조금을 받으면 거의 공짜 수준이다.

2009년 11월28일 아이폰을 예약한 시민들이 공식 론칭쇼가 열리는 서울 잠실실내체육관 앞에서 줄을 서 있다. ‘아이폰’을 사용하는 고객은 KT가 보유한 1만3천여 네스팟존에서 무료로 인터넷 접속을 즐길 수 있다. 연합

2009년 11월28일 아이폰을 예약한 시민들이 공식 론칭쇼가 열리는 서울 잠실실내체육관 앞에서 줄을 서 있다. ‘아이폰’을 사용하는 고객은 KT가 보유한 1만3천여 네스팟존에서 무료로 인터넷 접속을 즐길 수 있다. 연합

아이폰은 업계에서도 만만찮은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삼성전자가 개그맨을 동원해 자사 T옴니아2와 아이폰을 비교하는 패러디 동영상을 제작한 것 자체가 심상찮은 조짐이다. 최지성 삼성전자 사장은 2009년 11월23일 서울 조선호텔에서 열린 ‘전파방송 콘퍼런스 2009’ 행사에서 이석채 KT 회장을 만나 “최소한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게 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며 항의하기도 했다. KT가 아이폰에 40만∼50만원의 높은 보조금을 주고 있는 데 따른 불만을 드러낸 것이다.

2009년 11월 국내 휴대전화 판매 규모는 145만 대로 10월(137만 대)에 견줘 5.8% 늘었으나 이 가운데 삼성의 점유율(50%)은 오히려 10월(56%)보다 낮아졌다. 10월 초 출시된 옴니아2는 두 달 동안 7만여 대가 팔렸는데, 아이폰은 일주일 만에 9만여 대의 판매 기록을 세웠다.

독립 SW 개발자에게도 기회

아이폰은 마이크로소프트(MS)의 독주에도 제동을 걸었다. 현재 대부분의 인터넷 사이트는 웹표준보다 MS 소프트웨어에 맞춰져 있다. 인터넷으로 은행 일을 볼 때도 반드시 MS의 웹브라우저인 ‘익스플로러’만을 써야 한다. 하지만 아이폰이 나오면서 인터넷뱅킹도 달라지고 있다. 기업은행과 하나은행이 아이폰을 이용해 인터넷뱅킹이 가능한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아이폰의 운영체제는 애플의 ‘맥 OS’ 기반이다.

음악·영화·게임·지도 등 각종 콘텐츠를 내려받을 수 있는 온라인 장터가 커지면 개발자들도 자신의 실력을 뽐내고 돈도 벌 수 있게 된다. 온라인 장터는 거대 기업보다 오히려 독립 개발자에게 유리하다. 오랜 시간 많은 인력을 투입한 대작보다 아이디어로 승부를 겨루는 작은 프로그램들이 수익성에서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국내 시장에 갇혀 있던 소프트웨어 개발업체와 1인 개발자들이 해외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도 확장될 것으로 보인다. 물론 다른 나라의 아이디어 넘치는 제품들과 무한 경쟁을 벌여야 한다는 고민도 있다.

한 이동통신사 임원은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이 1993년 신경영을 주창하면서 ‘메기론’을 들고 나왔다. 메기라는 위협 요인이 있어야 미꾸라지들이 더 잘 자란다는 얘기다. 그 뒤 삼성은 비슷한 업종에 속하는 계열사들을 경쟁시키며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고 있다. 우리나라 통신시장 역시 메기 역할을 하는 아이폰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베스

베스

북미산 외래 어종인 큰입배스는 환경부에서 지정한 유해어종이다. 처음 배스는 식용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그런데 배스를 키우던 횟집이 망하면서 자연으로 방류됐다. 저수지로 흘러든 배스는 붕어와 피라미 등 토종 물고기를 포식하며 우리나라 생태계를 교란하고 있다.

아이폰의 국내 상륙이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아이폰 열광에 숨겨진 부정적 측면도 무시 못하게 존재한다. 먼저 단말기 업체들의 타격이 불가피하다. 덩치가 있는 삼성전자보다 맷집이 약한 업체들이 더 힘들어 보인다. 삼성전자는 그나마 T옴니아2로 아이폰에 대응하고 있지만, 나머지 업체들은 사실상 대응 자체를 하기 힘든 상황에 내몰리고 있다. 삼성전자는 아이폰이 많이 팔리는 게 반드시 나쁘지만은 않다. 아이폰이 잘 팔리면 휴대전화 부문 실적 감소로 이어지지만, 아이폰 부품인 낸드플래시가 삼성전자 제품이다. 반도체 부문에선 아이폰이 많이 팔릴수록 삼성전자에 이익인 셈이다.

