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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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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점이 안내하는 ‘채식할 결심’

인도에서 채식은 헌법적으로 보호받을 권리, ‘채식주의자 상품’ 눈에 띄게 구별해서 보여줘
등록 2022-08-10 07:25 수정 2022-12-09 07:29
사무실로 배달된 카레 등 음식이 베지(녹색)와 논베지(갈색) 포장으로 나뉘어 있다.

사무실로 배달된 카레 등 음식이 베지(녹색)와 논베지(갈색) 포장으로 나뉘어 있다.

“너 ‘베지’(Veg)였어?” 인도인 동료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식당에서 구운 파니르(생치즈)를 잔뜩 시키고 난 뒤였다. 인도에선 흔히 채식을 ‘비건’이 아니라 ‘베지’라고 부른다. ‘채식주의자’를 의미하는 영어단어 베지테리언(Vegetarian) 앞글자를 따왔다. 고기를 먹는 사람은 ‘논베지’(Non-veg)라고 부른다. 채식하는 사람이 기본값이다. 다른 존재를 해치지 않고 죽이지 않는 채식을 육식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함을 알 수 있다.

15억 명 인도인, 채식 방법도 제각각

인도 ‘베지’의 가장 큰 특징은 채식을 하지만 유제품을 가리지 않는 것이다. 채식주의 분류에 따르면 ‘락토’(Lacto)에 해당한다. 인도의 ‘식품 안전 및 기준법’(2011)도 이런 인식을 반영한다. 법에서 논베지 식품은 “조류, 곤충, 담수 또는 해양 생물, 달걀 또는 동물 유래 제품을 포함한 모든 동물 전체, 또는 일부를 포함하는 식품”이라고 규정했다. 우유와 유제품, 꿀, 밀랍은 베지 식품이라는 말이다. 완전 채식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때는 ‘퓨어 베지’(Pure Veg) 또는 ‘비건’(Vegan)으로 구분한다. 소고기는 안 되는데 소젖은 되는 이유가 뭘까. 동료는 간단하게 답했다. “우유를 얻겠다고 소를 죽이진 않잖아.”

으스스하게 추운 날 한 잔씩 생각나는 인도식 밀크티 ‘짜이’나 더운 날 달큼상큼하게 몸을 깨워주는 ‘라씨’도 모두 베지 음료다. 치즈를 넣은 시금치 카레 ‘팔락 파니르’에도 정제버터인 기(Ghee)가 들어가는데 베지 음식이다. 앉자마자 치즈 요리를 주문하는 내가 동료 눈에는 베지로 보였던 것이다. 오해를 살 만했다.

인구 15억 명에 가까운 인도에서 채식의 스펙트럼은 아주 넓다. 그래서 인도에서는 회식 전 채식 여부를 꼭 조사한다. 채식하는 사람에게는 어느 정도로 엄격하게 지켜야 할지를 묻는다. 식사 자리에서는 채식하는 사람과 아닌 사람이 나눠 앉는다. 엄격하게 채식하는 사람은 식기, 조리도구도 구별한다. 동료나 친구의 채식 여부를 알게 됐다고 해도 방심할 수는 없다. 같은 힌두교인이라 해도 모시는 신이나 스승, 속한 교파에 따라 채식하는 시기가 다르다.

팀원 모두가 논베지라고 철석같이 믿은 나도 실수했다. 동료들과 점심을 먹으러 갔다가 한 사람이 난색을 보인 것. 동료가 속한 교파는 ‘수요일마다 채식하라’는 계율이 있다고 했다. 다행히도 채식 요리를 주문할 수 있는 식당이라 즐겁게 식사를 마쳤지만, 이후엔 수요일을 피해 회식 날짜를 잡는다. “채식 전문 식당에 가면 되지 않느냐”고? 내가 만난 인도 사람 대부분은 기회가 있다면 고기를 먹고 싶어 했다.

네모 안에 녹색 원이 찍힌 베지 표지.

네모 안에 녹색 원이 찍힌 베지 표지.

