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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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앓을 때마다 희망을 버려야 하는 땅



의료봉사 떠난 기생충학 연구원이 전하는 스와질란드의 의료 환경…

인력·장비·교육 부족으로 병 키우고 생명까지 위협당해
등록 2010-07-14 13:16 수정 2020-05-02 19:26
영국 런던대학 위생열대의학대학원의 실험실에서 기생충을 연구하던 정준호씨는 석사과정을 마친 뒤 좀더 넓고 큰 세상에서 의학을 배우고 싶었다. 풍족한 재정 지원을 받는 첨단 실험실은 연구를 위한 최상의 조건이었지만 그에게는 아카데미즘에 매몰된 공간으로 느껴질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아프리카 스와질란드에 가 있다. 아프리카 어린이를 후원하는 비영리단체인 ‘아프리카 어린이를 돕는 모임’을 통해 스와질란드 카풍아 지역에 클리닉을 열고 의료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정씨가 책이나 포르말린 속에서 ‘즐거운 연구 대상’으로 봐온 기생충들은 스와질란드 사람들의 신체 이곳저곳을 부지런히 헤집고 있었다. 기생충은 사람들을 자꾸만 병원으로 달려오게 했다. 여기서 정씨의 고민이 돋아난다. 선진국의 기생충 연구는 왜 이들을 하루빨리 구제하지 못하나.
현재 기생충 질환에 대한 연구 비용 중 대부분은 신약 개발 등에 투자되고 있다. 약 한 알로 수많은 질병을 물리친다는 것은 실로 획기적이며 편리한 방법이지만 신약 개발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 이 비용에서 조금만 떼내 질병이 많은 지역의 감염 예방에 투자할 수는 없을까. 당장 급성 설사로 몸무게가 5kg이나 줄어든 이들의 삶의 질을 먼저 고려할 수는 없을까.
(scienceon.hani.co.kr)은 정씨가 현지에서 전해온 ‘진짜’ 기생충이 들끓는 검은 대륙, 지나치게 무방비해 놀랍고도 섬뜩한 스와질란드의 의료 일상을 연재하고 있다. 그 일부를 옮겨담는다. _편집자
아프리카 콩고의 수도 킨샤사에서 환자들이 주사를 맞기 전 백신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아프리카의 질병난을 해소하려면 백신 개발도 중요하지만 발병을 방지하기 위한 환경 개선과 의료 교육 지원 등에도 힘써야 한다. REUTERS/ CORINNE DUFKA

아프리카 콩고의 수도 킨샤사에서 환자들이 주사를 맞기 전 백신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아프리카의 질병난을 해소하려면 백신 개발도 중요하지만 발병을 방지하기 위한 환경 개선과 의료 교육 지원 등에도 힘써야 한다. REUTERS/ CORINNE DUFKA

얼마 전 20대 후반의 남자가 우리 클리닉을 방문했다. 3일 전부터 갑자기 시력을 잃은 것이다. 구토를 일으킬 정도로 심한 두통과 함께 나타난 증상이라 중추신경계 문제를 의심해 자세한 병력을 물어봤다. 놀랍게도 올 초에 뇌유구낭미충증에 걸린 적이 있었다. 뇌유구낭미충증은 촌충 유충이 뇌 안에 주머니를 형성해 뇌 손상을 일으키는 병이다. 뇌 안에 있기 때문에 수술을 해서 제거하기도 어렵고 약물 효과도 좋지 않은 편이라 치료가 까다로운 기생충 감염증 중 하나다.

기생충에 감염돼 실명할 뻔한 청년

환자 상태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접근할 필요가 있었겠지만, 시내 국립병원에서 했다는 치료 내용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단순했다. 뇌유구낭미충증은 일반 기생충약인 알벤다졸로 치료할 수 있지만 몇 주 동안 장기 투여를 해야 한다. 또 기생충이 죽어 염증 반응을 일으킨다면 뇌가 붓는 등 더 큰 손상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기생충약과 면역억제제를 함께 처방한다. 하지만 의사는 일주일치 기생충약을 처방해주고 면역억제제나 염증억제제는 처방하지 않았다. 이런 안이한 처방으로 증상이 재발했고 시력까지 상실한 것이다. 이후 한 달 동안 기생충약과 면역억제제를 처방한 결과 다행히 시력도 돌아오고 상태도 크게 호전됐지만, 치료가 더 늦었더라면 영구적인 시력 상실뿐 아니라 생명까지 위험할 수 있었던 순간이다.

