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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물리학이 필요한가

14년간 55억달러 들인 거대강입자충돌기 드디어 완성… 그토록 엄청난 지출은 정당화할 만한 것일까
등록 2008-10-17 06:30 수정 2020-05-02 19:25

지난 9월 초 과학계는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에서 막 가동을 시작한 ‘거대 강입자충돌기’(LHC·Large Hadron Collider)에 관한 소식으로 떠들썩했다. 14년 동안 순제작비만 55억달러가 소요된 세계 최대의 입자가속기인 LHC는 이전까지 가장 큰 가속기였던 미국 페르미국립가속기연구소의 ‘테바트론’(Tevatron)보다 7배나 큰 에너지를 얻을 수 있고 둘레 길이만도 27km에 달하는 거대한 장치다. 고에너지 물리학자들은 높은 에너지를 가진 양성자를 서로 충돌시킬 때의 반응을 ‘관찰’함으로써 1964년 영국의 물리학자 피터 힉스가 예측했던 ‘힉스 입자’(Higgs boson)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LHC의 실험 소식은 ‘빅뱅 실험’이니 ‘우주 탄생 순간의 재현’이니 하는 수식어들과 함께 대중 매체에서도 높은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LHC 가동에 관한 언론 보도들은 이번 실험이 갖는 과학적 의미에 대한 소개와 전례없는 규모의 실험에 대한 호기심만이 가득 차 있을 뿐, 그러한 대규모 과학의 배경이 되는 정치사회적 맥락에 대한 설명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지난 9월 초 완공된 거대 강입자충돌기(오른쪽)와 건설 전 조감도. 현재 LHC는 연결 장치의 문제로 가동이 중단된 상태다.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는 내년 봄 재가동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유럽입자물리연구소 제공.

지난 9월 초 완공된 거대 강입자충돌기(오른쪽)와 건설 전 조감도. 현재 LHC는 연결 장치의 문제로 가동이 중단된 상태다.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는 내년 봄 재가동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유럽입자물리연구소 제공.

SSC. 미국 주도 패권주의 과학의 실패

사실 1960년대에 완성된 테바트론을 넘어서는 거대 입자가속기를 만들자는 계획은 LHC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0년대에 이미 미국의 물리학자들은 테바트론의 20배에 달하는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거대 입자가속기인 ‘초전도 슈퍼콜라이더’(SSC·Superconducting Supercollider)의 건설을 추진한 적이 있다. 1983년 유럽입자물리연구소에서 약한 핵력을 매개하는 입자인 W입자와 Z입자의 발견 사실을 공표하자 미국 내에서는 소련과 유럽에 맞서 미국이 고에너지 물리학의 주도권을 다시 찾아와야 한다는 주장이 부각되기 시작했고, 이듬해 제안된 SSC는 그러한 패권주의적 발상의 산물이었다. SSC는 완성될 경우 둘레 길이가 87km에 달하는 거대 장치로, 레이건 당시 대통령이 계획을 승인한 1987년에는 건설에 44억달러가 들어갈 것으로 예상됐다.

노벨상 수상자인 리언 레이더먼과 스티븐 와인버그를 포함한 저명한 과학자들은 SSC를 통한 빅뱅 직후 초기 원시 우주 상태의 재현을 ‘신의 음성’에 비유하거나 입자가속기를 성당에 비유하는 식의 종교적 수사를 동원해가며 프로젝트의 정당성을 홍보하는 캠페인에 나섰다. 특히 레이더먼은 힉스 입자를 ‘신의 입자’(God particle)라고 부르면서 SSC의 건설이 곧 신성(神性)에 이르는 첩경이라는 식의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SSC는 이내 불운한 종말을 맞았다. 애초 44억달러였던 예상 건설비는 눈덩어리처럼 불어나 공사가 시작될 즈음인 1990년에는 79억달러로 상향조정됐고, 1993년 일반회계국 조사에서 또다시 110억달러로 뛰어오르자 미국 의회는 1993년 결국 프로젝트를 백지화했다. SSC가 실패를 맛본 데는 규모와 체제 경쟁에 집착하는 냉전적 사고방식과 미국 중심의 국가주의적 태도가 크게 작용했다. 계획 초기에 SSC를 국제적인 과학 프로젝트로 만들 것을 주장했던 일본 물리학자들은 “SSC는 미국의 시설”이라는 면박을 들어야 했는데, 미국의 이러한 오만함은 이후 예산 부족에 허덕인 SSC를 구해내는 데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