북쪽은 엄격, 남쪽은 느슨

그나마도 내가 현재 사는 남인도 벵갈루루는 채식에 느슨한 편이다. 2019년부터 2년 동안 15~49살 국민을 상대로 실시한 국민건강조사(NFHS-5)에 따르면, 인도 남쪽 끝에 있는 케랄라는 주민의 98.5%가, 그 옆에 있는 타밀나두는 96.4%가 ‘고기를 먹는다’고 답했다. 반면 힌두 중심의 보수적 분위기가 있는 북쪽 지역은 채식 인구가 다수다. 라자스탄이나 하리아나는 ‘고기를 먹는다’고 답한 사람이 각각 31.4%, 32%에 불과하다. 인도 전체적으로 베지 인구는 줄어드는 추세다. ‘고기를 전혀 먹지 않는다’고 답한 남성은 16.6%, 여성은 29.4%에 그쳤다. 철저하게 채식하는 것으로 알려진 자이나교도 육식 비율이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남성 신도의 14.7%가 생선, 닭고기 등을 먹는다고 답했는데, 2015년과 견줘 11%포인트 이상 늘어났다.

그렇더라도 여전히 인도는 채식하기에 좋은 환경이다. 채식과 비채식의 구분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모든 식품엔 눈에 띄는 곳에 ‘Veg’ 혹은 ‘Non-veg’라는 문구나 표지가 있다. 베지로 분류되는 식품 또는 제품은 네모 안에 원이 그려진 초록색 표지로, 논베지는 네모 안에 세모가 그려진 갈색 표지로 구분됐다. 식당과 식당 메뉴판 또한 이 규정을 따른다. ‘초록 점’만 따라가면 채식할 수 있는 환경이다.

채식은 헌법으로도 보장받는다. 2022년 3월 델리 고등법원은 ‘식품 성분을 완벽하게 공개해달라’는 청원에 판결을 내리면서 “(식품의) 성분 공개를 정확하게 하지 않으면 소비자의 기본권을 침해한다”고 설명했다. 법원은 그 근거로 생명과 신체의 자유(헌법 제21조)와 종교의 자유(제25조)를 들었다.

최근엔 100% 채식주의 슈퍼마켓도 생겼다. 2022년 2월 문을 연 ‘심플리 남다리스’(Simpli Namdhari’s)의 모기업인 남다리스그룹은 인도 최대 종자기업 ‘남다리 시즈’(Namdhari Seeds)에서 출발한 시크교 기업이다. 이 슈퍼마켓은 단일 원산지에서 생산한 농산물과 유제품을 식탁까지 직접 공급할 것을 약속했다.

맛있는 채식 요리에 기울여온 위대한 유산

집 근처 약 300평(1천㎡)의 슈퍼는 모두 채식주의 상품으로 채워져 있다. 식재료는 물론이고 치약·샴푸 같은 생필품과 로션·크림 같은 화장품까지 포함한다. 눈길을 끈 곳은 냉동 쇼케이스였다. 열 칸 중 두 칸이 다양한 맛의 대체육으로 가득 차 있었다. 냉장식품 판매대엔 배추김치와 백김치, 깍두기도 있었다. 일반 슈퍼마켓과 다름없어 보이는 화장품 매대의 제품들은 등 뒤에 베지·비건·할랄·크루얼티-프리 등의 인증을 달고 있다.

“고기를 먹지 않을 뿐이지, 사람들은 다 맛있는 걸 먹고 싶어 합니다.” 유튜버 ‘승우아빠’는 자신의 방송에서 채식 레시피를 공개하며 말했다. 인도에서 채식하려 하면, 인도인이 최대한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 해온 노력을 편하게 누리기만 하면 된다. 고기를 먹어야겠다는 유혹만 이겨내면 맛있는 음식은 널려 있다. ‘초록 점’을 따라 매일 점점이 이어가다보면, ‘베지 스펙트럼’을 넘어 ‘베지’로 자칭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벵갈루루(인도)=김재희 회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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