병원에서 환자 관리를 소홀히 한 탓에 오히려 병이 악화돼 클리닉을 찾아오는 경우를 한 달에도 몇 번씩 본다. 찢어져 꿰맨 상처를 제대로 소독하지 않아 감염돼 오는 경우, 근본적 원인을 고려하지 않고 진통제만 처방해 병이 악화하는 경우, 다친 부위에 감아준 붕대가 달라붙어 오히려 상처를 키우는 경우 등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이 모두를 국립병원 의사의 관리 소홀로 치부할 수 있을까.

스와질란드의 현재 인구는 103만 명이다. 하지만 이들의 건강을 책임지는 의사 수는 고작 170명 안팎이다. 치과의사는 30여 명뿐이며, 약사가 70명, 병원 실험실 전문 인력은 80여 명밖에 안 된다. 인구 1천 명당 비율로 보면 의사 0.16명, 간호사 6명, 치과의사 0.03명, 약사 0.06명꼴이다. 한국은 현재 1천 명당 의사 2명, 간호사 4명, 약사 1.1명, 치과의사 0.4명이다. 스와질란드는 인구 4명당 1명이 에이즈 감염자인 것을 고려하면 더 많은 의료 인력이 필요한 상황인데도 실제 인력은 한국의 10분의 1도 되지 않는다. 인구 100만 명을 뒷받침하기에는 턱없이 적은 수다. 환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역부족인 인력으로는 복잡한 수술이나 진단 장비를 운영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다. 응급환자가 왔을 때엔 스와질란드에서 수술실이 비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차라리 대여섯 시간 차를 달려 남아공 병원으로 이송하는 게 더 나을 때도 있다.

103만 명 인구 책임지는 170명의 의사

170여 명의 의사가 모두 스와질란드 출신인 것도 아니다. 수교를 맺은 대만에서 파견 나온 의사들이 의료 인력의 공백을 메워주고 있다. 파견 의사들은 대부분 한국의 공중보건의처럼 병역을 대신해 와서 짧은 파견 기간이 끝나면 고국으로 돌아가버린다. 환자와 유대감을 쌓거나 장기적으로 관리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환자의 예후를 꾸준히 모니터링하면서 약 용량을 조절하고 부작용을 확인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스와질란드처럼 의료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지역에 사는 전세계 20억 명 이상의 사람들이 기초적인 외과 시술을 받지 못한 채 목숨을 잃고 있다. 전문의가 없는 문제뿐 아니라 수술실이나 산소농도계 등 기본 장비조차 없는 현실도 원인이다. 질병으로 인한 피해 중 11%가량은 기본적인 외과 시술로도 줄일 수 있다. 이런 피해의 상당수가 빈곤국에서 발생하지만 제대로 된 대처는 이뤄지지 않는다. 빈곤국과 선진국의 수술실 확보량은 20배 이상 차이가 난다. 매년 전세계에서 발생하는 외과수술 2억400만 건 가운데 75%는 상위 20억 명에게 행해지고, 하위 20억 명이 받는 외과수술은 4%에 불과하다. 이 차이는 앞으로 더 벌어질 것이다.

장비를 다룰 수 있는 인력 부족도 심각하다. 컴퓨터단층촬영(CT)이나 자기공명영상(MRI) 같은 값비싼 진단 장비를 해외에서 지원받아도 이를 다룰 기술자가 부족해 제대로 운영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곳 병원에서는 당뇨 환자의 혈당측정기에 들어가는 일회용 전자칩이 부족해 일부 환자는 내가 있는 클리닉에서 혈당을 측정해 지정 병원에서 약을 타기도 한다.

언어적 장벽도 큰 걸림돌이다. 장비나 인력이 부족한 환경에서 정확히 진단하려면 환자한테서 병력과 가족력을 자세히 들어야 한다. 통역을 해주는 사람이 있더라도 질문 의도가 정확히 전달되지 않으면 잘못된 정보를 바탕으로 치료할 수밖에 없다. 특히 에이즈 감염처럼 환자의 심리적 안정이 중요하고, 그래서 환자를 이해하는 일이 필수적인 질병에서 이런 문제의 심각성은 더 커진다. 에이즈 감염자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소외다. 소외감과 공포로 인한 심리적 부담감은 환자 상태에도 영향을 끼치기에 에이즈 감염자를 대상으로 한 상담이 중요하다. 환자가 심리적으로 불안정해지면 치료 순응도가 낮아진다. 항바이러스제를 제때 받으러 오지 않거나 치료를 포기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만큼 병의 예후도 나빠진다.

