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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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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경이 오지 않으면 더 행복할까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문화권일수록 폐경 증상 덜 느낀다는 보고도
등록 2021-05-11 14:56 수정 2021-05-11 23:50
동국제약 갱년기 치료제 ‘훼라민큐’ 티브이 광고. 동국제약 누리집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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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아직 열 살이 되기 전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늦은 밤, 뚱뚱한 브라운관 TV에선 ‘주말의 명화’라는 타이틀을 달고, 늘 같은 성우를 쓰는지 매번 얼굴은 달라져도 목소리는 동일한 배우가 한껏 감정을 담아 신파조로 울먹이고 있었습니다. 고운 한복을 입고 단정하게 쪽 찐 머리를 한 여성은 서글피 울면서 말했습니다. 이제 나는 여자도 아니라고, 앞으로 창창한 세월을 이런 몸으로 어떻게 살아가냐고.

잠잘 시간이 훨씬 지났기에 졸려서 저절로 감기는 눈꺼풀 사이로 희미하게 들어온 화면이지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화면 속 그녀는, 해사한 얼굴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며 자그마한 체구며 나긋한 몸놀림이며 어디 하나 여자 같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제 자신이 여자가 아니라고 하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 주인공도 자궁에 문제가 있었던 걸까

뇌세포 속 어딘가에 저장된 어린 시절의 사소한 기억 한 조각이 떠오른 건 그로부터 20년쯤 지나서였습니다. 지인이 자궁암으로 자궁절제술을 받았습니다. 의사는 이른 시기에 질병을 발견했기에 수술만 하면 이후 특별한 치료를 받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했습니다. 위로차 찾아간 병실에서 만난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여자가 아닌 것 같다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하다고. 순간 어린 시절에 본 그 영화의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그 주인공 역시 자궁에 문제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럼 자궁이 있어야, 혹은 자궁이 아이를 품을 능력을 갖춰야만 여자라면, 폐경의 나이를 넘어선 중년 이상 여성은 과연 더는 여자가 아닌 걸까요? 문득 폐경이 인생에서 어떤 증상을 구체적으로 가져오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이제 저도 그 나이대에 가까워졌으므로 더는 남의 일이 아닐 테니까요.

폐경은 여성의 난소 기능이 퇴화하며 나타나는 신체 변화로 40~60살(우리나라 여성의 평균 폐경 연령은 49.9살입니다)에 나타납니다. 난소 기능이 멈추면서 에스트로겐 분비량이 줄어듦으로써 다양한 증상이 나타나는데, 가장 극적인 현상이 주기적으로 반복되던 월경이 사라지는 것으로 월경(經)이 닫혔다(閉)는 의미로 폐경이라고 부릅니다.

최근에는 월경이 억지로 닫힌 게 아니라 충분히 지속돼서 완결된 것이기에 이를 완경(完經)이라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는 주장도 있고, 저도 여기에 동조하는 입장입니다만, 아직 공식적인 단어는 바뀌지 않아서 좀더 확산이 필요하다는 느낌입니다. 최근 몇 년 사이, 사회 인식의 변화로 임신이 불가능하다는 불임(不姙)이라는 단어가 어감상 차별적이라고 하여, 임신이 어렵다는 뜻을 지닌 난임(難姙)으로 빠르게 대치된 것처럼 말이죠. 월경이 멈추는 건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1~2년 전부터 신체에 변화가 나타나면서 서서히 주기성이 사라지다가 완전히 멈추기에, 이 시기를 폐경기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에스트로겐 금단이 가져오는 요란한 신호

폐경기는 여성의 인생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시기입니다. 하지만 여성의 일생에서 가장 요란스럽고 서글픈 형태로 세상에 알려진 시기이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주변의 나이 든 여성 어른들이 폐경기를 겪으며 이런저런 증상과 변화로 힘들어하는 모습을 종종 봤습니다. 날이 추운데도 갑자기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오르고 얼굴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지거나,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려 숨이 찬다거나, 이전에 없던 불면증이 생겨 잠자리에서 뒤척이거나, 골다공증으로 뼈가 약해지는 등 신체적인 증상은 당연히 불편함을 유발합니다. 이는 대부분 폐경기를 기점으로 낮아지는 에스트로겐 금단으로 생기는 증상으로 알려졌습니다.

