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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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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반, 태아의 동아줄에서 난치병 동아줄로

신성과 불결 사이 놓여 있던 태반의 의학적 가치가 본격적으로 주목받으며 급부상
등록 2021-03-12 17:22 수정 2021-03-14 01:47
캐머런 디아즈가 연기하는 엄마는 혈액암 아이에게 필요한 조혈모세포를 얻기 위해 맞춤형 아기를 임신한다. 영화 <마이 시스터즈 키퍼>의 한 장면. 영화사 제공

캐머런 디아즈가 연기하는 엄마는 혈액암 아이에게 필요한 조혈모세포를 얻기 위해 맞춤형 아기를 임신한다. 영화 <마이 시스터즈 키퍼>의 한 장면. 영화사 제공

돌이 지나 한창 뛰어다닐 나이의 아이가 자꾸만 처지고 피곤해합니다. 걱정하는 부모. 아이 몸을 이리저리 살피다가 몸 여기저기에서 멍자국을 발견합니다. 한달음에 병원으로 달려간 부모. 그리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습니다. 아이는 혈액암의 일종인 급성전골수성백혈병(APL·Acute Promyelocytic Leukemia) 진단을 받습니다. 혈액의 기능 이상으로 온몸에 멍이 들었던 거죠. 아이를 살리는 유일한 치료법은 조혈모세포 이식뿐. 하지만 가족 중 아이와 면역학적으로 일치하는 이가 없습니다. 기존에 기증자로 등록된 사람도 마찬가지이고요.

절망에 빠진 가족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던 의사가 넌지시 말합니다. “혹 아이를 하나 더 가질 생각은 없으십니까? 제대혈(탯줄에서 얻은 혈액)로도 이식이 가능합니다.” “새로 태어날 아기가 이 아이와 맞지 않는다면요?” “그건 걱정 마세요. 맞게 만들 수 있으니까요.”

“백혈병 맞춤 아기를 만들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캐머런 디아즈가 아이를 살리기 위해 모든 것을 감내하는 엄마로 출연했던 영화 <마이 시스터즈 키퍼>(2009)의 한 장면입니다. 이 영화에선 시험관아기로 배아를 여러 개 만들고 ‘착상 전 유전진단’(PGD·Preimplantation Genetic Diagnosis)으로 이 중에서 먼저 태어난 아기와 면역학적으로 일치하는 배아만 선택해 임신하는 ‘맞춤 아기’ 방법을 제시합니다. 이 영화를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불쾌한 경험이 있습니다.

아이를 출산하기 얼마 전, 베이비페어(유아용품 박람회)를 돌아보다가 ‘출산 전 무료 상담’이란 간판을 내건 부스에 우연히 들어갔습니다. 한참 이야기를 듣다보니, 그곳은 ‘개인 제대혈 보관 서비스’ 회사의 홍보 부스였습니다. 제대혈 보관이 얼마나 중요하고 유용한지를 설명하면서 서비스 가입을 유도하는 곳이었지요. 상담원이 열성적으로 설득해서 잠시 고민했지만, 저는 이미 몇 주 전 공공제대혈은행에 제대혈을 기증하기로 신청했기에 이 서비스에 가입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제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상담사는 저를 붙잡으며 이런 말을 던졌습니다. “설마 비용이 너무 비싸다고 생각해서 그러시는 건가요? 내 아이를 위한 최고의 선물인데 비싸다고 생각하세요?” 그 순간, 저는 단돈 100여만원이 아까워서 아이의 미래를 위한 선물을 아끼는 구두쇠 엄마로 낙인찍히는 기분이었습니다.

태반(胎盤, Placenta)은 배아가 자궁내막에 착상한 뒤 배아를 둘러싼 가장 바깥쪽에 있는 영양막세포가 발달해 만들어지는 조직으로, 임신 기간에 태아를 물리적·화학적으로 보호하고, 각종 호르몬을 분비해 임신을 유지하며, 모체와 태아 사이 영양분·노폐물의 교환을 관리합니다. 태반을 경계로 태아와 모체의 혈액은 서로 섞이지 않고 필요 물질만 교환돼, 엄마와 아이의 혈액형이 달라도 별 거부반응 없이 임신이 유지될 수 있지요. 그야말로 태반은 임신 중 태아를 보호·관리하는 완벽한 가드이자 매니저입니다.