아이폰의 최대 피해자로는 LG전자가 꼽힌다. 아이폰이 나온 뒤 애널리스트들은 LG전자 목표주가를 3.7%나 낮췄다. 아이폰으로 대변되는 스마트폰 분야에서 LG전자는 아직 매력적인 제품을 내놓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 개선작업 중에 있는 팬택계열의 회생에도 찬물을 끼얹을 전망이다. 새로 시장에 진입한 SK텔레시스는 첫 단말기인 W폰이 제대로 고객에게 평가받을 기회마저 박탈당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한 단말기 제조업체 부장은 “KT의 대대적 보조금을 등에 업은 아이폰이 우리나라 이동통신 생태계의 근본을 파괴하는 ‘배스’가 될 것”이라고 꼬집었다.

KT의 굴욕적인 ‘아이폰 모시기’도 구설에 오른다. 경쟁 이동통신사들은 KT의 아이폰 떠받들기를 놓고 ‘IT 분야의 을사늑약’이라고 비꼬고 있을 정도다. KT가 애플에 보장한 아이폰 판매 물량은 2년 동안 50만 대로 알려져 있다. 현재 KT가 50만원 수준의 보조금을 아이폰에 투입하는 상황임을 감안하면 물량을 소화하려면 보조금으로만 약 2500억원을 사용해야 한다.

‘아이폰 시험’ 80점 넘어야 안내 맡겨

이 밖에 아이폰 관련 각종 행사, 방송·신문 광고, 대리점 전용 판매대 등 아이폰 관련 홍보·광고·판매 부대비용 일체를 KT가 부담한다. 아이폰을 광고하는 모든 제작물의 디자인도 애플의 승인을 받고 제작하게 돼 있어 사실상 KT가 애플의 대리점을 자처하는 상황이다.

아이폰의 부품원가와 제조비용을 합친 제조원가는 178.96달러로, 20만원 안팎 정도다. 아이폰 출고가가 4배 정도 높다. 아이폰을 만드는 애플의 2009년 상반기 매출은 50억9400만달러, 영업이익은 20억3800만달러를 기록했다. 영업이익률이 무려 40%에 이른다. 반면 글로벌 휴대전화 1위 노키아와 2위 삼성전자의 영업이익률은 각각 11.3%와 10.5%다.

애플이 혁신적 아이디어를 담은 제품을 만들어 장사를 잘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뒤집어보면 이동통신사들이 애플에 막대한 보조금을 주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그 부담은 고스란히 소비자 몫이다. 이동통신 요금이 올라가기 때문이다.

아이폰의 실제 요금 부담은 만만치 않다. KT가 내놓은 아이폰 요금제는 월 최저 기본료가 4만5천원이다. 월 정액요금제라 통화를 적게 하더라도 매월 무조건 내야 한다. 보통 1만2천~1만5천원 가량인 일반 휴대전화 기본료의 3배 수준이다. 또 아이폰을 공짜로 구입하려면 월 기본료 9만5천원의 요금제에 가입해야 하는데, 이 경우 연간 요금만 114만원이다. 보통 2년 약정이니 고객은 최소한 228만원을 납부하는 조건으로 아이폰을 구입해야 한다.

서울 광화문 KT 본사 매장에 대형 아이폰 홍보물이 부착돼 있다. KT는 아이폰 떠받들기 계약으로 구설에 오르고 있다.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서울 광화문 KT 본사 매장에 대형 아이폰 홍보물이 부착돼 있다. KT는 아이폰 떠받들기 계약으로 구설에 오르고 있다.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이동통신 문화가 달라 아이폰이 확산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스마트폰은 미국·유럽에서 전자우편 등을 주고받는 업무용 휴대전화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즉 개인용 휴대전화와 함께 쓰는 업무용 세컨드폰(second phone) 개념으로 주로 활용되고 있다. 서양이 전자우편 중심의 커뮤니케이션 문화를 갖고 있고, 인터넷 보급이 원활치 않은 통신 환경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서양과 달리 직접 통화나 문자메시지를 주로 사용한다. 여기에 더해 지상파 멀티미디어방송(DMB)·내비게이션·MP3 기능 등 생활·엔터테인먼트용으로 휴대전화를 쓴다. 우리나라 이동통신 시장의 2배 규모인 일본에서 소프트뱅크가 지난 2년 동안 판매한 아이폰은 50만 대에 그쳤다. 전자우편 커뮤니케이션을 중시하는 미국과 유럽 등 서양과의 통신 환경 및 이용 패턴의 차이 탓이다.

아이폰이 일에 치이는 사람들에게 더욱 일을 시키는 기기가 될 것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한 벤처기업 임원은 “왜 회사들이 법인용 아이폰을 구입해 직원들에 나눠주겠는가. 바로 일을 시키기 위해서다. 아이폰을 갖고 있으면 회사에서 지시가 있으면 어디서나 전자우편을 확인해야 한다. 지하철에서도 회사 전자우편을 확인하고 서류를 찾아야 하는 것을 생각하면 끔찍하다”고 말했다.

시장 살릴 메기? 시장 교란할 배스?

아이폰이 국내 이동통신 시장을 흙탕물로 흐려놓는 미꾸라지가 될지, 국내 IT 기업을 열정적으로 뛰게 만드는 메기가 될지, 아니면 IT 생태계를 교란하는 큰입배스가 될지는 좀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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