에스트로겐은 여성의 몸을 특징적으로 발달시키고 임신에 관여하는 것을 넘어, 여성의 몸 전체에 여러모로 영향을 미칩니다. 임신이 질병은 아니지만 신체에 상당한 부담을 주는 과정이기에 이를 대비해 여성의 몸은 다양한 조절 장치를 가졌고, 에스트로겐은 이것을 조정하는 일종의 스위치처럼 작동합니다. 체온 조절에도 관여합니다. 임신하면 체온을 가진 태아를 품어야 하므로, 체온 조절에 훨씬 더 잘 대처해야 합니다.

그래서 폐경기 여성에게 가장 흔한 증상인 혈관운동증상(VMS·Vasomotor Symptoms)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요. 이는 주로 얼굴과 목, 가슴 등의 상체에서 갑자기 화끈한 열감이 느껴지면서 걷잡을 수 없이 땀이 쏟아지는 증상으로, 흔히 ‘핫플래시’(Hot Flash)라고도 부릅니다. 에스트로겐의 일종인 카테콜에스트로겐은 노르에피네프린이라는 호르몬과 길항작용을 하며 체온 조절에 영향을 미칩니다. 폐경기가 되어 에스트로겐 분비량이 줄어들면 상대적으로 노르에피네프린 분비가 늘어나 체온 조절 구역이 좁아지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생물에게는 항상성이 매우 중요합니다. 체온, 혈압, 혈액 내 산성도, 혈당량 등이 일정 수준으로 유지돼야 하는데 우리 몸에는 늘 이 수치들이 너무 높거나 낮아지지 않도록 체크하는 감지 장치와 이상 수치가 감지됐을 때 이를 정상 범위로 되돌리는 복구 시스템이 존재합니다. 사람 같은 항온동물은 체온 유지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 몸에는 체온을 인식하는 장치와 이를 회복시키려는 기작(생물의 생리적인 작용을 일으키는 기본 원리)을 여러 경로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카테콜에스트로겐-노르에피네프린 피드백 시스템입니다.

노르에피네프린은 열감을 느끼고 몸을 식히기 위해 땀을 내며, 카테콜에스트로겐은 그 반대 작용을 합니다. 실제 폐경기 여성이라 하더라도 노르에피네프린의 양은 거의 변함없습니다. 다만 에스트로겐의 양이 줄어들다보니 상대적으로 노르에피네프린의 양이 많은 것처럼 느껴져, 신체가 열이 나는 것도 아닌데 열이 나는 것으로 과민반응을 하는 거죠. 핫플래시를 겪어서 열이 확확 오름이 느껴지는 순간에도 심부 체온은 정상 온도인 36.5℃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핫플래시는 폐경기를 전후로 5~10년 정도 이어지다가, 신체가 이렇게 낮아진 에스트로겐 농도에 적응하면서 서서히 사라지지요.

미국 다트머스대학 연구진에 따르면 사람들은 중년기에 불행의 정점을 찍다가 노년기에 다시 행복을 크게 느낀다. 영화 <죽여주는 여자> 개봉 당시 윤여정 배우. 오계옥 씨네21 기자

미국 다트머스대학 연구진에 따르면 사람들은 중년기에 불행의 정점을 찍다가 노년기에 다시 행복을 크게 느낀다. 영화 <죽여주는 여자> 개봉 당시 윤여정 배우. 오계옥 씨네21 기자

모두가 겪는 골다공증, 여성은 폐경기에 진행돼

골다공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뼈는 돌기둥처럼 늘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조골세포(Osteoblast)와 파골세포(Osteoclast)의 길항작용을 통해 늘 일정 수준으로 유지됩니다. 뼈가 처음부터 단단하게 만들어 그대로 두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제거하고 다시 채워넣는 방식으로 진화된 이유는, 그래야 뼈에 일어나는 미세한 손상을 회복시켜 뼈의 기능을 정상으로 유지할 수 있으며, 애초에 뼈는 우리 몸의 신경 작용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칼슘을 안정적으로 저장하는 일종의 저장창고이기 때문입니다.

