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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해방의 신호탄을 쏘다

등록 2003-07-10 15:00 수정 2020-05-02 19:23

정선태의 번역으로 만난 근대 | 1. 헨리크 입센의

여성이 자기발견 통해 허구적 신화에 맞서… 인간이 되기 위한 투쟁은 지속되고 있다

‘내가 인형을 가지고 놀 때/ 기뻐하듯/ 아버지의 딸인 인형으로/ 남편의 아내 인형으로/ 그들을 기쁘게 하는 위안물 되도다/ (후렴) 노라를 놓아라/ 최후로 순수하게/ 엄밀히 막아논/ 장벽에서/ 견고히 닫혔던/ 문을 열고/ 노라를 놓아주게.’

근대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소설가이기도 했던 나혜석이 시를 쓰고 작곡가 김영환이 곡을 붙인 노래 의 1절과 후렴이다. 뛰어난 예술가로서 명성을 떨쳤지만 행려병자로 외롭게 죽은 나혜석의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삶이 증명하듯, 여성 역시 합리적 이성을 지닌 자율적 인간임을 선언한 한 선각자가 어떤 길을 걸어야만 하는지 예언한 노래였다. 3·1운동의 폭풍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1920년대 초, 나혜석을 비롯한 몇몇 신여성들은 이렇게 남성 중심의 권위와 도덕률에 도전장을 던진다. 이들은 기꺼이 남편과 자식에 대한 의무라는 장벽을 넘어서 인간으로서의 여성을 발견하려는 고난에 찬 여정을 선택했다.

남성 중심의 사회에 도전장 던져

여성은 남성의 ‘인형’이자 ‘장난감’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자각하고 자신의 생명과 삶의 존엄성을 선택하면서부터 나혜석으로 대표되는 ‘혁명적 지식인’들은 냉소와 비난과 조롱 등 미시적 폭력뿐 아니라 권력과 조직을 동원한 거시적 폭력까지, 가혹한 시련을 감내해야만 했다. 기득권을 지키려는 남성들의 위협과 엄살을 겸한 ‘대여성 전술’은 지금과 크게 다를 게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 옆에 든든한 정신적 후원자 헨리크 입센이 있었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입센의 대표작 번역이 있었기에 그들은 남성이 지배하는 세계의 모든 권위와 허위로 가득 찬 관념을 전복하고 ‘여성 인간 선언’을 감행할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산다는 것은 자신 속에 깃들어 있는 악의 힘과 싸우는 것이며, 창작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심판을 내리는 것”이라는 말을 인생과 예술의 에피그램으로 삼았던 입센은 초기의 종교적이고 낭만적인 경향의 작품들에서 사회적 문제로 관심을 돌려 등을 잇달아 발표한다. 이 가운데 1907년 도쿄에서 처음 무대에 오른 은 새로운 사상에 목말라 있던 지식청년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제국의 수도에서 입센을 만났던 중국과 조선의 청년들은 입센이즘을 전파하는 전도사로 나선다. 동아시아의 입센 열풍과 노라 신드롬! 드디어 여성해방의 표상이자 아이콘이기도 했던 의 주인공 노라는 도쿄와 베이징 그리고 경성에서 수많은 ‘노라들’과 함께 거리를 활보하기 시작한다.

중국에서는 천두슈, 루쉰, 후스 등 ‘신청년’ 멤버들이 입센을 적극적으로 소개했으며, 한국에서는 1921년 중국문학자이자 소설가였던 양건식이 에 의 번역을 처음 연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뒤 1930년대 말에 이르기까지 이념적 성향에 관계없이 많은 지식인들이 폭넓게 소개하고 번역한 은 일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고, 집안에 인형처럼 갇혀 있던 여성들을 거리로 불러내는 기폭제 역할을 함으로써 사회적 파문의 진원이 되었다. ‘아내이고 어머니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살고 싶다’며 개인의 완전한 자유를 선언하는 노라는 말 그대로 여성해방의 ‘화신’이었다.

