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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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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생물학] 젖샘은 인간을 규정한다

인간이라는 동물의 분류 기준인 젖,
성선택이 강조돼 지나친 성상품화로 나아가기도
등록 2020-06-27 07:37 수정 2020-07-02 01:09
웨들물범의 새끼가 6주 안에 네 배로 자라도록 하는 것은 어미가 분비하는 젖이다. 연합뉴스

웨들물범의 새끼가 6주 안에 네 배로 자라도록 하는 것은 어미가 분비하는 젖이다. 연합뉴스

스웨덴의 분류학자 칼 폰 린네는 1735년, 이후 모든 생물분류의 기원이 된 책 <자연의 체계>에서 사람을 최초로 생물분류학 범주에 넣었습니다. 이전까지 사람은 귀한 존재라고 여겨 동물 범주에 넣지 않았는데 파격적인 시도였죠. 이 분류법에 따르면 사람은 동물계 척추동물문 포유강 영장목 사람과에 속하는 유일한 종입니다. 특이한 점은 린네가 무려 300년쯤 전에 사람을 포유강, 즉 젖먹이 동물로 구분했다는 것입니다. 포유강에는 총 5400여 종에 이르는 생물이 포함되는데, 각기 생활사와 형태가 다른 이들을 한 그룹으로 묶어주는 공통점은 바로 ‘젖샘’의 존재입니다. 갓 태어난 새끼에게 ‘젖’이라는 어미 몸에서 분비되는 체액을 먹여 키우고 돌보는 존재가 바로 포유동물입니다.

포유강에 넣은 기준 ‘젖먹이’

사실 린네는 18세기 사람답게 사람을 피부색에 따라 백색 유럽인, 홍색 아메리카 원주민, 갈색 아시아인, 흑색 아프리카인으로 나눠 훗날 인종차별의 근거가 된 인종분류법을 제시한 이기도 합니다. 애초에 생물학적 종(種) 개념이 ‘생식 가능한 후손을 만들 수 없는 유전적 차이를 가진 생물들의 집단’을 의미하기에, 피부색에 따른 인종 구별은 분류법의 기반인 종의 의미 자체를 뒤흔듭니다. 인간은 피부색과 상관없이 번식 가능한, 단일한 종에 속하니까요.

이렇게 인간을 차별적인 시선(정확히는 백인우월주의)에서 바라본 린네가 하필이면 남녀 모두에게 있지 않고 여성에게만 있는, 그것도 아이를 낳지 않으면 기능조차 하지 않는 신체 기관인 젖샘의 존재를 근거로 인간을 분류한 것은, 아이를 낳아 젖을 먹여 키우는 것이 사람의 근본적 특징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생물학적으로 보면, 새끼를 젖을 먹여 키운다는 건 종의 번식에서 다양한 이점이 있습니다. 일단 젖은 각 생물종의 특성에 맞게 배합돼 분비됩니다. 추운 남극 근처에 사는 웨들물범의 새끼는 태어나서 6주 안에 몸무게를 네 배로 불려야 합니다. 체열을 유지하려면 몸집이 크고 피하지방층이 두꺼운 게 유리합니다. 몸집이 커야 단위부피당 외부와 접촉하는 면적이 작아지고, 지방층이 훌륭한 단열재 역할을 하니까요. 그래서 웨들물범의 어미가 분비하는 젖은 지방 함량이 50%나 되는 기름덩어리입니다. 새끼는 거의 버터에 가까운 젖을 먹고 그야말로 폭풍 성장을 하며 추운 기후에 맞게 토실토실한 몸으로 자랍니다.

