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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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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천국’ 전도사들의 성공과 추락

미국 보수파 경제학의 40년 성패를 추적한 <경제학자의 시대>
등록 2022-11-17 05:09 수정 2022-11-18 06:52

오늘날 경제학은 학문의 여러 분야 중에서 특별한 지위를 누린다. 미국 경제학자 폴 새뮤얼슨은 “경제학은 사회과학의 여왕”이라고 했다. 노벨상 6개 부문 중 사회과학은 경제학이 유일하다. 노벨상은 1901년 제정 당시 물리학, 화학, 생리·의학, 문학, 평화 등 5개 부문이었는데 1969년부터 경제학상이 추가됐다. 무엇보다 경제학은 금융·재정·산업·주택 등 다양한 공공정책으로 우리 삶에 즉각적이고도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더 정확히는 경제학자들이 그렇다.

경제학자들이 언제부터 어떻게 보통 사람의 일상에 깊숙이 개입하게 된 걸까? 그들의 정책 처방이 사람들 살림살이에 얼마나 보탬이 됐을까?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의 경제 주필 빈야민 애펠바움이 쓴 <경제학자의 시대>(김진원 옮김, 부키 펴냄)는 “혁명가도 예언자도 아닌 한 무리의 경제학자들”이 20세기 후반 짧은 기간에 세계 수십억 명의 경제생활과 노동 조건, 사회복지, 심지어 사고방식까지 바꿔놓은 과정을 추적하고 그 공과를 평가한 책이다. 

영국 출신의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20세기의 가장 권위 있는 경제학자로 꼽힌다.

영국 출신의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20세기의 가장 권위 있는 경제학자로 꼽힌다.

이때 ‘경제학자’는 케인스 경제학에 맞서 정부의 어떠한 시장 개입에도 반대하고 시장의 기능과 결과를 그 부작용까지 포함해 옳다고 확신하는 “보수파 경제학자”를 가리킨다. 자본주의 왕국이자 현대 경제학의 본산인 미국이 주 무대다. 710여 쪽 분량(번역서 본문 기준) 중 주석이 4분의 1(180쪽)에 이를 만큼 방대하고 치밀한 자료와 증언, 회의 기록 등으로 설득력을 높이고 생생한 현장감을 되살렸다. 원저에 붙인 ‘거짓 예언자들, 자유시장, 그리고 사회의 균열’이라는 부제가 지은이의 주장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사반세기 동안 세계경제는 빛나는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 경기 과열이 부른 인플레이션과 성장 정체가 동시에 일어나는 스태그플레이션이 정부의 통제 범위를 벗어나면서 위기가 찾아왔다. 보수파 경제학자들은 정부의 개입을 만악의 근원으로 지목하고, 자신감을 잃은 정치인들에게 ‘시장 자유주의’를 설파했다. 

1962년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의 수석 경제자문위원 시절의 월터 헬러. 케네디 대통령과 린든 존슨 대통령은 헬러의 설득으로 케인스 주의에 따른 경제정책 실험에 착수했다. 부키 제공

1962년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의 수석 경제자문위원 시절의 월터 헬러. 케네디 대통령과 린든 존슨 대통령은 헬러의 설득으로 케인스 주의에 따른 경제정책 실험에 착수했다. 부키 제공

정부의 재정정책을 강조했던 존 메이너드 케인스에 맞서, 밀턴 프리드먼은 화폐(통화량) 공급만 통제하면 나머지는 시장이 알아서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고 주장했다. ‘자유 시장’의 신화는 1980년대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정부와 영국의 마거릿 대처 정부 시절을 거치면서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로 이어졌고, 2008년 세계 금융위기로 파산 선고를 받을 때까지 40년을 지속했다.

지은이는 바로 이 시기, 그러니까 1969년부터 2008년까지를 ‘경제학자의 시대’라고 명명한다. 과세와 공공지출 제한, 규제 완화, 독점금지법 제동이 경제정책의 미덕으로 추앙받고, 사상 처음으로 인간 생명이 달러 가치로 환산된 시기였다. 경제학자들은 자신들의 경제이론을 ‘이론’이 아니라 ‘과학적 진리’라고 확신하고 그에 맞춰 세계를 변혁해야 한다는 사명감과 열정으로 무장했다. 

