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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에 붙잡힌 아이를 구하라

문화 차이에서 비롯된 환자 가족과 의료진 사이 갈등과 이해의 기록 <리아의 나라>
등록 2022-09-17 16:29 수정 2022-09-18 01:50

1982년 10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센트럴밸리의 한 공립병원 응급실에 생후 3개월 여아가 실려왔다. 라오스 난민인 몽족 부부의 아이 리아였다. 아파트 현관문이 쾅 닫히는 소리를 들은 뒤 리아는 급작스러운 발작을 일으켰다. 공교롭게도 응급실에 도착할 즈음 증세가 멈췄다. 부부는 아이의 증상을 ‘코 다 페이’(영혼에 붙들리면 쓰러진다는 뜻)로 여겼다. 반면 당직 의사는 아직 남아 있는 기침과 거친 호흡을 근거로 ‘기관지염 초기’라는 오진을 하고 항생제 처방만 했다. 양쪽 사이에 의사소통은 전혀 안 됐다. 한 달 뒤에도 같은 상황이 반복됐다. 세 번째로 응급실을 찾고서야 리아는 뇌전증(간질) 진단을 받았다. 진찰부터 치료까지 몽족의 전통 치유법과 서양의학의 과학적 접근법은 너무나 달랐다. 몽족에게 뇌전증 환자는 ‘치 넹’(몽족의 샤먼)이 되는 게 관례였다. 선택이 아니라 일종의 소명이었다. 발작 증세는 남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무의식 상태로 진입하는 단계다. 반면 서양의학에서 뇌전증은 뇌의 돌발적인 기능부전으로, 치료해야 할 병증일 뿐이다.

아이의 증세가 나아지지 않자 의료진은 복용약의 종류와 수량을 계속 늘렸고, 부모는 차도가 없는 약을 먹이지 않았다. 의료진은 증상 완화 주사를 놓으려 리아의 팔다리를 꽁꽁 묶었고, 환자의 정맥은 자꾸만 숨어들었다. 그러나 아이의 증상은 엄마 품에 안기면 잦아들었다. 문화적 배경이 전혀 다른 환자와 의료진은 각자의 지식과 선의로 최선을 다하지만 상황은 더 큰 파국으로 치닫는다. 왜 그렇게 됐을까?

<리아의 나라>(앤 패디먼 지음, 이한중 옮김, 반비 펴냄)는 미국에서 최악의 의료분쟁 중 하나로 꼽히는 사례를 9년에 걸쳐 기록한 현장 르포이자 문화인류학 보고서다. ‘합리적인 의사들과 그들의 말을 듣지 않는 환자 가족의 갈등’으로 단순화되기 쉬운 구도가 섬세한 관찰과 치밀한 자료 조사, 방대한 인터뷰 등에 힘입어 생동감 넘치는 논픽션 문학으로 재구성됐다. 17차례나 입·퇴원을 반복하는 동안 상호 불신이 문화적 다양성과 경험의 차이에 대한 이해로 이어지는 과정은 험난하지만 감동적이다. “양쪽 모두에 필요했던 것은 ‘문화적’ 통역자였다.” 미국의 의과대학 다수가 이 책을 정식 교재로 채택했다.

한때 독립 왕국을 세웠으나 지금은 고산지대 소수민족이 된 몽족의 역사와 문화, 프랑스 식민지에서 독립한 라오스의 근현대사, 1970년대 ‘도미노 공산화’를 막으려 몽족을 비밀 군대로 활용한 미국 중앙정보국(CIA), 몽족이 겪은 이주와 차별 등 배경지식은 서사의 긴장감과 풍부함을 더한다. 1997년 초판에 이어 2012년 전면 개정판이 나왔다. 지은이는 “리아의 가족과 의사들을 알게 된 후, 나는 진심으로 양쪽 모두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책임을 지우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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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을 구성할 권리

김순남 지음, 오월의봄 펴냄, 1만3800원

결혼과 혈연으로 성립되는 ‘정상 가족’ 관념은 갈수록 희미해진다. 1인 가구 급증과 비혼 확산 등 급격한 가족 변동은 시민적 유대에 새로운 상상력과 법적 기준을 요구한다. 가족 구성권은 “다양한 가족 형태의 차별 해소, 모든 사람이 원하는 가족 공동체를 구성하고 차별 없는 지위를 보장받을 권리”다.

생명해류

후쿠오카 신이치 지음, 김소연 옮김, 은행나무 펴냄, 1만7천원

남태평양의 화산섬 갈라파고스제도는 찰스 다윈의 진화론이 잉태된 곳이다. 일본의 분자생물학자가 현장 답사를 바탕으로 ‘진화의 최전선 갈라파고스에서 발견한 생명의 경이’(부제)를 보여준다. 그곳에서 “인간의 존재와는 관계없이 생명은 각자의 온전한 삶을 살고 있다. 낙원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전통주 인문학

김상보 지음, 헬스레터 펴냄, 4만원

한민족의 음주문화에 대한 인문학적 고증. 우리 조상은 하늘에 제사 지낸 뒤 ‘음복연’을 즐겼다. 백제는 음양오행법을 안다는 기록도 있다. 술은 양(陽), 안주는 음(陰)이므로 둘이 결합해야 주도(酒道)가 이뤄진다. 신라 왕실의 음주 놀이 기구 주령구에는 음진대소(飮盡大笑), 삼잔일거(三盞一去) 같은 풍속도 보인다.

세상이 멈추자 당신이 보였다

이향규 지음, 창비교육 펴냄, 1만7천원

한국에서 다문화 청소년 등 경계에 있는 이들을 연구하고 돕던 저자가 영국에서 ‘이주민’이 된 뒤 연재한 <한겨레21> ‘시험과 답’의 글을 묶었다. 한국의 교육을 멀리서 살피고, 영국에서 자라는 아이들의 교육과정을 지켜보고 비교하면서, 코로나19 시국을 지혜롭고 다정하게 헤쳐나간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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