사람의 모유에는 어떤 동물의 젖보다 많은 유당이 함유됐습니다. 젖에만 있는 단당류 유당은 아기의 열량 공급원이고 특히 뇌 발달에 주요한 연료원입니다. 특유의 단맛으로 갓 태어난 아기에게 세상의 달콤함을 처음 각인하는 바탕이 되기도 하고요. 갓 태어난 아기에게 우유를 그대로 먹이는 걸 권장하지 않는 이유는, 원래 송아지를 위해 만들어지는 우유에는 모유보다 유당 성분이 적고 단백질 성분이 많아 사람의 갓난아기는 제대로 소화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기에게는 우유가 아니라, 여러 성분을 모유에 적합하게 맞춘 조제분유를 먹이는 거죠. 어쨌든 젖은 생물종이 어떤 환경에 놓여 있든 상관없이 어린 개체가 자라나는 데 최적으로 배합된 영양성분을 제공해 그들의 생존 능력을 높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인간은 젖먹이 동물로 구분되지만 인류 진화에서 수유의 중요성이 ‘심미적 기능’보다 주목받은 적은 거의 없었다. 모유 수유 선발대회 모습. 한겨레 김정효 기자

인간은 젖먹이 동물로 구분되지만 인류 진화에서 수유의 중요성이 ‘심미적 기능’보다 주목받은 적은 거의 없었다. 모유 수유 선발대회 모습. 한겨레 김정효 기자


젖과 인간 유일 음성언어의 관계

젖은 갓 태어난 새끼를 질병으로부터 보호하기도 합니다. 포유류의 조상은 피부 일부가 늘어난 주머니에 알을 담고 다니던 종류에서 기원합니다. 이들의 알은 지금 우리가 아는 달걀처럼 단단한 탄산칼슘이 아니라 다공성의 얇은 막과 같아서 감염에 취약했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어미의 알주머니에서 병균을 방어하는 체액이 나왔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우리 몸의 체액은 항균성을 지닙니다. 눈물에 포함된 라이소자임이나 침 속에 든 락토페린은 천연 항생제 구실을 하기에, 우리가 온갖 이물질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눈뜨고 입 벌리고 살아도 별 이상이 없는 것이죠.

그러니 알을 보호하기 위해 알주머니 안에서 일종의 항균성 체액이 분비됐을 개연성이 높습니다. 그러다가 이들은 갓 태어난 새끼도 아예 주머니 안에서 어느 정도 키우기 시작했고, 항균성 체액에 영양분을 더한 게 지금 젖의 형태로 진화했을 것입니다. 실제 포유류의 원형에 가까운 단공류에 속하는 오리너구리는 새끼가 아닌 알을 낳으며, 이들의 배에는 젖꼭지도 없습니다. 다만 알에서 깨어난 새끼는 어미 배에 있는 특별한 분비샘에서 나오는 영양액을 핥아먹으며 자랍니다.

사람도 출산하고 3일 내에 분비되는 젖은 초유라고 하여, 약간 노란색을 띠고 각종 항체와 항균물질이 풍부하게 있어 이제 막 무균 상태에서 세균이 득시글거리는 세상에 던져진 신생아가 최소한의 면역체계를 갖추도록 도와준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죠.

또한 어미가 젖을 먹여 새끼를 키우려면 어미 몸이 일정 수준 이상 지방을 몸에 비축해야 하고, 이는 체온을 유지해 항온동물의 탄생에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주변 온도와 상관없이 체온을 유지하는 동물은 더 추운 곳이나 기후가 변덕스러운 곳까지 서식지를 넓힐 수 있었고 그곳에서 생존할 가능성이 컸습니다. 또한 단위체중당 젖을 먹으려면 늘 새끼가 어미와 붙어 있어야 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어미와 새끼는 상호 의사소통해야 하니 새끼의 뇌 발달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어떤 진화학자는 젖을 빨도록 진화된 구개와 입술, 혀 근육의 발달은 이를 미세하게 조절하는 고등 영장류에서 음성언어를 만들어내는 신체적 기반이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야말로 생명체에게 ‘젖먹이’ 탄생이란 생존과 번식을 지상 과제로 여기는 유전자 측면에서 보면 아주 유리한 방식이었던 모양입니다. 린네의 선견지명에 고개가 주억거려집니다.