시장 자유주의를 설파한 미국 시카고 학파의 핵심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  그는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한 유일한 처방으로 통화량 공급 통제를 꼽았다. 미국  방송이 프리드먼의 주저 제목을 붙인 시리즈 ‘선택할 자유’의 한 장면. 부키 제공 

시장 자유주의를 설파한 미국 시카고 학파의 핵심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  그는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한 유일한 처방으로 통화량 공급 통제를 꼽았다. 미국  방송이 프리드먼의 주저 제목을 붙인 시리즈 ‘선택할 자유’의 한 장면. 부키 제공 

경제학자 전성시대를 열고 이끈 인물이 밀턴 프리드먼이었다. 시카고대학을 중심으로 그와 견해를 같이하는 경제학자들은 ‘시카고학파’로 불리며 미국 정부의 경제정책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970년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RB) 의장에 이어 1972년 재무부 장관까지 경제정책 부처의 최고 직위를 처음으로 경제학자가 차지했다. 1970년대 말에는 미국 정부가 임용한 경제학자가 6천여 명으로 급증했다. 보수 공화당뿐 아니라 자유주의 성향의 민주당 정부도 그들의 입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보수 경제학자에게 순수한 시장 논리는 최고의 효율성을 보장하는 마술 램프였다. 프리드먼은 개인의 재능을 우선시하는 능력주의를 신봉했다. 하이에크는 “규제는 혁신에 내리는 사형 선고다. (…) 시장 법칙은 현존하는 최고의 규율”이라고 단언했다. 이들은 자신의 신념을 정부 정책에 적극 반영했다. 이를 두고 지은이는 “운전자는 추켜세우면서 도로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고 꼬집었다. 프리드먼은 경력을 쌓아가는 내내 “작은 정부에 대한 명분을 옹호할 학자를 열렬히 찾고 있던 부유한 후원자들의 지원을 흔쾌히” 수용했다. 케인스 경제학자인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가 “이른바 정통경제학은 빈번히 부자들의 요구를 반영한다”고 직격할 만했다. 

1987년 미국 의회 청문회에 출석한 폴 볼커 연방준비제도(FRB) 의장이 시가를 피우고 있다. 볼커의 인플레이션 억제 정책은 프리드먼의 통화 공급 이론을 실현한 것이었다. 부키 제공

1987년 미국 의회 청문회에 출석한 폴 볼커 연방준비제도(FRB) 의장이 시가를 피우고 있다. 볼커의 인플레이션 억제 정책은 프리드먼의 통화 공급 이론을 실현한 것이었다. 부키 제공

그렇다고 지은이가 보수 경제학의 공헌을 무시하는 건 아니다. “시장을 받아들이면서 전세계 수십만 명이 비참한 가난에서 벗어났다. 상품과 돈과 사상이 흐르면서 여러 나라가 긴밀히 묶였다. 지구상 77억 명 인구 대다수의 삶이 더욱 풍요롭고 건강하고 행복해졌다.” 

문제는 “시장 혁명이 여러 선진국에서 경제적 평등과 자유 민주주의와 미래 세대를 희생하는 대가”를 치렀다는 것. 경제학자는 정책 입안자에게 ‘수익 분배는 무시하고 성장 극대화에 집중하라’고 촉구했다. “(개인들의) 밥그릇 크기가 아니라 밥상 크기”에만 초점을 맞췄다. 경제학자들은 “공적 담론을 집단 간 경쟁에서 개인 간 거래로 바꿔놓았다”. 부의 불평등이 건강 불평등으로 이어지면서 미국인의 평균 기대수명도 낮아지고 양극화했다.

시카고학파는 교과서에서만 가능한 ‘효율적 시장 가설’을 내세워 금융산업의 규제 폐지에도 앞장섰고, 이는 새로운 종류의 도박을 부추겼다. 신용 파생상품은 이윤 극대화만을 좇는 자본주의의 정수라 할 만하다.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윌리엄 샤프는 ‘금융 혁신’이 경제 성장에 얼마나 도움이 되느냐는 질문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털어놨다. 그는 금융 파생상품이 “이 사람한테 돈을 빼앗아 저 사람한테 주는 것에 불과하다”면서도 “재미는 쏠쏠하다”고 덧붙였다. 은행가들은 금융위기 초래에 지대한 기여를 했지만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았다. 각국 정부는 국민의 세금을 퍼붓는 ‘긴급 구제’로 대형 은행들의 파산을 막았다.  