태를 묻는 태실을 명당에 만든 조선 왕가

그래서인지 전통적으로 태반은 귀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왕가와 귀족은 태를 물과 청주로 깨끗이 씻어 새 단지에 넣었다가, 좋은 날을 잡아 풍수학적으로 길한 땅에 태실을 만들어 신성한 의례를 치르듯 세심하게 신경 써서 묻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조선시대 왕릉군 중 하나인 서삼릉에 가면 왕가 후손의 태를 묻어놓은 태실이 한쪽에 있습니다. 이 장태 의식은 복잡하고 비용이 많이 들기에 주로 왕가에서만 이뤄졌는데, 민간에서도 태는 함부로 버리지 않고 반드시 깨끗하게 태워서 처리했다고 합니다.

현재는 대부분 출산이 병원에서 이뤄지면서 태반은 일종의 의료폐기물로 분류돼 처리됩니다. 최근에는 태반에 여러 유용 물질이 들어 있음이 인정돼, 허가받은 폐기물재활용 업체가 수거해 가공 처리할 수 있도록 따로 분류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기본적으로는 의료폐기물관리법에 따라 처리해야 하지요. 불과 100여 년 만에 태반을 대하는 방식이 이처럼 급격히 달라졌습니다.

임신 기간 내내 절대적으로 든든한 태아의 보호자인 태반은 자궁 내벽에 찰싹 달라붙어 자궁과 긴밀한 네트워크를 유지해야 하지만, 아이가 태어나면 즉시 제거돼야 하는 생물학적 폐기물이 됩니다. 태반이 배출되는 과정을 후산(後産)이라고 하는데, 아이가 나오고 태반까지 완벽하게 배출돼야 출산 과정이 끝납니다. 아주 작은 조각이라도 태반 일부가 자궁 내벽에서 떨어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경우(유착태반), 자궁 내벽이 완전히 지혈되지 못해 출혈이 지속되고 감염될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바로 수술해 유착된 태반 조직 혹은 자궁 전체(태반 유착 부위가 넓거나 자궁 천공 등이 일어난 경우)를 제거하지 않으면 산모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옛이야기에 흔히 등장하는, 산모가 아이를 낳은 뒤 회복하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사망하는 여러 이유 중 하나일 겁니다.

현대의 병원에선 출산 뒤 태반이 나오면 의사는 산모의 자궁 어딘가 구멍이 있거나 찢어진 곳은 없는지 꼼꼼히 살핍니다. 제 경우에는 자연분만 후처리를 하면서 의사가 직접 펼쳐서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태반이 완벽히 잘 나왔으니 이제 안심하고 몸조리만 잘하면 된다고 말이죠.

조선 왕조는 전국의 명당에 임금의 탯줄을 모신 태실을 만들었다. 충남 서산시 운산면 태봉리에 있는 조선 13대 임금 명종의 태실. 한겨레 노형석 기자

조선 왕조는 전국의 명당에 임금의 탯줄을 모신 태실을 만들었다. 충남 서산시 운산면 태봉리에 있는 조선 13대 임금 명종의 태실. 한겨레 노형석 기자

태반, 모성 행위의 방아쇠?

