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지펠 리콜, 회장님 앙코르?

냉장고 폭발사고에 대한 진노는 사임한 이건희 전 회장의 실질적 영향력 공식화한 사건
등록 2009-11-12 06:46 수정 2020-05-02 19:25
장면1

지난 10월10일 오전 9시20분께 경기 용인시 동백동 ㅅ아파트 9층 이아무개(43)씨 집에서 삼성전자의 2006년형 지펠 냉장고(680ℓ)가 ‘펑’ 하며 폭발했다. 냉장고 문이 날아가면서 다용도실 미닫이 유리문과 창문이 깨졌고 파편이 1층까지 날아가 주차돼 있던 차량 3대가 긁히는 피해가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폭발음에 깜짝 놀라 일부 주민들이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사고 당시 집주인 이씨는 잠시 집을 비운 상태였고 아파트 거실에 중학생 자녀가 있었지만 냉장고와 떨어진 곳에 있어 부상을 입지는 않았다.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이 2008년 4월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기 위해 서울 태평로 삼성 본관에 들어서고 있다. 한겨레 김진수 기자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이 2008년 4월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기 위해 서울 태평로 삼성 본관에 들어서고 있다. 한겨레 김진수 기자

장면2

폭발사고가 터진 다음날인 11일 오후,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이 전용기편으로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이 전 회장은 앞서 9월20일 부인 홍라희씨와 함께 출국한 뒤 프랑스·독일·영국 등지에서 미술관 관람 등 개인적인 일정을 소화하고 20여 일 만에 돌아온 것이었다. 함께 출국한 홍씨는 먼저 귀국해 10월9일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 부인인 고 이정화씨의 빈소를 찾아 조문했다.

이 전 회장이 귀국하는 날, 삼성전자와 삼성물산 등 주요 계열사 최고경영자(CEO)들이 공항을 찾았다. 계열사 CEO들이 현안을 보고했다고 한다. 이날 이 전 회장은 두 번 크게 화를 냈다. 이 전 회장은 삼성냉장고 폭발사고와 관련해 대로했다. 삼성물산 건설부문의 실적 부진에 대해서도 크게 화를 냈다고 한다. 이 전 회장은 “지난 20년간 품질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최고를 지향해왔는데…”라며 이번 사건에 대해 최우선적으로 시정 조처하라는 뜻을 전달했다.

해외서도 폭발사고로 물의 빚어

지펠 냉장고는 해외에서도 문제가 잇따라 드러났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 거주하는 박아무개씨는 미국 의 시민참여형 인터넷 사이트인 ‘아이 리포트’에 지역신문에 보도된 지펠 냉장고 폭발 사진을 올렸다. 박씨는 “냉장고가 굉음을 내고 갑작스럽게 폭발해 사람이 죽을 뻔했다. 그럼에도 삼성은 제품에 문제가 없다는 대답만 할 뿐, 별다른 조치를 취해주지 않아 이렇게 사진을 올리게 됐다”고 전했다. 영국의 한 지역신문인 가 지난 5월 ‘지진 같은 냉장고 폭발’이라는 제목으로 지펠 냉장고 폭발사건을 보도한 내용도 인터넷에 올라왔다. 이 신문은 냉장고가 굉음을 내고 폭발해 그 소리와 충격이 지진이 난 것 같았다”라는 내용으로 폭발 상황을 설명했다. 이때도 삼성은 정확한 원인을 제시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는 10월29일 창립 40주년 기념일을 하루 앞두고 리콜을 전격 발표했다. 21만 대에 이르는 냉장고 리콜은 국내 백색 가전 부문에서 사상 최대 규모였다. 삼성은 사고 발생 20일 만에 신속하게 사고 원인을 찾아 발표하고 대책을 내놓았다. 삼성전자는 “냉장고 냉매파이프의 서리를 제거하는 히터(제상 히터)의 연결 단자에서 누전이 발생하면서 이에 따른 발열로 폭발이 일어난 것”이라고 사고 원인을 밝혔다.

