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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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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고라니 먹을 것까지 챙겨야지

옥수수 한 알이 싹을 틔워 알이 꽉 차는 건 기적 같은 일, 한 알도 허투루 말라는 어머니
등록 2022-10-09 17:02 수정 2022-10-10 00:36
내년에 심어보려고 옆집에서 얻어온 옥수수를 볕에 말리고 있다.

내년에 심어보려고 옆집에서 얻어온 옥수수를 볕에 말리고 있다.

옥수수 파는 건 끝났지만 옥수수 농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덜 여문 것, 너무 쇤 것을 빼고 딱 좋은 것만 골라 따서 팔고 나니, 절반은 그대로 옥수숫대에 매달린 채 남았다. 남은 옥수수는 완전히 여물어 말라가고 있다.

엄마랑 진부에 갔다. 엄마는 남은 옥수수를 보더니 그대로 바구니를 들고 옥수수밭에 들어갔다. 마른 옥수숫잎 서걱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한참을 서걱거리다 바구니 가득 옥수수를 따 들고 돌아와 쏟아놓는다. “이거 아까워서 어떻게 하냐. 얼른 따라.” 그거 따서 뭐 하냐 하니 “알갱이 따서 뻥튀기도 해먹고, 옥수수범벅도 해먹고, 방앗간에 가져가 옥수수쌀로 만들어 밥도 해먹지” 하신다. 그러고 보니 어릴 때 엄마가 겨울에 마른 옥수수알을 삶다가 팥을 넣고 압력솥에 푹 쪄서 질퍽질퍽하고 들척지근한 음식을 종종 해줬던 기억이 난다. 한 번 먹을 땐 맛있는데, 여러 번 먹으면 질리고 먹기 싫었던 음식이다. 그게 옥수수범벅이었지.

옥수수가 아까운 건 내 마음도 똑같지만, 뻥튀기를 먹으면 얼마나 먹고, 옥수수쌀로 밥을 해먹으면 몇 년은 먹어야 할 양이고, 옥수수범벅은 굳이 먹고 싶은 것도 아닌데 저걸 저렇게 열심히 따서 어쩌나 싶었다. “먹을 만큼만 따고 놔둬요. 갈아놓으면 내년에 거름 되니까 아까워 마시고. 그거 따다 병나요.” 잔소리해도 엄마 귀엔 들어가지 않는다. 따려면 크고 성한 것만 따지, 아랫대에 붙은 손바닥만 한 것까지 굳이 따느라 고생이다. 잘생긴 거는 사람이 먹고, 못생긴 거, 작은 거는 뒀다가 한겨울 먹을 거 없을 때 산짐승들 먹이로 던져주란다. “먹을 거 없을 때 이런 거라도 있으면 얼마나 반갑겠어.” “엄마 누가 들어. 밭에다 먹이 줬다가 고라니가 맛집이라고 자꾸 내려오면 마을 사람들이 좋아하겠어?” 하니 그럼 산에 올라가서 주고 오란다. “걔네들도 살아야지.”

인간은 타인의 열정에 끌린다더니, 엄마가 하도 옥수수에 진심이니 나도 양동이를 들고 옥수수밭을 서걱거리고 돌아다니며 마른 옥수수를 땄다. 아침 7시에 시작해 저녁 7시가 되도록 밥 먹는 시간 빼고 계속 땄는데 절반 정도는 결국 못 따고 남겨뒀다. 그렇게 딴 옥수수는 마르도록 농막 바닥에 널어놓고 왔다. 엄마는 심심한데 동네 할머니들하고 옥수수알이나 떼겠다고 한 자루 차에 실었다. 또 한 자루는 “이거는 느네 오마니(시어머니) 갖다드려라. 갖고 가면 다 알아서 잘 해드실 거야” 하신다.

농부의 딸로 태어나 결혼 전까지 농사일했던 엄마가 구시렁구시렁하신다. “농부는 심을 적에도 한 포기도 빈자리 없게 심고, 알뜰히 거둬서 팔고 누굴 나눠주고 한다. 길거리에 떨어진 낱알도 아까워서 한 알씩 주워다 남의 집 닭장에 주는데, 멀쩡한 옥수수를 안 따고 내년에 거름한다는 소리를 하는 걸 보면 너네는 아직 농부가 아닌 거야.”

심고 거두기는 내가 했지만 옥수수 한 알이 싹을 틔워 알이 꽉 찬 옥수수를 생산하는 건 기적 같은 일이다. 깊이 생각해보면 한 알도 버리기 아까운 소중한 산물임은 맞다. 맞는데, 먹을 게 넘쳐나 버리는 게 일인 이상한 풍요의 시대에 수확해야 다 먹지도 못하는데 따느라 힘쓰는 게 손해라는 얄팍한 합리성을 추구하는 나는 농부의 마음을 갖기엔 아직 먼 것 같다.

글·사진 김송은 송송책방 대표

*농사꾼들: 주말농장을 크게 작게 하면서 생기는 일을 들려주는 칼럼입니다. 김송은 송송책방 대표, 이아롬 프리랜서 기자, 전종휘 <한겨레> 기자가 돌아가며 매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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