파골세포가 뼈에 구멍을 내서 칼슘을 혈액 속으로 방출하면 우리 몸의 신경세포가 이를 유용하게 씁니다. 그렇게 뼈에 생긴 미세한 구멍은 조골세포가 칼슘과 인으로 구성된 조직으로 다시 채워서 보강합니다. 이런 칼슘 교체 주기는 나이가 어릴수록 빠른데, 아기는 1년 내에 뼈의 칼슘이 100% 교체되지만, 성인이 되면 매년 10~30%의 칼슘이 교체됩니다.

이 방식은 뼈의 성장과 손상된 뼈의 회복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성장기에는 파골세포보다 조골세포의 능력이 더 뛰어나, 뼈의 성장이 빠르게 일어나고 손상돼도 회복력이 빨라 부러진 뼈도 금방 붙습니다. 하지만 나이 들수록 파골세포에 비해 조골세포의 기능이 떨어져 뼈의 회복이 느려집니다. 노년층에 골절이 다른 연령대보다 훨씬 위험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원래 뼈는 나이 들수록 약해지므로, 일정한 나이가 지나면 골다공증 위험은 남성이든 여성이든 누구에게나 일어납니다. 하지만 여성은 폐경기 전후로 골다공증이 빠르게 진행됩니다. 기본적으로 에스트로겐이 조골세포를 자극하는 기능을 하기 때문입니다. 임신은 체중을 증가시켜 골격계에 부담을 줍니다. 게다가 태아는 성장을 위해 부지런히 엄마 뼈에서 칼슘을 빼내가므로 그만큼 조골세포가 튼실해야 임신 기간에 뼈가 부러지는 일 없이 견뎌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폐경기가 되면 에스트로겐 농도가 낮아지면서 조골세포를 자극하는 기능도 낮아지므로 골다공증이 급격하게 진행되는 거죠. 이런 증상들은 신체적 불편감과 건강상 문제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폐경이라는 키워드로 논문 검색을 해보면, 대다수 논문이 폐경으로 일어나는 다양한 증상으로 삶의 질이 저하되는 경향이 있다는 결론으로 끝을 맺고, 이로 인해 호르몬 치료 요법을 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폐경기에는 앞서 말한 혈관운동증상과 골다공증, 대사증후군 위협 증가 등 다양한 신체적 현상이 일어납니다. 또한 폐경은 그만큼 자신이 나이 들었음을 느끼게 하는 직관적인 증상이기에 노화에 대한 인식이 분명해지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논문들을 계속 읽다보니, 폐경기는 그저 불편하고 괴롭고 우울한 시기라고 여겨지며, 이 불행이 단지 매달 찾아오던 월경이 사라지는 그 신체적 증거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해 폐경이 원망스럽게만 느껴집니다.

폐경보다 노화에 대한 두려움

최근 미국 다트머스대학 연구진이 전세계 132개국 사람들의 인생 경로를 추적해서 발표한 메타분석 연구에 따르면 21세기 현대인들은 각국의 상황, 기대수명, 임금수준과 상관없이 유(U)자형 ‘행복 곡선’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즉, 사람들은 유년기와 청년기에 행복감을 크게 느끼다가 점차 낮아져, 47~48살 중년기에 가장 불행한 정점을 찍다가, 서서히 회복돼 노년기에는 다시 행복감을 크게 느낀다는 것입니다. 묘한 것은 사람들이 남녀, 인종, 국적을 불문하고 가장 불행하다고 느끼는 시기가 바로 여성의 일생에서 폐경기를 맞는 바로 그 시점이었습니다. 어쩌면 폐경기라서 불행하고 우울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이 시기가 인생에서 가장 재미없는 때인데 마침 폐경이 그즈음 일어나기에 더욱 크게 느껴지는 건 아닌지 궁금해졌습니다.

폐경 이후 여성의 삶을 인터뷰한 기록에 따르면, 그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건 월경을 더 이상 안 한다는 게 아니라, 노화에 대한 두려움과 그에 따르는 생활의 위협에 대한 걱정이었습니다. 경제적 기반이 확실하고 고학력 여성의 경우 폐경 이후 우울증을 덜 느낀다거나, 폐경을 일종의 질환이나 장애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노화의 한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문화권일수록 폐경 증상을 덜 느낀다는 보고도 있었으니 말이죠. 하나 분명한 건, 의학이 더 발전해 여성이 죽을 때까지 월경할 수 있게 한다고 여성의 일생이 더 행복해지지는 않으리라는 점입니다.

이은희 과학커뮤니케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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