필자가 일하고 있는 의료봉사 클리닉 모습(왼쪽). 에이즈 말기에 접어든 이 환자는 결핵으로도 고생하고 있지만 난방 장치가 없어 연기가 자욱한 부엌에서 지내고 있다. 정준호 제공

필자가 일하고 있는 의료봉사 클리닉 모습(왼쪽). 에이즈 말기에 접어든 이 환자는 결핵으로도 고생하고 있지만 난방 장치가 없어 연기가 자욱한 부엌에서 지내고 있다. 정준호 제공

무리한 간호사 양성으로 부작용도

의료인이 환자의 사회·문화적 배경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환자와 의사 간에 신뢰를 쌓는 데도 한계가 있다. 에이즈처럼 감염자뿐만 아니라 배우자도 큰 영향을 받는 질병은 부부 동반 상담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감염 사실을 어떻게 배우자에게 알릴지, 어떻게 안전한 성생활을 위한 교육을 할지에 대한 부분은 언제나 민감하다. 나 역시 일부일처제 사회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이곳의 일부다처제 사회에서 남녀 역할이 어떻게 다른지 정확히 이해하기 힘들어 상담을 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스와질란드에서도 의료 인력의 극심한 부족을 타개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 비록 의과대학은 없지만 국립병원 부속 간호대학에서 간호사를 양성한다. 하지만 이 역시 한계는 있다. 자체적으로 의료 인력을 충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간호사를 키워내다 보니 자격 요건이 충족되지 않는 사람도 억지로 졸업을 시킨다. 게다가 과도한 업무량은 의료 질을 더욱 낮추고 있다. 다른 지역 보건소의 간호사들이 일에 치여 엉망으로 처리해놓은 드레싱을 갈아주며 분통을 터뜨리는 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간호사가 지역 보건소에서 처리해야 하는 일을 보면 그들의 일처리 방식이 어느 정도 이해는 된다. 대체로 지역 보건소에는 한두 명의 간호사가 일한다. 그런데 관리해야 하는 지역은 산길을 타고 1시간 넘게 차를 타고 달려야 할 만큼 광범위하다. 꾸준한 모니터링이 필요한 결핵이나 에이즈 환자도 지역마다 수백 명에 달한다. 이렇다 보니 간호사의 역할 범위가 너무 넓어져 생기는 문제도 있다. 기본적인 1차 의료 지원뿐만 아니라 포경수술 같은 간단한 외과수술, 조산, 환자를 위한 심리상담까지 모두 맡아서 해야 한다. 이렇게 간호사 역할이 지나치게 확대되다 보니 일부 지역에서는 간호사의 불법 낙태 시술 때문에 산모가 목숨을 잃기도 한다.

산 너머에 사는 할아버지는 전립선암이 의심됐다. 내가 처음 스와질란드에 왔을 때 병원에 가서 조직검사를 받았는데, 여기서 조직검사 결과를 판독할 병리학자가 없어 샘플을 남아공 병원에까지 보내야 했다. 할아버지는 결과를 받아보기도 전에 돌아가시고 말았다. 들판 너머에 사는 할머니는 얼마 전 뇌졸중에 걸렸다. 좌반신 마비가 왔지만 감각이 살아 있어 재활만 꾸준히 한다면 충분히 회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는 재활의학과가 없다. 할머니는 자기 힘으로 다시 걸을 수 있을까.

의사 파견 대신 의료 교육 지원을

환자부터 의료 인력까지 고통스러운 스와질란드의 의료난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지속적인 의료 인력 파견보다는 양질의 의료교육 시설을 확립하는 것이다. 좀더 체계적이고 안정된 교육이 이뤄진다면 더 나은 의료를 제공할 수 있고, 그만큼 사람들 삶의 질도 나아지지 않을까. 의료 지원이란 의사나 약품을 공급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체계적인 의료 기반을 닦아주고 필요한 의료 서비스를 자급자족하게 해주는 것이 진정한 의료 지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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