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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신자서전III] 테러리스트는 누구인가

등록 2001-04-11 00:00 수정 2020-05-03 04:21
팔레스타인 무장항쟁그룹 ‘하마스’ 지도자 야신의 수기 III- 국제사회의 ‘정의’에 관하여

나는 1997년 10월1일, 하마스의 동지 카리드 미샤알을 요르단에서 암살하려다 체포된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의 요원과 맞교환하는 형식을 빌려 석방되었다.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나를 극단적인 ‘회교근본주의자’니 심지어 최악의 ‘테러리스터’라 불렀건 어쨌건, 나의 석방은 알라신의 의지였다고 믿었다. 해서 나는 이 무렵 팔레스타인의 미래에 대한 전망과 인류 평화에 대한 염원을 밝히겠다고 결심했고, 그게 내가 공표한 잠정적인 대이스라엘 휴전 선언으로 드러났다. 이건 공격적인 침략자 이스라엘과 그들에게 희생당해온 팔레스타인 사이의 정전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즉각 우리의 휴전 제의를 거부했고, 결국 우리는 또다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항쟁의 깃발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 글을 통해 나는 명확하고도 간결한 의지로 세계 시민들에게 다시 한번 우리들의 의지를 알리고 싶다. “나를 포함한 팔레스타인의 그 누구도 전쟁과 유혈사태를 원한 적이 없다.” 핏빛 그림자로 뒤덮인 중동의 이 불행은 이스라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의 땅을 침략하면서부터 시작된 일일 뿐이다.

내 삶을 지배해온 것은 ‘중용’

팔레스타인의 땅과 성지를 강제로 점령한 채, 팔레스타인 시민들을 쫓아내고 유대인들을 정착시킨 이스라엘의 침략 앞에 우리가 가질 수 있었던 대안이란 게 도대체 무엇이었던가? 나는 1948년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침략한 이래 오늘 2001년 4월까지 이 질문을 붙들고 고민해왔으나, 그동안 우리가 제의했던 어떤 형태의 대안이나 정책도 사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만을 뼈저리게 깨달았을 뿐이다. 심지어 우리가 추구해왔던 평화적인 해결을 위한 그 많은 노력들은 모두 강자의 논리 앞에 조롱거리가 되고 말았다. 우리의 모든 평화적인 노력은 온데간데 없이 내게 남은 건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미국과 유럽이 붙여준 ‘테러리스터’란 별명뿐이다.

테러리스터라? 이 ‘거룩한’ 별명이 내게 적합한 건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 난 김에 굳이 한마디 덧붙이자면, 내 삶의 철학을 지배해온 것은 중용이었다. 다시 말해, 나는 일생을 ‘엄격’과 ‘관용’의 한가운데 지점을 따라 걸어온 온건주의자였다. 따라서 이스라엘과 그 지원세력들이 나를 ‘극단주의자’니 ‘근본주의자’니 또는 ‘테러리스터’라 부르는 건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왜? 그 답은 간단하다. 불법 침략자에 대항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기초적인 권리이기 때문이다.

자, 여기 내 개인만을 놓고 볼 때도, 나는 법적 권리의 주체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 침략해서 강점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그 땅의 주인이다. 만약 외국의 군대가 한국을 침범해서 당신과 가족들을 쫓아냈다면? 그래서 당신은 조국을 찾기 위해 투쟁했는데, 누가 당신을 극단주의자니 테러리스터라고 부른다면? 마찬가지로 내가 나의 조국 땅을 되돌려 달라고 요구한다고 나를 극단주의자니 테러리스터라고 불러야 옳은가? 만약 그 대답이 “예”라면, 나는 그 극단주의자니 테러리스터라는 칭호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명예로운 이름으로 간직할 것이다.

