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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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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더지와의 평화협정

“네가 먹을 수 있는 건 돼지감자”라고 했건만 파 모종과 비싼 튤립 구근을 건드리고 말았으니
등록 2022-11-22 06:08 수정 2022-11-25 04:32
두더지와 평화협정(?)을 맺은 뒤 기념촬영.

두더지와 평화협정(?)을 맺은 뒤 기념촬영.

딸기 사이사이에 파 모종을 심어놨는데 두더지가 굴을 파놨다.

딸기 사이사이에 파 모종을 심어놨는데 두더지가 굴을 파놨다.

농사짓는 친구네 집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그 병을 오려 바람개비를 만들었다. 친구가 워낙 아기자기한 밭을 꾸리며 살기에 주변을 예쁘게 꾸미려 하나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의 답변을 들었다. 바람개비가 돌아가면서 땅을 울리기 때문에 두더지에게 스트레스를 준다는 거다.

야생동물은 농사의 큰 적이다. 2020년 초 ‘토종이 자란다’ 공부모임에서 병충해와 야생동물을 주제로 한 시간 정도 대화를 나눴는데 그때의 속기록을 보면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하늘부터 땅에 있는 것까지 모두 고민”이라는 말로 간담회가 시작된다. 야생동물은 어찌나 얄밉게 굴던지 처음에는 나눠 먹을 생각을 했어도 “친구들을 몰고 와서 몽땅 쓸어 먹고” “끝까지 먹어치우지 않고 조금씩 여러 개를 건드려놔 수확량을 줄이는” 만행 때문에 하나도 주고 싶지 않아진다. 하지만 ‘손’(정말 이렇게 불렀다!)이 발달한 너구리가 땅콩을 캐서 덤불에 옮겨둔 바람에 덤불에서 땅콩 싹이 올라왔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는 나도 모르게 동화 같은 모습을 상상해버렸다. <피터 래빗>에 나올 법한 모습으로 야무지게 땅콩을 수확하는 귀여운 너구리 농부 말이다. 키득거리며 타이핑하자 누군가 언성을 높이며 말한다. “지금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 이게 웃을 일이 아니라고!”

야생동물에 대응하는 농민들의 방법도 창의력이 넘친다. 밭이 인간의 구역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자리를 비운 빈 밭에 라디오를 켜놓거나, 고양이에게 밥을 주며 쥐를 잡는 ‘순찰냥’으로 키우기도 한다. 새를 쫓겠다며 가을마다 밭에서 텐트를 치고 캠핑하는 가족도 있고, 결계를 치는 심정으로 멧돼지가 싫어하는 꽃무릇을 잔뜩 심기도 한다. 이런 이야기를 귀동냥하는 것은 재밌지만 도시농부는 금세 외로워진다. 나는 언제쯤 저들의 대화에 끼어들 수 있을까.

그런데 올봄 우리 밭에서도 두더지 굴로 추정되는 구멍이 발견됐다. 심지어 얼마 지나지 않아 두더지랑 마주치기까지 했다! 실제 만난 두더지는 참 귀여웠지만 주워들은 풍문이 많아 이내 두려워졌다. 그래서 두더지를 잡고는 반강제적 평화협정을 맺었다. “잘 들어. 여기서 네가 먹을 수 있는 건 돼지감자뿐이란다.”

두더지도 내 말을 알아들은 걸까. 가끔 땅에 구멍이 뿅 뚫리기는 했지만 기특하게도 작물을 심지 않은 곳에만 흔적을 남겼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 유지되던 우리의 평화협정은 깨져버렸다. 줄 맞춰 심어놓은 파 모종 사이로 커다란 구멍을 만들고 몇 포기는 구멍 속으로 숨겨버리지를 않나, 큰맘 먹고 사다 심은 비싼 튤립 구근도 다 헤집어놨다. 애써 깊이 심어놓은 구근이 땅 위를 구르는 모습을 발견한 인간의 성난 마음을 두더지는 알까.

당장에라도 못된 두더지를 찾아내 복수하고 싶지만 나는 생태적 순환을 끊으며 살아가는 인간의 만행을 속죄하며 조금이라도 생태적인 농사를 실천할 의무가 있는 도시농부다. 두더지가 내게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듯, 내 농사도 두더지 삶의 터전 위에서 이뤄지는 행위다. 자기 터전에 비집고 자라는 낯선 뿌리가 반갑지 않거나 당연히 자기 것이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두더지와 전쟁하는 대신 나는 두더지가 밭에서 하는 좋은 일을 찾아보기로 했다. 땅에 구멍을 내어 공기가 순환하는 통로를 만들어주는 것은 물론 달팽이와 개미 같은 해충도 먹어준단다. 하지만 인간에게 많이 미움받는 탓인지 개체수가 많이 줄었다 하니 나라도 두더지를 내쫓지 않기로 다짐했다. 일단 이 평화협정은 내년에도 유지하기로 한다. 대신 예측하지 못한 구멍에 화날 때마다 네 귀여운 모습을 보여다오.

글·사진 이아롬 프리랜서 기자

*농사꾼들: 농사를 크게 작게 지으면서 생기는 일을 들려주는 칼럼입니다. 김송은 송송책방 대표, 이아롬 프리랜서 기자, 박기완 경남 밀양의 농부가 돌아가며 매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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