이렇듯 출산 뒤에는 모체에 필요 없어 몸 밖으로 밀어내 배출되는 조직이 태반이지만, 예로부터 태반에 대해서는 영적인 신성성 외에 실질적 유용성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많이 있었습니다. 특히 동물은 출산 직후 어미가 새끼를 핥아 그 몸에 묻은 양수와 태지를 지워낸 뒤 태를 먹어버리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쥐를 비롯한 설치류와 고양이, 원숭이뿐 아니라 토끼·염소·소 같은 초식동물에게서도 출산 뒤 태반을 먹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과학자는 어미 동물이 출산 즉시 자신이 배출한 태를 먹는 이유를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첫째, 출산으로 인한 체력·영양분 손실을 보충하려는 섭식 행위. 둘째, 피와 양수의 냄새를 재빨리 제거해 포식자의 관심을 끌지 않기 위한 보호 행위. 마지막으로 태반에 풍부하게 든 오피오이드 성분과 호르몬 등을 섭취해 산후 통증을 감소시키는 진통 작용과 이후 신체적 모성 반응을 촉진하는 방아쇠 기능으로 설명하죠.

마지막 이유의 경우, 실제 생쥐를 대상으로 실험한 결과, 갓 출산한 어미 쥐에게 태반 대신 단백질이 풍부한 다른 고기를 먹게 했더니 통증을 느끼는 정도가 줄어들지 않았고, 태반을 먹는 행위가 모유 분비와 새끼 돌보기 등의 모성 행동을 시작하는 방아쇠처럼 작용한다는 보고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일부 자연주의 출산법을 표방하는 단체는, 사람도 포유류의 일종이므로 태반을 섭취하는 것이 출산을 마무리하고 모성 반응을 이끌어내는 ‘자연스러운’ 계기가 된다고 주장하며 산모가 자신의 태반을 먹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한다지만, 대다수 사람은 의학적 이유(조직 부패 가능성과 감염 위험성)와 윤리적 이유(어쨌든 인육 섭취입니다)를 들어 이런 행동에 찬성하지 않습니다. 다만 태반에 세포 재생 성분과 호르몬 등이 많이 든 것은 사실이어서, 적절한 절차를 거쳐 이들 성분을 추출해 의약품이나 건강미용 제품의 원료로 이용하는 건 허가돼 있습니다.

아이 셋의 제대혈을 모두 기증한 나

이렇게 신성과 불결 사이 모호하게 놓여 있던 태반의 의학적 가치가 본격적으로 주목받은 건 1980년대 이후부터입니다. 의학 발달로 인체를 구성하는 여러 장기의 이식이 난치병의 마지막 희망으로 떠오른 이후, 태반과 탯줄에 든 제대혈의 가치가 급부상했습니다. 제대혈에는 혈액을 만들 수 있는 줄기세포인 조혈모세포와 연골 및 피부, 지방, 근육 등으로 분화가 가능한 중간엽 줄기세포가 풍부하게 들었습니다. 특히 제대혈에 든 조혈모세포는 성인의 골수에 든 조혈모세포보다 증식 능력이 훨씬 뛰어나, 이를 이용하면 골수 이식이 필요한 각종 혈액암과 난치성 혈액 질환을 치료하는 데 도움을 줄 가능성이 제기됐습니다.

1988년 프랑스에서 세계 최초로 재생불량성 빈혈로 고통받던 아이에게 동생의 제대혈을 이식한 치료에 성공하면서 그 실효성이 입증됐습니다. 1993년 비혈연 사이 제대혈 이식, 2001년 자가 제대혈 이식이 성공하면서 가능성과 실효성이 더 넓어졌지요. 게다가 그즈음 체세포 복제 배아줄기세포를 성공시켰다는(훗날 조작으로 밝혀졌지만) 소식이 화제가 되면서, 줄기세포를 가득 품은 제대혈은 난치병 환자들의 마지막 희망처럼 떠올랐고, 제대혈 보관 서비스가 아이의 미래를 위해 부모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인 듯한 유행이 시작됐습니다. 앞서 저를 붙잡았던 상담원의 말처럼 말이죠. 그럼 이를 거부하고 아이 셋의 제대혈을 모두 기증한 저는(제대혈 개인 보관은 유료이지만, 공공 기증은 무료입니다), 아이보다 돈이 중요한 매몰찬 엄마로 비난받아 마땅했을까요? (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연재글에서 하겠습니다.)

이은희 과학커뮤니케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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