완공 예정 2002년으로부터 6년 더 걸려

SSC보다 조금 늦게 시작한 LHC 역시 추진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LHC가 처음 제안된 것은 1981년으로 SSC보다 오히려 앞서지만, 유럽입자물리연구소에서 LHC에 대한 연구와 논의가 시작된 것은 한참 뒤인 1988년부터였다. 당시에는 규모가 훨씬 큰 SSC 계획이 미국에서 추진 중이었기 때문에, LHC 건설을 주장한 사람들은 LHC가 SSC가 잘 안 될 때를 대비한 일종의 ‘보험’으로서, 또 여러 가지 종류의 실험을 할 수 있는 다용도 충돌기로서 가치가 있다는 주장을 폈다. 1991년 11월 유럽입자물리연구소 이사회는 LHC가 “고에너지 물리학의 발전과 연구소의 미래를 위해 필요한 기계”라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LHC 건설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유럽연합(EU) 회원국들이 모이는 유럽입자물리연구소 이사회에서 LHC 건설 계획안이 승인되는 과정은 험난했다. 1993년에 1차로 계획안이 제출됐지만, 예산 증가에 비판적인 일부 회원국들은 비용의 추가적인 감축을 요구했다. 특히 영국과 독일은 LHC가 위치해 더 많은 혜택을 보게 될 스위스와 프랑스가 추가로 더 많은 금액을 기부할 것을 요구하면서, 제안된 예산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994년에 유럽입자물리연구소는 LHC에 설치될 전자석의 3분의 1 정도를 일단 제외해 건설 비용을 절감한 뒤 나중에 예산이 확보되면 빠진 전자석을 채워넣는 임시변통 방식을 제시함으로써 이사회의 최종 승인을 얻었다. 이러한 상황은 1995년 비회원국인 일본이 상당한 액수를 기부하기로 약속하고, 러시아·인도·캐나다·미국 등과의 협상이 긍정적으로 진행되면서 조금씩 호전됐다. 예산이 웬만큼 확보되면서 1996년에는 LHC 전체를 한번에 건설하는 쪽으로 수정 계획안이 다시 제출됐다.

그러나 LHC의 어려움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동·서독 통일에 수반된 엄청난 비용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독일이 국제적 과학 프로젝트에 지원하는 예산을 대폭 삭감하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유럽입자물리연구소에 들어가는 예산을 감축하기 위해 기회를 계속 엿보고 있던 영국도 여기 가세했다. 결국 연구소는 1997년 이사회의 동의를 얻어 차관을 들여와 부족한 공사비를 메우는 길을 택했다. 적자 운영은 위험천만한 일이지만, 당시로서는 LHC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던 것이다. LHC는 애초 2002년 완공 예정이었으나 예산 문제로 여러 차례 연기돼 결국 올해 들어서야 완성이 됐다.

태초의 비밀·신의 마음… 수사들의 향연

SSC의 ‘실패’와 LHC의 ‘성공’은 거대한 실험 장치의 존재에 결정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는 거대과학 분야의 현주소를 잘 보여준다. SSC는 냉전기의 체제 대결 의식에 뿌리를 둔 거대과학 프로젝트가 변화한 상황 속에서 살아남을 수 없음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이에 비해 LHC는 일견 성공한 사례로 평가할 수 있다. 자금 압박과 프로젝트의 의미에 대한 회의적 태도가 계속해서 위기의식을 조성했음에도 국제적 공조와 여러 임시변통 수단을 동원해 어렵게나마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점에서 LHC는 탈냉전 시기에 거대과학이 그나마 살아남을 수 있는 한 방법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LHC의 ‘성공’은 다른 점에서는 더 큰 물음을 낳고 있다. 과연 LHC가 추구하는 목표들이 그것의 실현 가능성 여부와 무관하게 그토록 엄청난 지출을 정당화할 만한 것인가 하는 질문이 그것이다. 고에너지 물리학자들은 태초의 비밀을 밝혀낸다느니, ‘신의 마음’을 들여다본다느니 하는 수사들을 이용해 자신들의 연구를 정당화해왔지만, 갈수록 엄청난 비용을 수반할 수밖에 없는 이러한 연구가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것인지는 논의의 여지가 많다. 그런 점에서 이번 LHC의 가동은 “우리에게는 어떠한 물리학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대해 깊은 숙고가 필요함을 역설적으로 웅변해주고 있다.

김명진 성공회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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