사이비 노라들이 거리를 떠돌지라도

‘예속을 강요한 남성에게 선전포고한 전사’ 노라. 그러나 해방의 열정이 종종 잘못 이해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루쉰은 어느 강연에서 투쟁을 통해 존재의 근거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집을 나온 노라는 굶어죽거나 창녀가 되거나 아니면 다시 집으로 돌아가 순순히 인형 노릇을 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번역된’ 노라는 조선에서도 적잖은 굴절을 겪는다. 1930년대 수많은 신여성들이 노라를 빙자하여 자신의 삶을 또 다른 인형의 삶으로 몰아넣는, 이른바 ‘사이비 노라’들이 적지 않았다. 1933년 채만식의 장편소설 의 주인공 임노라의 삶의 역정을 통해 볼 수 있듯, 여성이 한 인간으로 서는 데는 예상을 뛰어넘는 함정과 허방들이 곳곳에 놓여 있다. 지금껏 여성 위에 군림해온 남성들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망각하는 순간, ‘인형의 집 탈출’은 요원한 일일는지 모른다. 여성노예화의 역사가 어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겠는가.

인류의 역사는 참으로 오랫동안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사회의 모든 권력을 장악한 남성들은 ‘현숙한 아내’ 또는 ‘자애로운 어머니’의 신화를 유포함으로써 여성들의 무의식까지 점령해버렸다. 남성보다 더 남성적인 시각을 지닌 여성이 적지 않은 것도 이러한 신화가 우리의 삶에서 아직껏 현실적 힘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 많이 좋아졌다는 지금도 그러할진대, 전근대 사회에서 근대사회로 이제 막 발걸음을 내디딘 식민지 초기의 상황이 어떠했을지 그 사정을 짐작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권력과 결탁한 애인들(법률가이자 관료였던 김우영, 당대 최고의 문사 이광수, 천도교 교령이자 중추원 참의였던 최린)의 ‘파렴치한’ 배신에 맞서 정면으로 싸웠던 ‘한국 최초의 노라’ 나혜석은 여성해방과 인간해방을 생각하는 데 하나의 시금석이라 할 것이다.

식민지 신여성의 문제의식은 진행형

노예해방이나 여성해방이라는 말은 있어도 주인해방이나 남성해방이라는 말은 없다. 이는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다. 요즘 세상에 ‘여자도 사람이다’라고 말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이상하게 바라볼 것이다. 남녀평등이라는 말도 이미 진부해지고 말았다. 그러나 아직껏 여성을 인간으로 여기지 않는(또는 못하는) 남성들이 수없이 많다. 부질없는 오해였으면! 그러나 여자는 사람이 아니라고 인식되기 때문에 ‘여자도 사람이다’는 말이 존재하는 것이리라. 인간인 여성이 인간이 되기 위한 지난한 과정 또는 그 역설, 하지만 인류의 역사에서 여성이 인간으로 분명하게 자기를 주장할 수 있었던 시기는 지극히 짧았다. 한국의 경우, 1920년대 이후 의 수용과 번역은 여성이 남성이나 가족에 종속된 부속품이 아니라 인간임을 선언한 전사들의 ‘반역’을 방조했으며, 인간해방을 알리는 신호탄을 쏘는 데 적잖은 ‘탄약’을 제공했다는 ‘혐의’를 벗기 어려울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동시에 남성)은 여전히 인간이 되기 위한 도정에 있다. 여성이 인간이 되지 않는 한, 확언하건대 남성도 결코 인간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의 번역과 함께 식민지 시대 신여성들이 제기했던 문제의식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며, 입센이 말했듯 이는 여성의 문제라기보다 인간의 문제라고 보는 게 옳다. 유우상(劉禹相)은 1926년에 이미 라는 글에서 “현존하는 사회조직의 모든 권위와 신념과 의무에 반항하여 도전하는 이 모든 강렬한 진리의 파지자(把持者)의 개성적 혁명사상은 여성주의 속에서 배태되었던 것”이라고 갈파하지 않았던가.

정선태 | 연구공간 수유+너머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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