물론 잔칫날을 하루 앞두고 이런 발표를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다. 사실 리콜과 관련해 기업들은 미적거리기 마련이다. 자신의 제품에 결함이 있음을 시인하는 것이어서 썩 내켜하지 않는다. 문제를 제기한 고객에게 몇 배의 보상을 해주고 덮어버리거나 소비자에게 책임을 돌리기 일쑤였다. 현대자동차의 경우 급발진 사고가 계속 문제가 되고 있지만 대부분 고객의 운전 미숙으로 화살을 돌리고 있다.

이 전 회장이 불량품에 대해 대로한 적은 2001년에도 있었다. 그해 11월 한 일간신문에 삼성전자가 아웃소싱해 판매 중인 가습기 일부 모델을 리콜한다는 기사가 조그맣게 실렸다. 이건희 회장이 신문에서 이 기사를 보고 진노했다. 애초 삼성전자는 가습기를 직접 만든 것이 아니라 아웃소싱으로 들여와 판매했기 때문에, 리콜을 외주업체 문제로 가볍게 여겼다. 하지만 이 전 회장은 달랐다. 삼성전자 제품을 구매한 고객에게 삼성의 이미지가 크게 실추된 중대 사안으로 받아들였다. 삼성전자 임직원들은 혼쭐이 났다. 결국 삼성전자의 CEO가 가습기 리콜의 ‘원인’과 ‘대응책’을 직접 만들어 이 전 회장에게 보고한 뒤 사건이 일단락됐다.

2006년 3월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삼성전자 최고위 임원들이 도우미로부터 새로 나온 지펠 냉장고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한겨레 이정용 기자

2006년 3월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삼성전자 최고위 임원들이 도우미로부터 새로 나온 지펠 냉장고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한겨레 이정용 기자

현직 때도 ‘대로 리콜’ 사례

삼성전자의 ‘화형식’은 불량품과 관련해 유명한 일화다. 이 전 회장은 1995년 삼성전자가 판매한 무선전화기 가운데 불량품이 있다는 보고를 받자 즉시 판매한 15만 대 전부를 새 제품으로 교환해주거나 회수하라고 지시했다. 그 뒤 회수한 제품을 모두 공장 전체 임직원이 보는 앞에서 모아 불태우는 화형식을 가졌다. 손실은 150억원에 이르렀다. 다섯 가지 모델 중 네 모델은 아예 생산을 중단하고, 대신 신제품을 개발했다. 당시로는 손해가 막대했지만 질을 추구하는 쪽으로 사업을 추진해갔다. 그 결과 그때까지 4위에 머물던 삼성전자의 무선전화기 시장점유율을 3년 만에 1위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삼성전자가 이 전 회장의 단 한번의 ‘분노’로 리콜에 들어가기는 했으나, 삼성전자의 대응은 글로벌 기업답지 않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국내에서 폭발사고가 나기 전부터 해외에서 여러 차례 폭발사고가 일어났다. 제품에 문제가 있었으면 삼성전자는 즉각 리콜 조처를 하고 이에 대한 정중한 사과를 했어야 한다. 하지만 당시 삼성전자는 미적거리는 태도를 보였다.

당시에는 수수방관하다 현업에서 물러난 이 전 회장의 대로로 삼성전자가 리콜에 들어간 것은, 현재의 삼성전자 경영진이 얼마나 무기력한지를 보여준다. 이 전 회장 역시 삼성전자에 애정이 있었다면, 대로하기에 앞서 삼성전자를 믿고 제품을 구입한 고객에게 먼저 사과의 말을 전하는 게 필요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회장님의 분노’를 흘렸나

삼성전자의 리콜과 관련해 이 전 회장이 그룹 의사 결정에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 전 회장은 지난해 4월 에버랜드 전환사채(CB) 헐값 발행 사건 등과 관련해 기소되면서 삼성그룹의 모든 직에서 사임했다. 삼성전자 등기이사직도 사퇴했다. 현재 이 전 회장은 삼성전자의 대주주일 뿐이다.

김기원 한국방송통신대 교수(경제학)는 “리콜 사건은 여전히 이건희 전 회장이 삼성을 실질적으로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와 함께 이 전 회장이 보다 공개적으로 삼성의 대내외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참모들이 의도적으로 ‘회장님의 분노’를 흘렸다는 시각도 있다”고 말했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