누가 외적의 침입을 자연스러운 일로 인정하며 ‘관용’을 부릴 수 있다는 말인가. 한국의 영토를 일본이 침략했을 때, 한국의 시민들은 자신들의 순결한 투쟁의 역사를 테러리스터나 극단주의자들의 난동으로 부르고 있는가. 왜 팔레스타인의 독립투쟁만 유독 국제사회에서는 테러리스터의 난동이라 불려야 하는가. 자유와 독립을 시민권의 최고 가치로 여기는 미국과 유럽에서 어떻게 이런 희한한 호칭을 팔레스타인에 붙여놓았는지 알 수 없다. “누가 테러리스터고 누가 희생자인가.” 이 간단한 걸 구분하지 못하는 인류가 과연 그 복잡한 21세기의 평화 철학을 말할 자격은 있는 것일까. 500만 팔레스타인 시민 가운데 400만명이 이스라엘 유대인들에 의해 국외로 쫓겨난 이 현실이 아직도 부족해서? 아니면, 핵무기와 신경가스, 미사일과 최신예 폭격기를 지닌 이스라엘군 무장상태가 비무장 팔레스타인 시민에 비해 여전히 신통찮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미국과 유럽은 이스라엘을 ‘희생자’라 부를 수 있겠는가? 공격자를 희생자로 치켜세우고 희생자를 테러리스터라 부르는 이 일그러진 국제사회의 이성이 적어도 팔레스타인 시민들에게는 정의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국제연합, 이것도 한통속이었다. 국제연합은 팔레스타인에 노예의 복종을 강요했을 뿐이다. 국제연합은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정을 따르지 않는 국가들- 주로 미국의 이익에 반하는- 에 손찌검을 해왔는데, 유독 이스라엘만은 손을 보지 않았다. 국제연합의 모든 결정을 파기시켜온 그 이스라엘만은 온전하게 보호받아왔다는 말이다. 국제연합의 이름으로 까무러칠 만큼 두들겨맞았던 이라크나 유고처럼 또는 리비아나 수단처럼 왜 이스라엘은 응징을 당하지 않는 것인가. 오히려 이스라엘이 국제법을 어길 때마다 미국과 그 동맹국들은 징벌 대신 최신무기를 안겨주며 오늘날 이스라엘을 중동 최고무장국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이게 팔레스타인이 보는 국제사회의 ‘정의’, 바로 그 정확한 수준이다.

왜 국제사회는 이스라엘을 그냥 놔두나

따라서 나는 을 통해 확인한다. 만약 국제사회가 조국과 자유에 대한 숭배를 테러라고 규정한다면, 나는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악질스러운 테러리스터라고 부르는 그들의 호칭을 명예롭게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건,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이스라엘의 중무장 아파치 헬리콥터에서 발사되는 미사일들이 독립을 외치는 팔레스타인 아이들을 향해 불을 뿜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 이스라엘군의 함포사격이 가자지구를 초토로 만들어가고 있다는 현실이다. 지금 팔레스타인의 도시와 난민촌의 시민들은 직장을 잃고 물과 음식의 공급마저 방해받은 채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고 있다. 물론 이스라엘 군인들로부터다. 이스라엘의 침략을 거부하며 자유를 외친 까닭으로.

한국의 청년들에게 바라는 것

나는 의 독자들에게 현 팔레스타인의 상황을 주의깊게 응시해 주기를 진심으로 부탁드린다. 왜 팔레스타인 시민들이 이스라엘군으로부터 50년이 넘도록 희생당하고 있는지, 어째서 국제사회는 50년이 넘도록 계속되는 현대사의 비극을 방치하고만 있는지….

나는 이제 팔레스타인 문제도 새롭게 국제사회를 짊어지고 갈 한국의 청년 독자들과 세계 시민들에게 달렸다고 믿고 있다. 특히 정의로운 한국의 독자들에게 나는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최대의 존경과 감사의 기도를 함께 담아 올린다.

아흐메드 야신(Ahmed Yassin)/ 하마스 최고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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