그러나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 경제학자가 주름잡던 시대는 (2008년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가 불러온) ‘대침체’를 넘어서지 못했다. 미국 정부는 공개시장에서 채권을 사들여 은행을 지원하려 했지만, 시장은 이미 붕괴된 뒤였다. 앞서 2006년에 프리드먼이 세상을 떠났다. 불과 2년 뒤 세계경제를 수렁으로 몰아넣은 사태를 목격하지 않고 타계한 것이 그에겐 행운일지 모른다. 그러나 시카고학파 경제학의 그림자는 지금도 한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위세를 부린다. 

1996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경제자문위원회 위원장 시절의 재닛 옐런. 옐런은 1990년대와 2010년대 두 차례나 연방준비제도(FRB) 이사로 활동했다. 부키 제공

1996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경제자문위원회 위원장 시절의 재닛 옐런. 옐런은 1990년대와 2010년대 두 차례나 연방준비제도(FRB) 이사로 활동했다. 부키 제공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 출마를 준비하던 2021년 7월 한 경제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밀턴 프리드먼의 주저 <선택할 자유>를 인생 책으로 꼽았다. 케인스 이론이 대세이던 대학 시절에 이 책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며, 그 뒤로도 27년 동안이나 “이 책을 항상 갖고 다녔다”고 했다. 기업 규제 철폐, 부유층 상속세 완화, 노동시간 상한(주 52시간) 반대, 부동산 대출 규제 완화, 도심 재건축 허용 등을 주장하면서다. 그는 이 인터뷰에서, 부정식품 단속도 “소비자의 선택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라며 부정적 시각을 드러냈다. “없는 사람은 그 아래도 선택해 싸게 먹을 수 있게 해줘야 한다. 먹는다고 당장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고…”라는 말도 덧붙였다. 미국의 경제 전문 저널리스트가 ‘시대의 종언’을 진단한 자유시장의 신화를 윤석열 정부는 지금도 의심 없이 맹신하는 건 아닐까? 그가 틈날 때마다 강조하는 ‘자유’는 누구의 어떤 자유일까?

지은이가 책의 말미에 결론 격으로 쓴 한 대목은 이렇다.

“시장 경제는 가장 놀라운 인간의 발명품이다. 부를 낳는 강력한 기계다. 하지만 한 사회를 평가하는 척도는 피라미드 계층 구조에서 가장 윗단에 속한 사람들의 삶의 질이 아니라 가장 아랫단에 속한 사람들의 삶의 질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는 의도적으로 번영의 분배를 외면해왔다. 이 때문에 지금 자유 민주주의가 선동을 일삼는 국수주의 정치가한테 그 생존을 시험당하고 있는 것이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21이 찜한 새 책

더 넓은 세계사

이희수 외 6명 지음, 삼인 펴냄, 2만8천원

우리에게 익숙한 세계사 지식은 ‘3분의 1쪽 세계’에 그친다. 서구와 동북아시아 양쪽 끝이 ‘중심’, 다른 지역은 ‘주변’의 엑스트라였다. 국내의 아프리카·서아시아(이희수), 중앙아시아(이평래), 인도(이옥순), 동남아시아(조흥국), 라틴아메리카(서성철·정혜주·노용석) 연구자들이 변방의 역사를 세계 무대의 주역으로 세웠다. 컬러 사진과 지도가 풍부하다.

라이프 인사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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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젠의 로마사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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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독일의 첫 노벨문학상을 받은 역사학자 몸젠의 <로마사> 시리즈 번역본의 제6권. 원저는 세 권으로 출간됐다. 기원전 1세기 로마가 카르타고를 제압하고 지중해 패권을 장악할 당시 로마 지배층은 헌신과 개혁의 모범이었다. 그러나 이후 통치계급은 도덕적 타락과 무능력, 파렴치, 폭력적 권력투쟁, 탐욕과 사치로 파국을 향해 치닫는다.

서점의 시대

강성호 지음, 나무연필 펴냄, 1만8천원

한국 서점의 역사를 옛 사진들과 함께 보여준다. 근대 인쇄술은 출판산업과 서점의 산파였다. 한반도에는 19세기 후반 서양 문물과 함께 등장했다. 식민지, 해방공간, 군사독재 시대에는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이들의 아지트였다. 활자를 매개로 한 지식산업의 급성장은 고서점, 전문서점, 대형서점, 온라인서점, 독립서점 등 다양한 형태로 진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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