인간을 젖먹이 동물로 구분한 뒤, 인류의 진화와 발전 과정에서 수유의 중요성이 전면에 나왔던 적은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오랫동안 인간 진화에 말을 보탰던 이들이 주목한 것은 젖가슴의 생물학적 기능보다는 심미적 기능,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남성의 성적 취향이었습니다. 그들이 주목한 것은 다른 젖먹이 동물과는 조금 다른 인간의 유선 위치와 이를 둘러싼 지방 분포였습니다.

가슴은 상체의 엉덩이?

많은 젖먹이 동물의 유선은 가슴이 아니라 주로 배에 있고 그저 유선만 발달할 뿐이지만, 여성은 상반신 윗부분에 유선 조직이 있고 수유라는 본래 기능과 별 상관이 없어 보이는 지방조직이 둥그렇게 유선을 둘러싸서 발달했습니다. 그 위치와 모양이 본래 기능(수유)과 상관없이 ‘보기에 퍽 좋더라’는 이유에서 시작한 궁금증은 급기야 여성의 젖가슴을 ‘하체 후면에서 상체 앞면으로 올라온 엉덩이의 대용품’이라는 그럴듯하면서도 어이없는 결론을 도출하기에 이릅니다. 네 발로 ‘기어다니는’ 동물은 발정기를 알리는 표지로 엉덩이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엉덩이 위치가 눈높이와 일치하므로, 발정기에 들어서면 엉덩이를 눈에 띄는 색으로 물들이거나, 아니면 유혹적인 냄새가 나게 한다는 식으로 말이죠. 인간의 경우, 직립보행을 하면서 머리 위치가 엉덩이보다 위로 올라가게 됨으로써 눈높이에서 멀어진 엉덩이를 대신하는 ‘섹스 어필’ 기관으로 젖가슴을 발달시켰다는 것이 이 가설의 골자입니다.

백번 양보해서 그 가설이 맞다손 치더라도 그 근거에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남성이 되면 시야가 그토록 좁아지는 것인가요. 머리만 좀 숙이면 보일 텐데 말이죠. 물론 생물 진화에서 성(性)선택이 진화적 압력이 되면 공작새의 꽁지깃 같은 극단적인 형태로 변하기도 하지만, 성선택에서 선택의 주체는 언제나 자손 양육에 더 많은 자원을 투자하는 쪽이고 그로 인한 진화적 압력의 영향을 받는 쪽은 다른 쪽입니다. 인간의 경우 임신과 출산, 수유로 자손 양육에 더 많은 투자를 하는 쪽은 여성이므로, 이때 여성이 진화적 선택의 주체, 남성이 진화적 압력의 영향을 받는 쪽이어야 하는데, ‘상체에 달린 엉덩이’ 가설은 진화의 기본 방향과도 맞지 않으니 더더욱 억지스러운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원래 기능에 맞게

문제는 이 관점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다는 것입니다. 여성의 가슴이 자연선택된 게 아니라 성선택의 결과라는 관점은, 여성의 가슴을 여성성과 동일시해 그 자체에 대한 지나친 신성화와 노골적인 상품화에 이르기까지 층위는 다르지만, 여성의 자연스러운 신체 일부가 아니라 그 자체로 대상화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여성성을 위해 가슴에 보형물을 넣는 사람이 연간 백만 명 단위로 늘어나지만(국제미용성형수술협회(ISPAS) 통계에 따르면 2015년 기준 유방확대술은 134만8197건이었습니다), 가슴이 크면 지능이 떨어진다는 조롱이 통용되는 이중적 시선이 여성의 가슴과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가슴 이야기>의 저자 플로렌스 윌리엄스는 말합니다. 여성의 가슴을 남성의 시선으로 인한 성선택의 결과물이 아니라, 엄마와 아기 사이 자연선택의 결과로 돌려줘야 한다고요. 그 관점의 변화만으로도 여성의 가슴을 둘러싼 불편하고 거북하며 때로는 폭력적일 수 있는 많은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말이죠.

이은희 과학커뮤니케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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